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쌍방2022.03.19.
모두가 굳어 있는 사이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은주가 소리쳤다.
“대리님! 계속 찾았잖아요. 여기 계시면 어떡해요!”
은주는 정오의 노트북PC를 대신 정리해주며 외쳤다.
“자. 얼른 정리하고 갑시다, 갑시다. 기훈 씨도 얼른 챙겨! 회의하자고!”
저 앞에서 기다리는 상대방을 보고서도 절대 뛰는 법 없이 고고히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던 천하의 공주마마가, 이토록 날렵하게 짐을 챙기는 모습을 정오는 처음 보았다. 잠시 말문을 잃었으나 은주의 신속한 대처에 정오도 정신을 차렸다. 기훈과 지헌을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지헌이야 걱정 없지만 순수청년 기훈은 염려스러웠다. 얼른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지헌의 막말에 뇌가 얼얼해진 기훈은 은주에게 붙들려 회의실 밖을 나설 때까지 멍한 상태였다. 정오도 지헌을 향해 한번 날카롭게 눈짓을 주고는 회의실을 떠났다. 회의실을 나서며 기훈의 상태를 살폈다. 기훈은 분홍색 클레이로 빚어낸 사람처럼 얼굴뿐 아니라 귀와 목까지 붉어져 있었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로 봐선 지헌의 말을 똑똑히 다 들은 것일 텐데,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기훈 씨…….”
정오가 조심스럽게 기훈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찰나.
“이정오 대리!”
맞은편에서 정오를 찾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전에 전화를 했던 기획팀 차장이 팀장까지 데리고 달려왔다.
“이 대리, 우리 좀 도와줘! 빨리 좀 와봐, 빨리!”
“어? 네? 무슨 일인데요?”
“지금 광고주가 호출했는데, 순발력 있게 임기응변을 해줄 사람이 이 대리밖에 없어!”
“어, 어, 어! 저 회의해야 하는데!”
정오가 기획팀 AE들에게 어깨를 잡혀 연행되듯이 황망하게 끌려가며 외쳤다.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대리님.”
은주가 정오에게 말했다. 사실 급한 회의 따위 없었다. 정오와 기훈을 회의실에서 불러내기 위해 핑계를 댄 거였다. 타이밍 좋게 기획팀이 정오를 데려가 다행이었다. 정오가 만원 지하철의 입구에 서 있던 사람처럼 휩쓸려 떠나 버린 후 은주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기훈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은주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기훈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조용히 자리에 앉으려던 기훈이 순간 움찔했다. 은주의 뒤편으로, 복도를 유유히 걸어가는 정지헌 이사가 보인 것이다. 지헌 역시 회의실을 떠나 집무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기훈 씨, 힘내. 이겨내. 할 수 있어! 자, 업무로 돌아와 열심히 일을 하자고!’
은주는 차마 직접 말하지는 못하고 제 자리에서 응원의 텔레파시를 보냈다. 그러나 묵묵히 앉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기훈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기훈 씨, 어디 가……?”
은주가 애절하게 불렀으나 기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주는 젊은 혈기가 정지헌 이사의 집무실로 향하는 것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기훈은 패기 있게 지헌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사님.”
자리에 앉으려던 지헌이 등을 돌려 중역 책상에 몸을 기대고서 기훈을 바라보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는데도 기훈은 그 기에 눌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굳게 이겨내고서 용맹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이사님, 좀 전에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까?”
“송기훈 씨라면 당연히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역시 지헌은 당황하거나 흥분하는 일 없이 또박또박 답변했다. 기훈이 멈칫하며 대꾸를 하지 못하니 그는 노련하게 먼저 따졌다.
“아니면 내가 생사람을 잡은 건가?”
“…….”
“이정오 대리를 여자로 보는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그럼 내가 사과하고.”
더 이상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돌려 말하는 법도 없었다. 기훈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사람처럼 예리하게 따져 묻자 기훈의 표정이 먼저 변했다. 기훈은 불현듯 깨달았다. 정지헌 이사도 이정오 대리를 좋아하는구나. 하지만 그게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당사자라면 모를까, 정지헌 이사가 자신에게 그런 충고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왜 이사님께 그런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마음을 들킨 기훈이 잠시 침묵하다가 대꾸했다.
“왜 이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건 저와 이정오 대리님 사이의 문제인데요.”
“…….”
“이사님이 이정오 대리님을 일방적으로 좋아하신다고 해서, 제 말투나 행동까지 통제하실 수는 없습니다.”
