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우리는 기훈 씨를 지켜주고 싶었지2022.03.16.
역시 어머니의 눈물에는 지헌 또한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마음은 단단히 닫아걸었다.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지헌은 동요하는 감정을 꾹 눌러 삼키고는 영미에게 티슈를 내밀었다. 그리고 당부했다.
“절대 예나나 정오 찾아가지 마세요. 정오 어머니한테도요. 만약에 그 세 사람 찾아가시면, 저 다신 어머니 안 봅니다.”
따끔하게 경고한 지헌은 곧장 집무실 문을 열었다.
“이렇게 근무시간에 갑자기 찾아오시는 것도 불편합니다. 저도 제 스케줄이 있어서요. 하실 말씀 있으시면 전화를 먼저 하세요.”
“너…… 왜 그렇게 매정해졌니?”
영미의 목소리에 반쯤 열린 문이 다시 닫혔다. 저벅저벅. 아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왠지 날카롭게 여겨졌다. 아들이 아닌 타인을 마주하는 듯한 섬뜩한 느낌에 영미의 눈이 커졌다. 이 또한 영미는 알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어미의 입장에선 아들이 여자를 잘못 만나 변한 것처럼 여겨졌다. 영미는 모두 이정오의 탓을 하고 싶어졌다.
“엄마를 안 보겠다니. 안 그랬잖아. 왜 그래. 왜 이렇게 변했어!”
“변하긴요. 저도 어머니를 사랑해서 그러는 건데요.”
소름 끼치도록 냉랭한 목소리로 지헌이 대답했다. 사랑이라는 발음의 끔찍한 뒷면을 확인해버린 느낌이었다.
“사랑해서 미리 말씀드리는 거잖아요. 마찰 없이 잘 지냈으면 해서.”
영미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제껏 아들에게 선물처럼 받아온 사랑의 고백은 텅 빈 상자였다는걸.
* 영미를 떠나보낸 후, 지헌은 바로 정오를 찾아갔다. 영미가 회사를 나서려다가 방향을 틀어 정오에게 가지는 않을까 불안했다. 정오를 지켜야 했다. 다행이랄까, 영미는 회사를 무사히 떠난 것 같았고 정오는 회의실에 혼자 있었다. 지헌이 정오의 곁에 다가가 앉아 빤히 쳐다보자 정오가 물었다.
“왜?”
“아니. 아니야.”
부끄럽다. 부끄러워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너의 어머니는 그토록 따뜻하게 나를 맞아주었는데, 나는 그 따뜻함에 보답할 수가 없다. 미안하고 창피했다.
“우리 어머니가 찾아올 수도 있어.”
“나라면 괜찮아.”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에 정오는 초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예나를 괴롭히신다면 그건 가만히 못 있어.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나라면 괜찮아. 걱정하지 마.”
근심이 그것이던가. 그의 무거운 표정을 확인한 정오도 그가 염려스러웠다. 그의 에너지를 돌려놓을 만한 화제를 찾아 곰곰이 생각해보던 정오는 괜찮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우리 예나한테 아빠가 필요하니 같이 살면 좋겠지만…… 어쩔 수가 없네. 방법은 그것뿐이네.”
“무슨 방법?”
“오빠가 주의해줬으면 좋겠어. 예나가 너무 푹 빠지지 않게.”
“뭐어?”
“우리가 같이 살 수도 있겠지만, 같이 살지 못할 수도 있는 거잖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러니 예나한테 너무 바람 넣지 말라고.”
역시, 그녀의 매정한 발언에 그는 곧장 반응을 보였다. 눈썹을 구긴 그가 사납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우리는 이제껏 잘 살았어. 최악의 경우에 상처 없이 모두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 예나보고 제 아빠한테 정 주지 말라고 할 수는 없잖아. 예나는 애긴데. 그러니 오빠가 주의해야지.”
“그래서, 나는 예나한테 정을 주지 말라?”
“그냥 조심해달라는 거지. 예나가 너무 아빠아빠 하지 않게.”
지헌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피식 실소를 지은 지헌이 입술을 비뚜름하게 들어 올리고는 정오에게 물었다.
“솔직히 얘기해봐.”
“…….”
“솔직히 지금 불안하지?”
“뭐가?”
“내가 너보다 더 예나랑 친해질까 봐 불안하잖아.”
