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제발 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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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제발 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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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제발 돌려주세요
2022.04.02.
수요일, 은엽의 당부 이후 은비는 설레는 마음으로 은엽의 연락을 기다렸다.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동안 폐인이 된 몸을 오랜만에 가꾸고 돌보며, 지헌과 장영미 여사를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궁리했다.
그러나 은엽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기다리지 못한 은비가 먼저 은엽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은엽은 받지 않았다. 결국 은비는 다음 날 은엽의 회사를 찾아갔다.
“오빠.”
“여길 또 왜 와.”
하루 사이에 은엽의 몰골은 형편없어졌다. 피골이 상접한 데다 날이 선 목소리에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왜 연락 안 했어? 어떻게 된 거야? 실패했어?”
은비가 물었지만 은엽은 눈만 찌푸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오빠의 실패였다.
은비는 기가 막혔다. 그토록 나를 바보 취급하더니. 혼자서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큰소리를 치더니. 기껏 묵묵히 기다렸는데 결과는 이런 거였다.
오빠에게 실망하며 로펌을 떠난 은비는 그 길로 곧장 친구를 찾아갔다. 얼마 전 국순의 식당에 함께 방문했던 친구. 인기 있는 BJ는 아니었지만 여러 플랫폼에서 인터넷방송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였다.
국순의 식당을 방문했던 날 그 친구와 벌인 장난이 있었다. 가방에서 쓰레기 조각을 찾아낸 은비는 국순이 내온 찌개에 몰래 쓰레기를 넣었다.
그러고는 국순이 넣은 것을 발견한 듯이 경악하는 연극 한판을 벌였다. 연극은 BJ 친구의 카메라에 모두 녹화돼 있었다. 그간 은엽의 압력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어 써먹지 못했던 동영상 자료를 써먹을 때가 된 것이다.
친구를 찾아간 은비는 친구에게 사정하여 맛집 소개 동영상 마지막에 국순백반 방문기를 넣게 했다. 제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친구가 잘 편집한 동영상을 보니 신이 났다. 한편으로는 무척 아쉬웠다. 내가 좀 더 빨리 움직였다면 정지헌은 일찌감치 이정오에게 정이 떨어졌을 텐데. 장영미 여사에게도 일찌감치 알려주었어야 했는데.
이예나가 정지헌의 친자냐 아니냐보다 더 중요한 건 정지헌 집안의 위상과 품격이다. 자신의 집안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이정오라는 존재를 장영미는 절대 곱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 괜찮을까? 설마 거짓말로 고소당하진 않겠지? CCTV도 잘 피했으니까.]
동영상을 편집하며, 불안을 느낀 BJ 친구가 물었다. 은비는 친구를 다독였다.
“그럼그럼. 다른 손님도 없었고, 카메라도 내가 잘 막았잖아. 이제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하지?]
“괜찮다니까. 나만 믿어. 걔만 잘 나가떨어지면 내가 사례할게.”
계속 징징거리는 친구를 달래어 동영상을 올리게 만든 은비는 설레는 마음으로 사태를 관망했다.
그런데, 미처 생각지 못한 불상사가 터졌다. 자정 무렵에 정오가 동영상을 올린 것이다. 정오가 올린 동영상을 확인한 BJ 친구가 은비에게 연락하여 따졌다.
[야, 이게 뭐야! CCTV가 하나 더 있었어? 카메라 하나라며. 네가 제대로 봤다며!]
“아, 아닌데……. 내가 다 확인했는데?”
은비 또한 믿을 수 없었다. 분명 가게 사방을 제대로 둘러보았다. 카메라는 한 대였고 범행을 저지를 때는 제 몸으로 잘 가렸다고 생각했다. 바로 맞은편에 한 대가 더 있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너만 믿으라며! 이거 어떻게 수습할 거야!]
BJ 친구가 은비에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일단 네가 올린 동영상은 삭제해. 그리고 댓글창도 다 닫아버려.”
은비 역시 눈앞이 캄캄했지만 친구에게 침착하게 조언했다. 무언가 잘못되더라도 자신의 얼굴은 나오지 않았으니 피해 볼 것이 없었다. 당장 동영상만 수습하고 친구를 달래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은 계속 커져만 갔다. 친구가 동영상을 삭제한 뒤에도 사람들은 계속 2차 편집본을 만들어댔다.