“아닌데.”
기훈의 주장에 지헌이 딱 잘라 대답했다. 그 당당함에 기훈은 또다시 움찔했다. 정말로 지헌에게 제압당하는 것처럼.
“제 말투나 행동까지 통제하신다면, 저는…….”
“그게 아니라, 난 일방적인 게 아니라고요.”
기훈이 오해를 한 것 같아 지헌이 다시 정확하게 말해주었다. 지헌이 짚어낸 건 기훈의 말투나 행동이 아니라, 자신은 이정오를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충격을 받은 기훈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지헌을 바라보았다. 눈을 크게 뜨니 훈훈한 아이돌 외모가 더욱 빛을 발했다. 지헌의 승부욕이 차올랐다. 얘는 반드시 마음을 접게 해야 한다, 남자의 본능이 지헌에게 따끔한 경고를 보냈다.
“……일방적인 게 아니라면…….”
“쌍방.”
“…….”
“대답이 됐나요?”
지헌의 막힘없는 대답에 기훈의 눈동자엔 지진이 일었다. 가슴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기훈 씨, 입이 무겁다고 했죠?”
“…….”
“비밀 잘 지켜주길 바랍니다.”
지헌은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주겠다는 듯, 먼저 집무실을 떠났다. 끝까지 자신감 넘치고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래서 기훈의 눈엔 더욱 잔인하고 사악해 보였다.
‘대리님은 왜. 왜 하필. 왜 하필 저런 남자랑…….’
반드시 이정오 대리와 연애를 하고 말겠다는 흑심은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존경하는 사람이라, 너무 착한 사람이라, 또 너무나 안타까운 사람이라 지켜주고 싶었다. 자신이 지켜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이 해온 그 모든 것이 훼방이었다니.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은 어딘가 계속 이상했다. 정지헌 이사는 이정오 대리를 유난히 많이 찾았다. 다른 직원들과 다르게 단둘이 시간을 보낸 적도 많았던 것 같다. 정지헌 이사가 해외 출장을 결심한 것도 이정오 대리가 성미란 팀장 대신 해외 촬영에 나서게 되었을 때였다.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착착 맞아떨어지는 순간. 기훈은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고 싶어졌다.
“기훈 씨, 왜, 왜 그래.”
자리로 돌아와 털썩 엎드린 기훈을 보고 박영광 차장이 물었다.
“차장님.”
“…….”
“저 회사 그만두고 싶어요…….”
기훈이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후의 기훈은 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은주가 우려하던 그 불상사였다. 팀의 막내가 에너지를 잃어 도무지 작업에 활력이 붙질 않았다. 어찌어찌 힘없는 손으로 작업한 결과물들은 하나같이 생기가 없었다.
“팀장님, 정지헌 이사님은 제가 아는 최고의 사이코예요. 이 회사를 폭파시키려고 들어왔나 봐요.”
회의에 참석했다 돌아온 미란과 복도에서 마주치자마자, 은주는 씩씩대며 불만을 토로했다. 기획팀에게 붙들려간 정오는 오후 늦게 외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야 기훈이 식음을 전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 걱정스러워진 정오는 죽집에서 죽을 한 그릇 포장해가지고 회사로 복귀했다. 기훈은 휴게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도무지 회복의 조짐이 보이지 않아 미란이 휴게실로 보내버린 것이다.
“송기훈 씨…….”
“대리님.”
조심스럽게 다가가니 기훈도 정오를 불렀다.
“정지헌 이사님이랑 사귀는 사이였어요?”
기훈이 당사자에게 직접 물었다. 파르르 흔들리는 정오의 눈동자로 최종 확인을 마친 기훈이 쓰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그래?”
“이사님이요.”
“…….”
“저는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기훈이 기운 없는 인사를 하고서 먼저 떠난 후, 정오도 ‘맙소사’를 중얼거리며 휴게실에서 나왔다. 팀으로 돌아오니 기훈이 자리에 앉아 힘없이 마우스를 딸깍거리는 게 보였다. 은주가 사내 메신저로 정오에게 말을 걸었다.
- 기훈 씨가 아까 정 이사님 집무실에 혼자 다녀왔거든요. 그 뒤로 계속 저 상태예요.
