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 상사병 (98/183)


98. 상사병
2022.04.06.


재광에게는 한가지 버릇이 생겼다. 일과 중에 틈틈이 손녀의 사진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는 버릇.

아들 두 녀석은 이렇게까지 귀여운 걸 몰랐는데, 손주라 그런 걸까, 여자애라 그런 걸까.

아니면, 그냥, 원래 예뻐서?

아니면 편하게 연락할 수 없어서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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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얼른얼른 진행하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

유전자 연구소에서 그렇게 헤어지고 난 후 일주일이 지나니 지헌에게 서운한 마음이 쌓였다.

재광은 과거를 후회하고 있었다. 친자확인검사를 하러 갔던 그날. 그날 제대로 못을 박았어야 했다. 일주일 안에 예나와 예나 엄마를 데리고 찾아오라고 똑똑히 말해두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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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번호라도 교환할 걸 그랬지.”

사실 어둠의 경로를 통해 예나의 휴대폰 번호를 확인해두긴 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번호를 교환한 건 아니기에 직접 연락하진 못했다.

함부로 전화했다가 또 아들녀석에게 한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다. 번호를 알면서도 연락할 수 없는 건 또 그것대로 고역이었다.

초반에는 이제나저제나 하며 연락을 기다렸는데 시간이 이렇게까지 흐르니 울컥울컥 화가 올라왔다.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정지헌 이 녀석. 아빠가 되고서도,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볼 생각도 하지 않는 불효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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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회사에서는 이렇게 인망이 드높은데 말이야. 자식놈들은 아주, 날 알기를 우습게 알아.”

지헌에게 전화를 걸어 마구 퍼붓지는 못하고, 수행비서에게 조용히 푸념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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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뭘 하는지. 얼마나 바쁘길래 이렇게 연락 한 통이 없는지 한번 알아봐. ”

참다못한 재광이 수행비서에게 지시했다.

잠시 후 수행비서가 알아본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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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정지헌 이사님은 지금 출근해서 업무 중입니다. 그건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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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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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헌 이사님과 이정오 대리 사이에 약간의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

정오를 내연녀라 칭한 BJ의 폭로를 시작으로 밤사이 인터넷 세상에서는 또 여러 말들이 오갔다.

물론 대부분의 이용자들은 BJ의 고백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은 본인들의 구미에 맞게 소설을 썼고 본인들의 믿음을 토대로 정오를 공격했다. 분란을 만들기 위한 분란이었다.

국순은 식당이 정리됐으니 참으라고 말했다. 참고 가만히 있으면 분란을 야기하려던 사람들도 제풀에 지쳐 떠나간다고. 그래서 정오도 더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음 날 아침, 맥스기획 제작 2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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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세요, 이 대리님.”

은주가 정오에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응원을 보내면서도 언제나 그렇듯 새침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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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놈이 자빠질 때는 그냥 자빠지지 않는 법이죠. 누구 머리채라도 움켜쥐고 자빠지지.”

간밤에 일어난 일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정오가 묻기 전에, 은주의 입에서는 술술 의견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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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채은비 과장은 여기저기 시녀가 많네요. 자기 대신 나서서 싸워주는 사람이 많아서 좋겠어요. 그 사람들도 불쌍하지. 같이 자빠지는 줄도 모르고.”

참아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고 말해주는 사람도 좋지만 대신 욕해주는 사람도 큰 위로가 된다. 은주가 덤덤한 표정으로 건네는 말들에 정오는 가려운 곳을 긁은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그래. 같이 자빠지지 말고 잘 버텨봐야겠다,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 앉았을 때 자리의 전화벨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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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작 2팀 이정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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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재광이에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오는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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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지헌이 집무실로 와줄 수 있어요? 얘기 좀 했으면 하는데.]

정오가 놀라 굳어 있는 동안 저편에서는 차분한 음성이 계속 들려왔다. 지엄하신 회장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정오를 구슬리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지헌에게는 회장님이 회사에 찾아오실 거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갑작스런 방문인 듯했다.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은 정오는 곧장 일어나 지헌의 집무실로 향했다. 긴장감 때문에 뻣뻣해진 걸음으로 집무실 문 앞에 이르니 비서가 문을 열어주었다.

정오가 안으로 들어가니 재광도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헌이 없단 사실에 더욱 막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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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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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앉아요.”

경직된 인사에 재광이 끄덕이고는 소파를 가리켰다. 정오가 자리에 앉은 후에 재광도 맞은편에 다시 앉았다.

정적 속에서 재광이 먼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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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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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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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병이 났어요.”

영문 모를 재광의 고백에 정오는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에 다행히 재광이 또 먼저 목소리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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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손녀한테 연락이 오려나. 오늘은 올까. 내일은 올까. 내일이 되면 또 오늘은 올까……. 이렇게 지낸 게 벌써 일주일인데.”

하소연이었다. 손녀를 향한 상사병의 고백. 기약 없는 기다림에 대한 서러움.

멀게만 느껴졌던 대기업 회장님의 속마음을 듣게 되니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경직되었던 근육이 조금 풀렸다. 그렇다고 웃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정오는 진지하게 사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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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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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사과받자고 한 말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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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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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가 가짜 연애, 그런 걸 했다면서.”

손을 휘 저은 재광이 딴 화제를 꺼냈다. 아무래도 지헌이 과거의 과오를 고백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정오는 편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지헌이 없는 자리에서 시시콜콜 얘기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재광이 회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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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히 얘기해요. 나도 대강은 확인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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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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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때문에 지금 채은비한테 발목을 잡힌 거고.”

어쩔 수 없이 한마디 대답했는데 추궁이 이어지는 것 같아 정오는 재빨리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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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회장님, 그런데 지금 정지헌 이사님은 어디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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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님은 무슨.”