“허. 웃겨. 뭔 소리야.”
“나한테 질투하는 거야, 예나한테 질투하는 거야? 어느 쪽이야? 아니면 둘 다?”
“어처구니가 없네.”
“이것 봐. 지금 표정 되게 어색한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러죠. 어이가 없어서.”
능청스럽게 콧방귀를 뀐 정오는 끝까지 연극을 해내지 못하고 이내 웃어버리고 말았다. 정오의 웃음을 확인하고서야 지헌은 깨달았다. 어느새 얼음처럼 굳어 있던 마음이 풀려 있었다. 너를 지키려고 왔는데 또다시 내가 위로받는 느낌. 세상의 수많은 고민을 웃으며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너.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알려주는 너. 나는 이제껏 너 없이 어떻게 살아왔던 걸까. 이제는 네가 없는 그때로 돌아갈 수가 없다. * 은주는 정오에게 할 말이 있어 돌아다니다가 회의실에 지헌과 정오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돌아섰다.
“금방 오시네요?”
기훈이 말을 걸었다. 정오를 찾으러 간다고 하고선 금세 자리로 돌아온 것에 의문을 품었다. 제발 알아들어라, 생각하며 은주는 기훈에게 답했다.
“응. 회의실에 정 이사님이 있길래.”
“정말요?”
“응. 정 이사님이랑 이 대리님이랑 단둘이.”
“단둘이요?”
그러나 기훈은 은주의 의도를 읽어내지 못했다. 웬일인지 그 옆에 있는 박영광 차장만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기훈은 순박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돌연 노트북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회의실에요. 이 대리님 거기 있다면서요.”
정지헌 이사님으로부터 이정오 대리님을 지켜야겠다. 의리와 기사도에 불타는 기훈의 순수한 영혼이 회의실을 향해 성큼성큼 움직였다.
“아니, 아니, 아니, 기훈 씨…….”
영광이 급하게 손을 뻗으며 기훈을 말려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사랑에 빠진 젊은이는 누가 말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은주는 쓰게 미소 지었다. 뭐, 지금 알아서 눈치채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둘이 여자 하나 두고 치고받고 싸우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 끝장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아무리 정 이사가 대단한 사람이어도 젊음의 혈기를 쉽게 이길 수는 없지. 송기훈 씨가 무려 여섯 살이나 더 어린데. 송기훈 씨가 덤벼들면 정 이사도 긴장 좀 하겠어. 이왕 싸우는 거 이겨라, 송기훈 씨.
“하아.”
은주는 후련하게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업무를 이어가는데, 옆에서 한숨 소리가 간헐적으로 계속 들려왔다. 은주는 의자를 뒤로 밀고서 영광에게 물었다.
“차장님, 왜 그러세요?”
“응? 아니야.”
“…….”
“고 대리, 나는 목숨이 두 개도 아니고 용맹하지도 않고, 그냥 가늘고 길게 살고 싶어. 이 일 오래오래 하면서.”
아니라고 대답했던 영광이 곧장 첨언했다.
“그러려면 봐도 못 본 척, 있어도 없는 척, 그래야 할 때가 있다. 그 입장이 조금 괴롭네.”
“…….”
“우리 기훈 씨도 빨리 그걸 알아야 할 텐데.”
아아아. 차장님도 알고 계셨구나. 정 이사와 이 대리의 관계를. 하긴 정지헌 이사가 그렇게 티를 내는데, 같이 해외 출장까지 갔다 왔으니 모를 수는 없겠지. 좀 전에는 기훈을 응원했는데, 뒤늦게 기훈이 조금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업무를 이어가려던 은주는 멈칫했다.
‘가만, 송기훈이랑 정지헌이 끝장을 보면?’
나야 송기훈을 응원하지만, 지금 이정오 대리는 정지헌이랑 세트잖아! 송기훈이 회사를 그만두면? 이 일거리는 다 내 차지잖아! 흐아. 내가 진짜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은주는 의자를 냉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회의실. 기훈이 문을 열고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대리님.”
“어어, 기훈 씨.”
정오는 웃어 보였고, 웃고 있던 지헌의 표정은 단박에 굳어버렸다.
“아, 이사님도 계셨네요. 안녕하십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기훈은 능청스럽게 꾸벅 인사하며 회의실에 착석했다.
