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소외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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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소외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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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소외감
2022.05.04.
여자친구의 집을 처음 방문한 도빈은 마냥 신이 났다.
예나방 구석에서 뽀로로 인형을 발견한 도빈이 예나에게 말했다.
“나 뽀로로 할 수 있어. 보여줄까?”
“응.”
“안녕, 예나야. 난 뽀로로야! 똑같지!”
“나는 루피 할 수 있어. 뽀로로, 너 거기 안 서! 똑같지!”
“나 짱구도 할 수 있어. 난 짜앙구예요. 울라울라! 똑같지!”
“나는 엘사 노래 할 수 있어! 인투디 언노운! 똑같지!”
어느새 정오의 집은 성대모사 대회장이 되었다. 아이들은 경쟁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캐릭터를 이야기하며 목소리를 뽐냈다.
아이들은 성대모사를 좋아한다. 한번 해보라고 하면 서슴없이 뽀로로도 하고 루피도 하고 짱구도 하고 엘사도 해낸다. 재미있는 건 그 모든 목소리가 놀랍도록 똑같다는 사실.
다 똑같은데 본인들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이의 안에 뽀로로도 살고 루피도 살고 짱구도 살고 엘사도 살기 때문이겠지.
정오가 아이들의 목소리 경쟁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사이에, 여유도 없이 아이들의 놀이 주제는 또 바뀌었다. 도빈이 종이와 색연필을 들고 달려왔다.
“아줌마, 그림 그려주세요.”
“그림? 뭐 그려줄까?”
“신비요. 도깨비.”
“엄마, 나는 금비!”
예나가 그 옆에서 외쳤다. 정오는 도빈이 들고온 색연필을 넘겨받았다.
“도빈이가 먼저 얘기했으니까 도빈이 먼저 그려주자.”
색연필 케이스에 붙어 있는 캐릭터라 그리기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당연히 정성을 다하게 되었다. 그리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렸다.
“아빠!”
지헌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아빠, 그림 그려줘! 엄마가 신비 그려주기로 했으니까 아빠는 금비 그려줘.”
현관 쪽으로 달려간 예나가 지헌에게 졸랐다. 정오는 흠칫 쫄았다. 아빠가 제대로 그릴 수 있을까 싶어서.
“금비가 뭐지?”
지헌이 정오에게 물었다. 정오가 색연필 케이스에 보이는 캐릭터를 톡톡 두들겼다.
“보고 그려.”
지헌은 정오의 맞은편에 앉아 색연필을 들었다.
보고 그리는 건 할 수 있겠지? 할 수 있으니까 군소리 없이 색연필을 들었겠지?
정오는 불안함과 기대감을 동시에 안고서 지헌 쪽으로 몰래몰래 눈동자를 굴렸다.
“와! 삼촌, 그림도 그려요?”
“그럼! 우리 아빠는 못 하는 거 없어!”
도빈의 물음에 예나가 으스댔다. 예나의 자랑에 정오는 더 불안해졌다. 왠지 지헌이 그린 동그라미에 인생의 우여곡절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사실 이걸 동그라미라고 불러야 할지, 그것 또한 난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지헌이 심혈을 기울여 색칠까지 끝내고 예나에게 완성본을 건네자, 지구가 무너지기라도 한 듯 예나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이게 뭐야?”
예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도빈이 쳐다보고서 픽 웃고는 다시 입을 합 다물었다. 일곱 살 아이도 눈은 있다. 이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캐릭터가 아니라는 걸 일곱 살 아이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이게 뭐야아!”
이렇게 진실을 알아버렸다. 아빠는 최고, 아빠는 천재, 아빠는 마법사. 아빠가 못 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그토록 확신했는데, 그 신념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나의 금비를 이렇게 망쳐놓다니.
“내가 금비 그려달라고 했잖아, 금비!”
“금비 맞는데…….”
지헌이 멋쩍은 듯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금비를 그려달라고 했는데 좀비를 그렸구나. 보고 그리는 것도 못 하는구나. 우리 예나 아빠는.
“예나야, 미안해. 아빠가 동화책 읽어줄까?”
“아빠 미워. 아빠는 똥손이야.”
아이의 팩트 폭격에 지헌의 눈이 멍해졌다. 그림을 못 그려서 미운 아빠가 되었다. 아이의 아빠가 되기 위해서는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 있는 거였다.
