소설리스트

91. 어머니와 어머니 (91/183)

91. 어머니와 어머니2022.03.12.

재광이 예나에게 말했다.

16551160346993.jpg“할아버지다. 내가 네 아빠의 아빠다. 알겠어?”

16551160346998.jpg“어, 근데…….”

곰곰이 생각하는 듯 주춤하던 예나가 곁에 있던 엄마를 불렀다.

16551160346998.jpg“엄마, 이 할아버지 월요일에 학원 앞에 서 있던 할아버진데?”

‘이 할아버지’란 호칭에 놀란 정오가 냉큼 빨리 달려와 예나의 입을 막았다. 재광도 아이의 말에 놀랐다. 아이가 영특해서. 정오는 무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재광은 껄껄껄 웃었다. 정말 똑똑해. 내 손녀가 맞아.

16551160346993.jpg“그래. 할아버지가 찾아갔었지.”

할아버지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흐뭇하였으나 지헌의 표정은 뚱하기 그지없었다.

16551160347012.jpg“아버지, 예나 보러 찾아가셨어요? 학원까지?”

집요하게 예나의 학원까지 찾아갔단 사실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무모했다. 아이가 놀라면 어쩌려고 그러셨나.

16551160346993.jpg“학원 안에 들어간 게 아니라 건물 앞에서 지나가다가 본 거야.”

16551160347012.jpg“거길 지나가다가요?”

16551160346993.jpg“그래. 그냥 지나가다 마주친 거다.”

아버지의 대답이 변명처럼 들렸다. 지헌은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의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는 집안. 그 점이 정오네와 가장 많이 달랐다. 재광은 재광 나름대로 억울하여 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16551160346993.jpg“알은체도 안 했고 말도 안 걸었다.”

그저 쳐다보기만 했어. 쳐다보기만! 하지만 지헌의 표정이 너무 독하여 재광은 피신의 필요성을 느꼈다.

16551160346993.jpg“난 가야겠다. 너무 바빠서.”

정말로 바쁘기도 했다. 오늘 역시 바쁜 시간을 쪼개서 아이를 보러온 것이었다.

16551160346993.jpg“우리는 조만간 또 만날 수 있겠지?”

아들은 포기했고, 예비 며느리에게라도 잘 보여 손주와 친해질 계산으로 정오에게 상냥하게 인사한 재광은 예나를 흐뭇하게 쓰다듬었다.

16551160346993.jpg“예나야, 또 보자. 할아버지 기억하고?”

아들을 향해서는 역시 살가운 표정을 짓기 힘들었다.

16551160346993.jpg“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얼른얼른 진행해.”

예비 며느리에겐 상냥하게, 손주에겐 다정하게, 아들에겐 엄하게. 상대에 맞게 맞춤형 응대를 보여준 재광이 떠난 후, 지헌은 정오의 표정을 살폈다.

16551160347012.jpg“우리 아버지 원래 저런 분 아니야. 엄청 무서운 분이야.”

왜일까. 정오가 재광을 존경스럽게 바라보는 눈빛에 왠지 심술이 났다.

16551160347012.jpg“맘 좋은 아저씨처럼 웃다가 가셨지만, 사실은 이정오 뒷조사 이예나 뒷조사까지 철두철미하게 하셨을걸. 그러니 학원까지 찾아가신 거지.”

16551160377197.jpg“…….”

16551160347012.jpg“그러니까 너무 믿지 마. 너무 좋아할 것도 없고.”

16551160377197.jpg“아버지를 남처럼 얘기하네.”

16551160347012.jpg“아버지는 가정적인 분은 아니야. 33년 동안 아버지랑 대면한 건 손에 꼽을 정도야.”

정오는 7년 전에 지헌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지헌은 그때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기억은 잃었어도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것이 신기했다.

16551160377197.jpg“그래도 감사해야지. 오빠를 믿어주시고 어처구니없는 친자확인검사에도 흔쾌히 협조해주셨으니.”

16551160347012.jpg“그건 그렇지.”

지헌이 마지못해 정오의 의견에 수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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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엽은 유전자 연구소에서 전화가 오길 기다렸다. 연구소 직원에게서는 꽤 늦게 연락이 왔다. 직원은 다소 불안해하는 목소리로 그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고했다.

16551160346993.jpg[말씀하신 대로 다 했습니다. 의뢰인 이름은 정지헌이었고, 같이 검사하는 다른 분은 익명이었어요. 그래서 익명 의뢰인의 혈액을 말씀하신 대로 완벽하게 바꿨죠. 저는 성공하긴 했는데, 그쪽에서 다른 검사를 추가로 진행한 모양이에요. 그 검사에서는 친자라고 나왔고요.]

16551160408041.jpg“다른 검사라니?”

16551160346993.jpg[의뢰인이 다른 사람을 시켜서 친자검사를 하나 더 진행했어요. 익명으로도 친자확인검사가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해서 검사한 거죠.]