“두 분 말씀 나누고 계셨어요?”
기훈의 질문에 지헌은 비교적 친절하게 대답했다.
“다원주류 촬영 얘기하고 있었네요. 송기훈 씨가 고생 많이 했다고.”
개인적으로는 네가 뭔데 끼어드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본부장으로서 자애롭게.
“아닙니다. 제가 졸릴 때마다 대리님이 옆에서 재미있는 말씀 많이 해주셔서요.”
“그래도 운전해서 다녀오기 힘들었을 텐데.”
“아닙니다. 아, 중간에 잠깐 눈도 붙였어요. 우리 잤던 데가 어디죠, 대리님?”
기훈의 도발에 지헌의 눈이 번뜩였다. 사실 기훈은 그를 도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정말로 흑심 없는 대답이었다.
“휴게소에서 기훈 씨는 한 5분 눈 붙인 거고, 저는 바람 쐬면서 커피 마셨어요.”
왠지 해명을 해야 할 것 같아 정오는 급히 사족을 붙였다. 그럼에도 지헌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지헌이 은근히 서슬 퍼런 목소리로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송기훈 씨, 혹시 비밀 잘 지키나? 입이 무거운 편이에요?”
“네. 그런 편입니다.”
지헌의 질문에 의아해하면서도 기훈은 다른 내색 없이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오래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기훈의 볼일은 정오를 지키는 것이었기에, 정오에게 용감하게 말을 걸었다.
“대리님, 저 여쭤볼 게 있는데, 밖에서 기다릴까요?”
“아니야. 얘기 다 끝났어. 그렇죠, 이사님?”
지헌은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까딱 손짓했다. 둘이서 얘기하라고. 지헌이 왠지 삐친 듯해서 정오는 조금 신경 쓰였다. 하지만 물어볼 게 있다는 기훈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정오가 기훈에게 말했다.
“얘기해.”
“탈모 예방 샴푸 광고요. 광고주의 의중을 이해 못 하겠어요. 있는 머리가 잘 자라는 거하고 머리가 나지 않는 곳에 모발을 틔우는 건 다른 문제잖아요.”
“광고주가 뭐라는데?”
“AE가 전달한 메일 확인해보실래요? 근데 좀 워딩이 거칠어요. 감안하고 보셔야 해요.”
“괜찮아, 괜찮아.”
기훈이 노트북 화면을 정오에게 보여주며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동안 지헌은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신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데도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둘만의 세계인 양 대화를 이어갔다. 지헌의 주먹에 꽉꽉 힘이 들어갔다. 저 새X는 나를 견제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눈치가 없는 건가? 조금씩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왠지 내게 도전하는 것 같은데. 지헌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시간을 쟀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참고로 야한 생각 많이 하면 머리 빨리 자란다는 설, 그거 다 뻥이에요. 그게 사실이면 제가 라푼젤이었게요.”
“풉.”
“농담 같죠? 진짜예요.”
“기훈 씨는 순수청년이잖아.”
“그야 대리님 앞에서는 이미지 관리를 좀 하니까.”
더는 못 듣겠네! 지헌이 욱하는 마음에 주먹을 꽉 쥔 사이에 정오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잠깐만 기획팀 차장님 연락이다. 네, 차장님.”
정오가 전화를 받았다. 조용해진 회의실에 정오의 휴대폰 속 기획팀 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정오 대리, 나 맞춤법 하나만 알려줄래요?]
“네. 말씀하세요.”
차장의 목소리에 기훈이 괜히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한계치에 이른 지헌은 그 꼴마저도 지켜볼 수가 없어 말을 걸고 말았다.
“송기훈 씨. 좀 조심하지.”
“……네?”
“여우짓 좀 그만해.”
“…….”
“이정오 대리한테 그만 좀 집적대라고.”
“이사님!”
전화를 끊은 정오가 경악하며 급히 지헌을 불렀다.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며 고은주 대리가 들어왔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 정오와 기훈과 은주의 안색은 같은 농장의 토마토처럼 시뻘건데, 물을 쏟은 장본인만은 호수처럼 고요한 얼굴이었다. 그 뻔뻔스러운 지헌의 표정에 정오는 기가 막혔다. 정지헌, 네가 정녕 미쳤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