은주는 정지헌이 정오에게 시원하게 차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저주를 담아 고자질했다. 은주의 저주가 반쯤 먹혔다. 정오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지헌의 집무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몇 시간 전, 복도를 지나던 지헌은 기훈이 희망을 잃은 표정으로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지헌은 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 본부의 리더였지만 모든 구성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일에 목매지 않고 되는대로 살아온 그에게 언제나 첫 번째는 이정오였다. 일보다 중요한 게 이정오와 자신의 관계였다. 그런 그의 입장과 조금은 다른 정오가 오후 늦게 그를 찾아왔다. 씩씩대며.
“송기훈 씨한테 다 말했냐?”
풉. 그 귀엽고 우스꽝스러운 말투에 지헌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오는 심각했다.
“웃자고 하는 얘기 아니야!”
정오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지헌에게 따졌다.
“언젠가 알게 되기야 하겠지만 오빠가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되지. 말해도 내가 말해야지. 아주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언제.”
그녀가 그토록 진지하게 나오니 그 또한 어쩔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 지헌 또한 성의껏 따져주었다.
“말하려면 진작 말했어야지.”
“말할 새가 어디 있어. 우리가 얼마나 바빴나 생각해봐.”
“예나 입원했을 때, 내가 전화했잖아. 그때 얘기했어야지.”
지헌은 지헌 나름대로 서운한 게 있었다. 자신에게는 그토록 철벽을 치고 무섭게 굴었던 여자가 기훈에게는 그토록 다정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하나 따지자니 쪼잔하게 보일까 언급 없이 넘어갔지만 그는 언젠가 분명히 그녀에게 얘기를 했었다. 너에 대해 송기훈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건 기분이 나쁘다고. 그렇게 티를 냈는데 그녀는 도무지 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정오가 허탈하게 한숨을 푹 쉬고는 따졌다.
“그때? 송기훈 씨랑 차 타고 가면서 그 얘길 했어야 한다고?”
“그래.”
“그걸 털어놓으라고? 그때?”
“당연하지. 좋은 기회잖아.”
“기회? 예나가 쓰러졌었어. 그 눈앞이 깜깜한 와중에 내가 송기훈 씨한테 우리 둘 사이를 주절주절 얘기했어야 한다고?”
정오의 반박에 지헌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녀의 상황, 그녀의 사정이 이해되긴 하지만 쉽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나의 마음은 얻었지만 이정오의 마음은 여태 얻지 못한 기분이었다. 여전히 감정적 을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자신이 답답하기도 했다. 우리는 어떻게 진도를 나가야 하나. 그 와중에 드르르,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지헌은 멀뚱하니 휴대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휴대폰 화면 불빛이 반짝했다. 그사이에 ‘예나공주’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 아빠가 학원으로 데리러 왔으면 좋겠어.
학원에 데리러 왔으면 좋겠다는 아이의 소망이 담긴 문자 메시지. 고 짤막한 문장이 주름의 다리미가 된 것처럼 지헌의 미간을 반질반질하게 폈다. 지헌은 곧장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아이가 자신에게 처음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지헌은 아이가 보낸 열여섯 글자를 하나하나 가슴에 새길 듯이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한 글자 한 글자에 감동이 밀려왔다. 일곱 살짜리가 맞춤법 지킨 거 봐라. 카피라이터 딸 아니랄까 봐. 이걸 보내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그 조막만 한 손으로 휴대폰 화면을 꼼지락꼼지락 만져서 문자 메시지를 보냈을 걸 상상하니 심각한 와중에도 설렘이 찾아왔다. 아이가 제 심장을 꼼지락꼼지락 만지는 것 같았다.
“아니 뭐야. 내 질문을 회피하는 거야? 지금 웃음이 나와?”
아직 이 사정을 알지 못하는 여인은 도끼눈을 뜨고서 그에게 따졌다. 그럼에도 지헌의 입술 사이로 뿌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미안.”
“이게 미안하다고 될 일이야? 이제 어쩔 건데.”
노발대발하는 정오를 앞에 두고, 지헌은 유유히 슈트 재킷을 걸쳤다.
“이따 얘기하자. 잠깐 나갔다 와야 해.”
“싫어. 안 돼. 지금 얘기 마무리하고 가.”
정오는 표독스럽게 지헌의 앞을 막아섰다.
“가야 해.”
결국 지헌은 어쩔 수 없이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게 되었다. 실은 조금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휴대폰 화면의 문자메시지를 확인하는 정오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했다.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있다가 눈썹을 추켜 올리며 메시지 내용을 읽은 그녀는 뚱하게, 다소 불만스럽게 지헌을 바라보았다.
“뭐야? 오빠를 불렀어?”
내가 아니라 오빠를 불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