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아빠가 올 건데요2022.03.23.
정오의 물음에 지헌이 우쭐하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자랑하고 싶잖아. 나처럼. 아빠를 자랑하고 싶은 예나의 마음을 100% 이해할 수 있는 지헌이 승리의 미소를 머금고서 정오에게 허락을 구했다.
“이런 상태니까, 나 가면 안 될까.”
한 여인은 붙잡고, 다른 여인은 데리러 오라고 하고. 두 여인에게 아주 인기가 좋은 행복한 남자라, 입술 끝이 자꾸 천장으로 치솟았다. 잠시 심각했었나 싶을 만큼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그런 모습에 정오는 더욱 얄미웠지만 그녀 역시 딸의 일이라면 두손 두발 번쩍 들어버리는 팔불출이었다. 그 어떤 대립각에도, ‘예나공주’라는 주제 앞에선 일심동체가 되고야 만다.
“조심해. 말하는 거 조심하고, 이름 말하는 거 특히 조심해.”
“…….”
“오빠는 정지헌이지만 예나는 이예나잖아.”
부디, 예나가 또 다른 상처를 받지 않길.
“알겠어.”
섬세한 당부에 지헌이 끄덕였다.
“다녀와서 얘기해.”
“…….”
“다녀와서 놀아줄게.”
“아니 내가 놀자고 이래?”
촉. 빠른 몸. 발끈하여 대꾸하는 그녀를, 그는 도둑 같은 입맞춤으로 달래고서 돌아섰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는 발걸음은 급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윽고 달칵. 열렸던 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정오는 허공에 불만을 쏟아냈다.
“아니 이런 자식이 누구보고 여우짓이라는 거야.”
자기가 더 지독한 불여우인 주제에. 남이 여우짓 하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다는 이 남자의 고약한 심보에 한숨만 나왔다. * 바둑학원 건물 앞. 학원에 먼저 도착한 도빈은 선생님과 함께 예나를 기다렸다. 아파서 학원 등원을 하루 건너뛴 예나가 다시 나오게 된 날이었다. 도빈 역시 예나를 따라 이틀 만에 학원에 나왔다.
“도빈이 왜 어제 안 왔어?”
“예나 안 온다고 해서요.”
선생님의 물음에 도빈이 똘망똘망하게 말했다. 아이들이 바둑을 배울 때 도빈은 사랑을 배우고 있다. 예나가 없는 바둑학원은 도빈에겐 팥 없는 팥빙수 같은 것이었다. 이윽고, 예나의 어린이집 버스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예나가 반갑게 웃으며 외쳤다.
“박도빈!”
“예나야!”
도빈은 버스에서 내린 예나를 붙들고 방방 뛰었다. 예나도 도빈을 따라 발을 굴렀다.
“이제 안 아파? 다 나았어?”
“응. 다 나았어.”
“예나 정말 괜찮아? 오늘 학원 가도 되겠어? 학원 못 가겠으면 할머니한테 전화하랬어. 할머니가 데리러 오신대.”
“괜찮아요.”
도빈과 선생님의 물음에 가뿐히 답한 예나는 이전의 명랑하고 씩씩한 모습 그대로 학원으로 향했다. 수업 중간에 선생님이 떠난 틈을 타 도빈이 예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너 죽은 줄 알았어.”
사랑하는 예나가 죽은 줄만 알고 울부짖던 그제의 기억을 떠올리며, 도빈의 눈망울이 다시 젖었다.
“병원에서 내가 ‘예나야’ 하고 백번 넘게 불렀는데 들었어?”
“아니 못 들었어.”
“와! 신기하다. 내가 엄청 크게 불렀는데.”
다음엔 더 크게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는 도빈이었다.
“너 근데 왜 쓰러졌어?”
이어진 질문에 예나는 교실의 대각선 끄트머리를 가리키며 도빈에게 귓속말했다.
“사실은 쟤랑 쟤네 오빠가 나 혼냈어.”
예나가 가리킨 곳엔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는 수인이 있었다.
“왜 혼냈는데?”
“내가 나 아빠 있다고 하니까,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막 아빠한테 전화해보라고 했어.”
예나와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심각하게 예민해지는 도빈이 아래로 처지려는 입술 끝을 붙들려 입술에 꽉 힘을 주었다. 울음을 참아내는 듯한 표정에 예나가 잔소리했다.