예나는 울상이 되고 도빈은 몰래 웃고 지헌은 충격을 받은 사이에 초인종이 울리고 현관문이 다시 열렸다. 진서가 도윤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엄마아!”
엄마를 알아본 도빈이 가장 먼저 달려갔다. 진서는 지헌까지 와 있는 것을 보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어머, 지헌 씨도 있었네요!”
“엄마, 바둑 삼촌 그림 되게 못 그려.”
정겨운 인사가 오가야 하는데, 눈치 없는 도빈이 진실을 외치는 바람에 진서는 남의 집을 방문하자마자 민망해졌다.
예나와 도빈, 도윤은 한바탕 뛰어놀다가 밤늦게야 헤어졌다. 지헌도 예나를 재우고 밤 10시가 넘어 집을 나섰다. 오늘도 역시 정오가 따라 나왔다.
지헌이 낮에 본가에 다녀온 얘기를 짧게 했었다. 절연하고 돌아온 사람 같지 않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에 도리어 정오가 신경이 쓰였다.
“괜찮겠어?”
“뭐가?”
“어머니 말이야.”
어머니와의 절연. 정오는 도저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독한 일을 하고 돌아온 그의 속이 오죽할까 싶어 물어보는 것도 미안하기만 했다.
평소처럼 지내다가도 문득문득 생각날 텐데. 몸 안쪽 어딘가에 티눈이 박힌 것처럼 아프기도 할 텐데.
“난 괜찮아.”
“그래도 마음이 아플 거야.”
“하지만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
그는 지나간 일은 돌아보지 않겠다는 듯 심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얘기를 계속 이어가기는 어려운 것처럼 유연하게 말을 돌렸다.
“승규가 얘기하더라. 그쪽으로 이사 오라고.”
“응. 진서 씨도 오늘 그 얘기 했어. 한 동네에서 애들 같이 키우면 좋겠다고.”
“어떻게 생각해?”
“나야 좋지. 예나도 도빈이 좋아하니까.”
“흠.”
“왜?”
“예나가 도빈이를 좋아한단 말은 마음에 안 드네.”
“좋아하는 게 뭐 어때서? 서로 미워하지 않고 좋아하니 좋은 거지.”
“도빈이는 예나를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야. 사랑한단 말이지.”
“왜. 쪼그만 애들 둘이 결혼하겠다고 난리라도 칠까 봐?”
“왠지 도빈이는 그럴 것 같아.”
풉. 그의 진지한 표정에 정오는 웃고 말았다.
아들의 연애와 결혼을 반대한 어머니와는 절연까지 했으면서, 딸내미가 남자친구를 만드는 꼴은 못 보겠다는 그 심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도빈이는 그렇다 치고 언젠가 예나에게 진짜 남자친구가 생기면 이 남자는 또 어떻게 변할지 생각하니 앞날이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
다음 날. 즐거운 토요일.
그러나 갑작스럽게도 정오에겐 일거리가 생겼다. 광고주가 급하게 인터넷 광고를 의뢰한 것이다.
지난주에는 국순의 식당 정리를 돕느라 놀지 못해서 이번 주에는 재미나게 놀기로 했는데, 이렇게 또 급한 일이 잡혀 버리니 예나에게 너무 미안했다.
“어떻게 하지? 예나야. 엄마가 오늘 회사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응.”
웬일로 아이는 미소까지 지으며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정오가 도리어 의아해졌다.
“괜찮아?”
“응. 괜찮아.”
대답은 자못 씩씩하기까지 했다. 내심 서운하지만 제 엄마가 걱정할까 봐 일부러 더 씩씩한 척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정오는 거듭 예나를 달랬다.
“엄마가 늦지 않게 올게. 미안해.”
“늦어도 돼. 괜찮아.”
“늦어도 괜찮다고?”
“응. 아빠랑 놀 거니까.”
아아. 아빠가 있으니까 이제 엄마는 일을 해도 된다는 거구나.
“엄마, 빨리 가. 빨리 가서 일해.”
오히려 아이는 빨리 회사에 가라며 부추겼다. 정오는 멍하게 밀려났다.
아빠랑 노는 게 그렇게 좋단 말이지. 흠.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슬퍼하지 않는 마음이 대견하고 고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이제 두 사람은 영락없는 짝꿍이 된 듯하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비밀 메시지를 주고받고 간혹은 귓속말도 한다.