직원의 고백을 들은 은엽이 소리쳤다.

16551160408041.jpg“잘 보고 막았어야지!”

16551160346993.jpg[익명으로 검사를 의뢰했는데 어떻게 알고 무슨 수로 막습니까. 머리카락에 이름이라도 쓰여 있는 줄 알아요?]

직원은 도리어 은엽에게 따지고 들었다. 은엽은 이마를 감쌌다. 정지헌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두 번째 검사에서 실패하면 세 번째 시도를 하겠구나 생각했는데.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에 제삼자를 투입했을 줄이야. 남을 믿지 않는 은엽의 입장에서 생각했으니 지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정오에 대한 지헌의 마음이 얄팍할 거라고 속단했다. 은엽이 여태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정오가 먼저 정지헌에게 접근했을 거라는 전제였다. 가설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은엽은 지헌이 더욱 애타게 정오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채은엽이 보아온 정지헌은 그런 사람이었다. 누구와도 두텁게 지내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하찮게 여기고, 제 자존심만 중요하고. 적어도 7년간은 그랬다. 몸속을 흐르는 피마저 차가울 것만 같은 지독한 녀석이 이토록 열정적으로 방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디서 굴러먹다가 7년 만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나타난 아이를 진심으로 아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잘못된 계산이었다.

16551160346993.jpg[이 일로 제가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짐작하시죠? 검사가 잘못됐다고 고객이 클레임을 걸었다고요. 어쨌든 저는 변호사님이 하라는 대로 했으니 약속대로 변호사님도 제 이혼소송을 도와주셔야겠습니다. 그럼 기대하겠습니다.]

제 말을 마친 직원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일은 일대로 실패하고, 어려운 뒤처리까지 맡아 하게 생겼다. 은엽의 참패였다. * 재광과 헤어져 국순의 식당으로 온 세 사람은 이른 저녁 식사를 했다. 지헌이 회사로 돌아가 야근을 해야 하는 처지라 국순이 일찍 밥상을 차렸다. 예나는 이번에도 역시 지헌의 무릎에 앉았다. 예나가 지헌에게 아기새처럼 반찬을 받아먹으며 물었다.

16551160346998.jpg“근데 엄마가 엄마고 아빠가 아빠면 엄마랑 아빠는 부부 아니야?”

지헌이 대답했다.

16551160347012.jpg“아직 아니야.”

16551160346998.jpg“왜 아니야?”

16551160347012.jpg“아직 결혼을 안 했어.”

16551160346998.jpg“왜 안 했어?”

16551160347012.jpg“시간이 없어서. 근데 곧 할 거야.”

자신이 원하는 바를 딸이 먼저 얘기해주어 지헌은 기분이 좋았다.

16551160347012.jpg“엄마 아빠 언제 결혼했으면 좋겠어?”

16551160346998.jpg“토요일에.”

16551160347012.jpg“왜 토요일에 했으면 좋겠어?”

16551160346998.jpg“예나가 어린이집이랑 학원 안 가는 날이니까.”

지헌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고 정오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16551160377197.jpg“예나야, 결혼은 그렇게 며칠 만에 뚝딱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나중에 예나가 결혼할 때도 확확 해치우려고 하면 엄마는 안 된다고 할 거야. 결혼은 대충 하면 안 돼, 알았지?”

16551160346998.jpg“응.”

알고 대답하는 건지, 그냥 대답만 하는 건지. 예나의 대답은 그저 해맑기만 하다.

16551160347012.jpg“혼인신고를 먼저 해. 내일 당장 하자. 나머지는 하나씩 정리하고.”

결혼 얘기가 나오니 지헌도 착착 다음 단계를 이야기했다.

16551160347012.jpg“우선은 집 문제가 제일 급해. 같이 살려면 좀 더 넓은 집으로 옮겨야 할 거야. 일단 우리 집에서 다 같이 지냈으면 하는데, 어때?”

16551160377197.jpg“엄마가 높은 곳을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정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예나가 해맑게 말했다.

16551160346998.jpg“그럼 아빠가 우리 집으로 오면 되겠다!”

16551160347012.jpg“그럼 그럴까?”

지헌이 맞장구쳤다. 국순이 주방에서 나오며 쓰게 말했다. 국순 또한 이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던 것이었다.

16551160472052.jpg“아빠가 왜 거기서 살아. 아빠 넓은 집 놔두고.”

16551160347012.jpg“어머니, 저는 괜찮습니다. 어디서든 언제든 같이 살 수 있습니다.”

16551160472052.jpg“그래도 천천히 준비해. 우리 집은 너무 좁지. 화장실도 하나뿐이라 불편해서 안 돼.”

국순의 조언은 따끔했다.

16551160472052.jpg“규칙을 정해. 일단 집을 옮기기 전에는 살던 대로 살아. 그게 나도 편하고 너희들도 편해.”