“야아. 네가 울면 어떡해!”
“우는 거 아니야.”
도빈이 속눈썹에 찔끔 맺힌 눈물을 쓱쓱 닦았다. 사실 예나는 도빈의 그런 반응에 고마웠다. 빨리 도빈에게 진짜 중요한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괜찮아. 나도 아빠 있어. 아빠를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에 입술이 달싹거렸다. 예나는 그토록 행복한데, 그제의 사건을 지금 막 전해 들은 도빈은 뒤늦게 울컥 성이 났다. 도빈은 화를 참지 못하고 수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야.”
수인이 눈을 깜빡거리며 바라보았다.
“너는 예나한테 미안하다고 안 해?”
“왜?”
“네가 예나한테 잘못했잖아.”
도빈의 지적에 수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빨리 미안하다고 해.”
“싫어!”
수인은 바락 소리치며 교실 밖으로 나갔다. 출입문 앞에 원장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한 수인은 으아아앙, 울음을 터트리며 원장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원장이 깜짝 놀라 물었다.
“무슨 일이니? 수인이 왜 그래?”
“선생님, 얘가 예나한테 잘못했는데 미안하다고 안 해요.”
도빈과 예나도 교실 밖으로 나왔다. 원장에게 또박또박 말한 도빈이 다시 한번 수인을 타박했다.
“너 때문에 예나가 죽을 뻔했잖아.”
그 순간 학원 출입문이 열렸다. 수인의 엄마였다.
“엄마아!”
엄마의 얼굴을 확인한 수인이 원장의 옷자락을 놓고 달려갔다. 수인의 엄마도 깜짝 놀랐다.
“아니 선생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
원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수인이 어머니, 어제 제가 말씀드렸었죠? 수인이랑 재인이랑 예나 사이에서 사고가 좀 있었어요.”
“그랬죠. 우리 애들이 그 애한테 아빠 없다고 그랬다면서요.”
“엄마, 쟤가 나보고 미안하다고 하래. 이예나한테. 으어어엉.”
수인이 도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아이의 울음에 마음이 미어져 수인의 엄마가 작은 목소리로 불평했다.
“아니 근데…… 아빠가 없는 애한테 아빠가 없다고 하지, 있다고 할 수도 없는 거고…….”
“예나가 그 일로 쓰러졌으니까, 서로 풀고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 것 같은데요, 수인이 어머니…….”
“아니, 선생님. 어떻게 그 애 편만 드세요?”
원장의 대답에 수인의 엄마는 울컥했다. 내 아이만 잘못한 게 아닐 텐데, 학원의 대처가 못마땅했다.
“애가 쓰러진 게 우리 애들 때문일까요? 우리 애들 때문에 쓰러진 건지, 아니면 자기 자격지심 때문에 쓰러진 건지 모르는 거잖아요. 편모가정 애들은 원래 그렇다고요. 원래,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열등감 때문에 과하게 상처받고 일을 크게 키우고 그런 편이에요.”
수인의 엄마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원장에게 계속 분풀이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수인이한테 사과를 하라고 몰아붙이신 거예요? 일곱 살짜리 애가 이렇게 울도록?”
말을 하고 나니 더욱 화가 났다. 도빈의 옆에 서 있는 아이가 예나라는 것을 곧장 알아본 수인의 엄마는 예나에게 한발 다가가 물었다.
“얘, 네가 예나니?”
“네.”
“예나야, 네 엄마랑 얘기해봐야겠다. 엄마는 언제 오시니?”
“아빠가 올 건데요.”
“뭐, 뭐?”
수인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진 사이에 학원 출입문이 열리고 지헌이 들어왔다. 학원 유리문으로 예나의 모습을 발견한 지헌이 다급히 문을 연 것이었다.
“아빠아!”
무표정이었던 예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예나가 날쌔게 달려가 지헌에게 안겼다.
“어?”
예나가 지헌에게 아빠라고 부르며 달려가는 것을 본 도빈이 눈을 깜빡거리며 지헌과 예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저 바라볼 뿐 지헌이 예나의 아빠가 아니지 않느냐는 눈치 없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알 수 없는 우주의 힘이 도빈의 입을 막았다. 도빈의 인생 최초로 눈치 있는 반응을 보인 순간이었다. 예나가 지헌을 꼭 끌어안으며 원장에게 말했다.