남이 굳이 알려주지 않겠단 비밀에 혈안이 된 적은 없는데 둘 다 정오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보니 약간의 소외감이 생겼다.
정오는 허전함을 느끼며 출근했다. 팀원들 역시 급하게 호출을 받아 회사에 나온 처지라 다들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래도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는다. 다들 빨리 끝내고 집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부지런히 작업했다.
작업물 만들기에 여념이 없을 때 정오의 휴대폰이 울렸다. 예나의 번호였다.
“예나공주!”
[엄마, 우리는 놀러 왔어!]
예나의 밝은 목소리에 정오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지헌과 소풍을 간 모양이었다.
“어디? 어디로?”
[비밀이지롱!]
“또 비밀이야?”
딸이 얌체같이 약을 올려 정오는 심통이 났다. 놀러 갈 거면 나 있을 때 놀러 가지, 자기네들끼리만 놀러 다니고 말이야.
[궁금하지? 이따가 얘기해줄게.]
이게 무슨 고문인가 싶었다. 일은 대강 마무리하고 쫓아가고 싶은 마음에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그러나 매정한 딸은 그렇게 엄마의 가슴에 바람만 넣어놓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시무룩해진 사이에 지헌에게서도 문자메시지가 왔다. 12시. 어김없이, 정오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 오늘은 우리 집에 가기로 했어. 우리는 좀 늦을 수도 있으니까 먼저 집에 가 있어. 이따가 보자.
통보 문자에 정오는 눈을 몇 번 삼박거렸다.
‘나한테 얘기도 안 하고 예나랑 먼저 계획을 짰단 말이지.’
어쨌든 예나와 국순에게 지헌의 집을 보여주고 싶단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정오는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일을 모두 끝마치고 나니 오후 6시. 지헌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예나와 국순도 마찬가지였다. 이동하면서 지헌에게서 문자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지헌의 집 현관문 비밀번호였다. 알아서 누르고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대체 뭘 하길래 연락도 안 되는 거야…….’
조금은 불만스럽게, 정오는 지헌의 아파트에 들어섰다. 지헌에게서 받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간 정오는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에 직면했다.
이 공간이 이토록 어두웠던 적은 없었는데.
현관 센서등도 고장 났는지 작동하질 않았다. 게다가 아이를 초대한다고 집 안에 방향제를 들이부었는지, 현관에서부터 꽃향기가 진동했다. 나쁘지는 않은 향기였지만 아무것도 보이질 않으니 막연하게 무서웠다.
그냥 밖에서 있다가 예나와 지헌이 오면 함께 들어갈걸, 왜 먼저 들어와 버렸을까 후회되었다. 지금이라도 돌아서 밖으로 나갈까 싶은 순간에 복도에 불이 들어왔다. 불은 아래에서 켜졌다.
기다란 복도에 양옆으로 꽃밭이 꾸며져 있었다. 그 뒤로 전등불이 길게 이어졌다. 이게 뭔가 싶어 정오는 몇 번 눈을 감았다 떴다. 깜빡깜빡하는 사이에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TV 화면에 사진 두 장이 반짝거리며 반복재생되고 있었다. 한 장은 7년 전 정오와 지헌이 호주의 식당 ‘더 크라운’에서 찍은 사진이었고, 또 하나는 화면을 가득 채운 꽃 사진이었다.
꽃 사진 위에 예쁜 갈런드가 달려 있었다. ‘MARRY ME?’라고 쓰여 있는 갈런드, 그리고 사진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놓인 카드의 이름 ‘TO 정오’.
예전에 지헌이 얘기한 적 있었다. 7년 전에 프러포즈를 준비했었다고, 그리고 그때 찍은 사진을 7년 만에 발견했고, 거기에 정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고.
지헌이 설명한 그 모습대로의 사진에 정오는 울컥했다. 그녀의 손이 저도 모르게 입술 위로 올라와 앉았다.
이윽고 저 멀리, 복도의 끝에서 말쑥한 슈트를 차려입은 훤칠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방에서인가 까르르,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걸 준비하느라 부녀가 그토록 사이가 좋았던 거였어?
입술은 행복하게 호선을 그리는데, 눈은 자꾸만 젖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