동영상은 다른 편집자들의 손을 거쳐 가며 친구를 더욱 사악한 악마로 만들었다. 급기야 며칠 후에는 정오의 채널 구독자 중 하나가 댓글로 기가 막힌 소식을 전했다.
- 오늘 식당 찾아갔는데, 식당을 내놓는다고 하네요. 사장님께 이전하시는 건지 여쭤보았는데 더 이상 식당 운영은 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이번 일로 사장님께서 큰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습니다. 자주는 가지 못했지만 귀한 집밥 먹는 기분으로 한 달에 한 번은 꼭 들르던 식당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문을 닫게 돼서 가슴 아프네요. 제가 이런데 사장님 마음은 오죽할까요.
*
시간이 빠르게 흘러 ‘국순백반’의 마지막 영업일.
며칠 사이에 식당을 찾는 손님이 크게 늘었다. 폐업 소식에 안타까워하며 찾아온 이들도 있었고 정오의 채널을 통해 국순백반을 처음 찾아온 이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국순의 음식솜씨에 감탄했고 식당이 사라진다는 것에 아쉬워했다. 국순에게 제발 문 닫지 말아달라며 사정하는 손님도 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주변의 직장인들이 점심때 주로 이용하는 식당이었는데, 오늘은 손님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정오도 연차를 내고 엄마의 일을 도왔고 지헌도 퇴근을 하고 식당으로 달려왔다.
국순은 주방에서 음식을 책임지면서 손님이 떠날 때는 간간이 홀까지 나와 인사했다. 떠나는 손님들에게는 백설기 한 조각씩을 쥐여주었다. 처음 식당 문을 열던 날의 그 마음으로. 새로운 시작을 자축하는 의미로.
정이 많은 손님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식당 한편에 선물이 그득히 쌓였다. 다들 국순의 앞날을 응원하며 축복을 빌어주었다. 성대하진 않지만 따뜻한 마무리였다.
어느덧 주문했던 백설기도 떨어지고, 풍족하게 준비했던 주방의 음식들까지 동이 났다. 마지막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간판 조명을 끄고서 돌아선 국순에게 지헌이 커다란 꽃다발을 안겼다.
어느새 정리된 테이블 한편에는 촛불이 반짝거리는 케이크가 있었다.
“할머니! 빨리 촛불 불어!”
예나가 달려와 국순의 팔을 잡아당겼다. 국순이 케이크 앞에 서자 가족들이 노래를 불렀다.
랄라랄라 랄라라. 랄라랄라 랄라라. 사랑하는 국순 씨.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 노래에 ‘랄랄라’라는 노랫말을 입힌 엉성한 노래. 무엇을 축하하는지도 알 수 없는 축하였지만 국순은 마냥 기분이 좋았다.
나는 정말 행복하구나. 남 부러울 것 없는 가족을 가졌구나.
가슴을 꽉 채우는 뿌듯함으로 촛불을 끄자 지헌과 정오와 예나가 저마다 축하의 말을 건넸다.
“어머니,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엄마! 이제 진짜 시작이야. 인생은 쉰셋부터!”
“할머니! 식당 졸업 축하해요!”
짝짝짝짝, 손뼉을 친 예나가 선물이 쌓인 테이블로 건너갔다. 생일파티를 좋아하는 예나에게 선물이 한가득 쌓인 오늘 또한 신나는 날이었다.
“할머니! 나 선물 뜯어보면 안 돼?”
수북이 쌓인 선물들을 바라보는 국순의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아유. 이런 거 받아도 되나 모르겠다. 그냥 조용히 문 닫으면 아무도 몰랐을 텐데 전국민이 다 알게 하고 너무 떠들썩하게 그만둬서 민망하네.”
“할머니, 나 선물 뜯어보면 안 되냐고!”
국순이 길게 탄식할 새도 없이 예나가 급하게 재촉했다.
“그래. 할머니랑 같이 풀어보자.”
손녀딸의 성화에 못 이겨 국순도 옆 테이블로 건너갔다. 화장품, 작업복, 신발, 돋보기, 책…… 다양한 종류의 선물이 나왔다. 예나가 뜯기 어려운 선물은 정오에게 넘어갔다.
“엄마. 여기 편지도 있어.”