“우리 아빠예요.”
“우리 아빠랑 친구예요.”
도빈도 오지랖 있게 끼어들어 지헌을 소개했다. 지헌은 예나를 내려놓고서 주위를 훑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이 의아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학원에 오기 전에 학원의 원장과 부원장, 그리고 재인 수인 남매와 그 부모에 대해 대략 살펴보았기에 상황 파악은 빨랐다.
“안녕하세요. 예나 아빠입니다.”
지헌이 원장에게 인사하니 수인의 엄마가 조용히 웅얼거렸다.
“아니, 분명히 그랬는데……. 애가 아빠가 없다고…….”
예나는 수인을 가리켰다.
“아빠, 얘가 홍수인이야. 나한테 아빠 없다고 거짓말 아니냐고 했던 애.”
“내가 언제!”
수인이 발끈했다.
“그랬잖아. 너.”
“…….”
“아빠, 얘가 나한테 바둑 대국 졌거든. 그래서 나한테 뭐라고 한 거야. 내가 바둑 더 잘해서.”
“아니야. 네가 막 억지로 이겼잖아!”
“너 거짓말 하면 안 돼. 나는 너랑 했던 대국 다 기억하는데. 너는 기억해?”
“예나는 기억력 좋은데.”
예나가 수인에게 추궁하자 도빈이 얼씨구나 끼어들었다. 수인은 분한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예나가 이어 물었다.
“나한테 왜 그랬어? 나한테 바둑 져서 심술 나서 그랬어?”
“아니야아! 심술 나서 그런 거 아니야아!”
수인이 소리쳤다. 교실에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수인의 오빠 재인까지 무리에 끼어 있었다. 수인은 엄마의 팔을 붙잡고서 떼를 썼다.
“엄마가 그랬잖아! 얘 아빠 없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얘가 거짓말해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그런 거란 말이야아. 엉엉엉.”
다시 울음이 터졌다. 수인 엄마는 안절부절못하며 아이를 감싸 토닥였고 수인은 계속 서럽게 울었다.
“왜 수인이보고만 사과하래애애. 수인이도 우는데에에에.”
“……애들인데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죠. 그러니까 애지.”
수인 엄마가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항변했다. 지헌이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수인 엄마에게 물었다.
“수인 어머니, 자녀분들한테 우리 예나, 아빠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니, 커뮤에 그런 말이 돌아서…….”
“커뮤니티에서 도는 얘기를 자녀분한테 그대로 말씀하셨고요.”
“…….”
“아이들을 예의도 모르는 거짓말쟁이들로 만드셨네요. 어머니께서.”
자극적인 지적에 수인의 엄마도 화가 치솟았다. 수인 엄마의 표적은 원장이 되었다. 이 학원에서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으로 몰아가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왜 자꾸 우리 애들만 몰아세우세요. 선생님, 왜 자꾸 애한테 사과를 요구하셔서 일을 키우세요!”
도빈이 다시 끼어들었다.
“선생님이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사과하라고 그랬어요.”
“도빈이가 사과하라고 그랬다네요.”
지헌도 도빈의 말을 거들었다. 수인 엄마가 큰 소리로 도빈에게 윽박질렀다.
“얘, 네가 뭔데 우리 애한테 사과를 하라 마라야!”
“애인데 그럴 수도 있죠. 수인이 어머니.”
지헌이 도빈을 변호했다. 수인 엄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이들은 사과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애죠. 애들은 그렇다고 치고.”
“…….”
“때마침 어른이자 보호자이신 어머니께서 오셨으니 제 아이에게 대신 사과해주실 수 있겠네요.”
지헌이 저벅저벅 수인 엄마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제게 다가오는 지헌이 저승사자처럼 여겨진 듯 수인 엄마는 두려움이 서린 눈동자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지헌의 올가미를 피하지 못했다. 때마침 클래스벨이 울려 어수선한 상태. 가까이 다가간 지헌이 수인 엄마에게만 들리도록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똑바로 하시죠, 수인이 어머니. 재인이랑 재인이 친구들까지 지켜보는 것 같은데. 여기서 더 말썽 없이 해결돼야 애가 덜 창피하지 않겠습니까?”
“…….”
“어른이 돼가지고, 애 앞에서 말조심하셔야죠.”
너무 소름이 끼쳐서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