흥, 아니꼽다는 듯 코웃음을 친 재광이 집무실 구석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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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있잖아요, 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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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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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의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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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책장이 버티고 있어 눈에 띄지 않는 자리였다. 그 구석의 벽과 마주하고서 작은 의자에 앉아 있는 지헌이 보였다. 벽과 깔맞춤한 듯 회색의 상의가 보호색처럼 그를 감추어버린 것이다.

카멜레온이냐고.

정오는 황당하여 헛웃음이 툭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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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도 좀 하고, 생각도 좀 하라고 했어요.”

가짜 연애 때문에 나이 서른이 넘어 아버지께 벌을 받는 남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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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얘기나 합시다.”

정오와 재광의 눈빛과 손짓에도 지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잘못한 일은 맞지만 왠지 조금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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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저 지경이라 우리 예나 엄마가 많이 서운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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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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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그제야 기운이 완전히 돌아왔다. 맘 편히 회의실에서 회의하듯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헌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정오는 재광에게 많이 고마웠다. 지헌이 먼저 자신에게 다가온 후에도, 그리고 예나의 친자검사결과가 나온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던 조금의 앙금이 사르르 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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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들을 잘못 키웠지.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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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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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는 예나 엄마가 용서해줄 때까지 저러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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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도 이제 마음이 다 풀렸습니다. 하지만 지헌 씨가 그 일에 대해서 제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해준다면 좋겠어요.”

재광이 고개를 돌려 지헌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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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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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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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와서 사과해.”

지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오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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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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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을 담아서 다시.”

지헌이 사과하자마자 재광이 따끔하게 지적했다. 지헌은 투정 부리는 일도 없이 바로 다시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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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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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미안한지 성의있게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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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비와 가짜 연애를 해서 오랫동안 오해를 하게 만들었던 것 미안합니다. 이정오 씨가 내연녀라는 모함을 받게 한 것도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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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떻게 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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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빨리 수습하겠습니다.”

지헌이 정오를 마주한 눈으로 재광의 물음에 답했다. 모든 과정이 우스운데 이 사람들은 한없이 진지해서 더욱 우스웠다. 정오는 웃음을 참으며 지헌의 사과에 응답하는 것이 힘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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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는 다 풀렸습니다.”

정오가 대답했다.

만족. 속이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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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서운한 거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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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없습니다. 그럼 회장님 저는 이만 나가봐도 될까요? 아침에 회의가 잡혀 있어서요.”

다음 스케줄이 있어 이 자리에서 재빨리 빠져나갈 수 있게 된 것 또한 참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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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그래요. 우리는 또 만납시다.”

정오는 만족스럽게 재광의 배웅을 받으며 집무실을 나왔다.

정오가 떠난 후, 다시 적막해진 집무실에 재광이 한숨을 길게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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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는구나.”

호칭 때문에 서운한 마음 또한 재광은 아들 녀석의 탓을 하고 싶어졌다. 지헌을 향해 눈을 세모로 뜬 재광이 불만을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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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는 많이 서운하다. 그날 내가 그렇게 티를 냈는데, 애 한번 보여주는 게 뭐 그렇게 힘든 일이라고 일주일 동안 코빼기도 안 비추냐. 내가 꼭 이렇게 이유 만들어가며 찾아와야 해?”

그런데 이 머리 검은 놈은 반성할 생각도 않고 똑같이 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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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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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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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도 그동안 어머니를 설득하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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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엄마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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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 회사에 찾아오셨어요. 정오는 받아주지 않을 거고 아이만 키워주겠다고.”

재광의 이마엔 딱딱한 주름이 졌다. 대화 없는 집안이라,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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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진 딱히 크게 마음 쓰지 않으셨죠. 그날 어머니와 정오 사이에 갈등이 있단 건 파악하셨지만 어머니께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으시겠죠.”

지헌의 지적에 재광의 목소리가 안으로 말려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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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엄마는 나한테 그런 얘기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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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두 분은 서로 대화 안 하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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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할 새가 어디 있겠어. 일 년의 반 이상이 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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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예나는 보고 싶어 하시고요.”

재광이 입을 꾹 다물었다. 시간이 없었다는 핑계는 사실 이기적인 변명이었다.

재광은 언제나 일이 먼저였고 집안일은 뒷전이었다. 아내에게도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없었다. 아내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에도 당연히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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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엄마하고는…… 서로 뭘 좋아하는지 모르니까.”

어느새 머리는 일이 아니면 반응하지 못하도록 굳어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아내와도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버렸다.

게다가 이번 친자검사 문제로 영미가 단단히 화가 나 있기도 했다. 자신을 골탕 먹였다며 영미가 한번 소리친 뒤로 재광은 영미에게 말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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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해보마.”

재광이 자신의 무관심을 인정하며 시정해보겠노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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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비는 지금 어쩌고 있는지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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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째 무단결근이에요. 그 이전에도 일을 소홀히 했고요.”

재광이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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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잘 모르겠지만 네 엄마가 은비를 많이 좋아했다. 그만큼 은비가 잘하기도 했고. 네가 몇 달씩 집에 찾아오지 않았던 때도 은비는 집에 와서 네 엄마 말동무를 해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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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을 잘 찾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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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그 아이에게 고맙게 생각했었는데, 대화의 부재가 이런 사달을 만들었어…….”

재광도 자신이 꽤 속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단단한 결속력이 없었던 가족은 저마다 약점을 갖게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 BJ인지 뭔지 하는 놈까지 설치고 있으니.

고민에 잠겨 길게 침묵하고 있던 재광이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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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확 다 까버리지 그래.”

그 또한 아들만큼이나 시원시원한 결단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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