납작한 상자에는 손거울과 함께 편지봉투가 들어 있었다. 봉투 안에서 편지지를 꺼낸 정오가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제가 읽어볼게요. 존경하는 이국순 사장님.”
점잖은 문체로 시작된 편지글이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몇 년 전에 시장 입구 맞은편 골목에서 사무실을 운영했던 사람입니다. 동업하던 친구가 빚을 지고 잠적해버려 가게 문을 닫아야 했던 때, 눈물을 훔치며 가게를 정리하던 저를 식당으로 데려가 밥을 해먹이셨던 걸 기억하시는지요.”
국순은 잘 기억나지 않는지 이맛살에 힘을 주며 정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식당을 떠나는 길엔 맛있는 반찬까지 푸짐하게 싸주시며 더 필요하면 또 오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때의, 그 밥은, 제 인생 최고의, 식사였습…… 으허어엉.”
조금씩 더듬거리는가 싶던 정오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딸의 우스꽝스러운 울음소리에 국순의 눈동자에는 눈물 대신 웃음이 고였다.
“으이구. 쟤는 저게 문제야. 나한테 뭔 일이라도 생기면 지가 더 아픈 척을 한다니까?”
“내가 언제에에.”
딸의 흉을 보는 엄마가 밉다며, 정오가 입술을 불쑥 내밀었다.
“엄마. 뚝 해. 뚝.”
예나는 정오가 자신을 달랠 때 그랬듯이 의젓하게 정오의 등을 쓸어주었다. 지헌은 정오가 들고 있던 편지를 가져가 마저 읽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잃은 내게도 온정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사장님 덕분에 함부로 절망하지 않고 다시 하루하루 열심히 살게 되었습니다.”
지헌의 낮고 점잖은 목소리에 국순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때의 정말 맛있었던 밥, 따뜻한 말씀, 모두 감사합니다. 무엇을 하시든 응원하겠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따뜻한 편지였다. 지헌이 편지를 다 읽고서 국순에게 건네니 국순이 부끄러운 듯 한쪽 뺨을 매만졌다.
“미안한데 기억이 날 듯 안 나네.”
선행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만큼 많이 베풀고 살았다는 뜻. 그 마음을 알고 있는 지헌과 정오가 닮은 미소를 지었다.
국순은 진심으로 후련한 듯이 시원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예나 말대로, 정말로 졸업하는 기분이야.”
열심히 살았다. 아이를 키우고, 키운 아이가 또 아이를 낳아 그 아이를 키우며 사는 동안 식당은 아이의 집이 되어주었고 옷이 되어주었고 재미있는 장난감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런 고마운 식당과 헤어져 이제 또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려 한다.
“학교는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지만, 식당은 제대로 졸업하는 기분이야. 정말 뿌듯하네.”
이 마지막을 함께해주는 가족들이 있어 국순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행복했다.
“인터넷에도 글 하나 올려. 엄마는 그 BJ랑 갈등이 있어서 식당 정리하는 게 아니고, 새로운 일을 해보려고 준비하는 거라고.”
“나는 솔직히 좀 더 욕먹게 두고 싶은데.”
국순의 요청에 정오가 불평했다. 하지만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어 바로 휴대폰을 들었다.
“……어?”
하지만 계정에 로그인하자마자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정오의 계정으로 쪽지 수십 개가 도착해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비난이 그득했다.
“무슨 일이야?”
지헌이 다가가 물었다.
“……그 BJ가 새 글을 올렸나 본데?”
정오는 곧장 BJ의 채널로 들어가 최근의 소식을 살폈다. 채널 게시판에 장문의 글이 게시되어 있었다.
- 안녕하세요. 최근에 있었던 불미스런 일에 대한 정황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논란이 되는 그 식당은 사실 제 지인의 애인의 내연녀의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입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제 지인은 4년을 헌신한 애인한테서 버림받고, 내연녀의 이간질 때문에 잘 다니던 회사에서도 쫓겨날 위기에 처했습니다. 저도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지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 보니 참을 수가 없어서 욱하는 마음에 동영상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내가 내연녀가 되다니.
BJ의 주장에 기가 막혀 정오의 손이 떨려왔다.
- 저한테 뭐라고 하시는 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저만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연녀분, 부디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시고 제 지인의 애인 돌려주세요. 당신과 뭘 했든 당신이 제 지인 욕을 얼마나 했든, 제 지인은 상관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발 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