국순의 규칙으로 상황은 금방 정리되었다. 물론 정오의 집에서 지헌과 당장 같이 산다고 해도 국순이나 정오나 예나는 크게 불편하지 않다. 그저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올리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부족한 것 없이 살아온 지헌에게는 벅차게 여겨질 수도 있다. 쭉 뻗어 눕기에 비좁은 방, 발길에 채는 살림살이, 하나뿐인 화장실……. 그 모든 걸 지헌은 겪어보지 못했다. 국순은 지헌의 입장을 헤아려 쓴소리를 맡았던 것이다. 딸을 결혼시키려니 엄마는 심란하다. 지헌의 집안 형편에 맞출 수가 없으니 혼수도 예단도 그들의 성에 차지 않을 텐데. 국순은 딸에게 자꾸 미안해졌다. 저녁 식사를 마친 예나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여 정오가 예나를 데리고 식당 밖으로 떠난 사이에 국순이 지헌에게 말했다.

16551160472052.jpg“정오랑 예나 데려가도 돼.”

16551160347012.jpg“네?”

16551160472052.jpg“예나 아빠 집이 넓다면서. 우리 정오랑 예나 데려가서 셋이서 오붓하게 지내도 된다고.”

16551160347012.jpg“어머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16551160472052.jpg“그쪽 가족이 진짜지. 나는 임시 가족이었고.”

행복을 양보하는 국순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이 묻어나기도 했다. 국순은 제 속마음을 다 읽히지 않으려 부러 미소 지으며 지헌에게 말했다.

16551160472052.jpg“내가 그렇게 키우지 못했으니 우리 정오만이라도, 우리 정오가 낳은 아이라도 온전한 가족을 가졌으면 했는데 드디어 꿈을 이루네.”

16551160347012.jpg“임시 가족이 아니죠, 어머니.”

지헌이 예의 바른 목소리로 대꾸했다.

16551160347012.jpg“정오와 가까워지기 전에, 정오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엄마와 자기는 소울메이트라고.”

16551160472052.jpg“…….”

16551160347012.jpg“오랫동안 어머니께서 정오의 단짝 친구였겠죠. 유일한 버팀목이었을 테고요.”

사실은 자신이야말로 온전한 가족의 사랑이라는 걸 느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면 그녀는 믿을까. 자신이 닮고 싶고 그 안으로 스며들었으면 하는 가족의 모습은 모두 당신이 보여주고 있다고 얘기한다면 나를 딱하게 여기시려나. 오히려 자신의 마음이, 제 가족의 마음이 너무나 메마르고 가난한 것 같아 지헌은 조금 부끄러웠다.

16551160347012.jpg“아마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정오는.”

16551160472052.jpg“…….”

16551160347012.jpg“이제 제게도 그럴 거고요.”

늘 쿨함을 유지하던 국순의 두 눈이 따뜻하게 젖어갔다.

16551160347012.jpg“계속 옆에 계셔야 해요, 어머니.”

  * 다음 날 아침. 지헌은 어김없이 정오의 집에 들러 예나를 등원시키고 정오와 함께 출근했다. 밤사이에 떨어져 있었던 만큼 예나는 지헌에게 한껏 어리광을 부리다가 어린이집 버스에 올랐다. 감동과 감격으로 시작한 하루였다. 회사에 도착한 지헌은 집무실 앞을 지키는 비서에게도 기분 좋게 인사했다.

16551160347012.jpg“좋은 아침입니다.”

하지만 비서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16551160346993.jpg“이사님, 사모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무실에서 영미가 지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헌은 굳은 얼굴로 집무실 문을 열었다.

16551160347012.jpg“어쩐 일이세요, 여기까지 또.”

살갑지 않은 인사에 영미가 원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지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16551160528415.jpg“엄마가 밤새 고민했어.”

영미의 눈은 젖어 있었다. 하지만 지헌에게는 그 눈빛이 국순의 눈처럼 따뜻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역시나, 영미의 결심은 지독했다.

16551160528415.jpg“아이만 데려와. 아이는 엄마가 키워줄 테니. 좋은 교육 받고 남부럽지 않게 누리고 살도록 해줄 거야, 엄마가.”

16551160347012.jpg“어머니.”

16551160528415.jpg“그쪽 집안과 널 맺어줄 수는 없어. 신데렐라도 신데렐라 나름이지.”

울분이 터지는 듯 영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지헌의 회사. 체면을 생각한 영미가 이내 목소리를 낮추었다.

16551160528415.jpg“널 그렇게, 싸구려로 팔아치우듯이 결혼시킬 수는 없어. 엄마는 절대 그렇게 못 해.”

하지만 그 매정한 주장은 그대로였다.

16551160528415.jpg“다 널 아껴서 그러는 거야. 널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너도 언젠가 엄마 마음을 이해하게 될 거야. 엄마가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는지.”

지헌은 오랜만에 어머니의 눈물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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