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나도 사랑해 2022.05.07.
세 시간 전. 쇼핑을 마친 지헌은 예나와 국순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와! 아빠 집 엄청 넓다!”
처음 지헌의 집을 방문한 예나가 가장 먼저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소리쳤다.
“어린이집 강당보다 더 넓어!”
아이는 커다래진 눈으로 이 방 저 방을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아빠! 예나랑 숨바꼭질해!”
“네 아빠 할 일 많다. 너도 아빠 도와주기로 했다며.”
지헌 대신 국순이 예나에게 대답했다.
“참, 그렇지!”
중요한 사실을 잊었다는 듯 크게 끄덕이고서도 예나는 온 방 안을 소리 지르며 뛰어다녔다. 지헌은 국순과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 식재료와 조리기구를 잔뜩 샀는데, 막상 주방에 짐을 모두 내려놓고 나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국순이 전쟁터의 장군처럼 지헌에게 물었다.
“자, 이 재료를 가지고 뭘 어떻게 할 셈인가.”
“어머님은 앉아 계십시오.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머릿속은 하얬지만 지헌은 든든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직접 만든 요리를 정오에게 먹이는 것. 먹는 걸 좋아하는 정오를 요리로 유혹하는 것. 성대한 프러포즈의 마무리가 될 오늘의 미션이었다.
“세 시간 동안 혼자 다 하겠다고?”
“네.”
“힘들걸?”
숙련자 국순이 예상되는 바를 일러두었으나 지헌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즘엔 좋은 동영상 콘텐츠가 많아서 요리하기 수월합니다.”
“그래도 내 맘 같진 않을 텐데.”
“괜찮습니다.”
“그래. 잘해봐. 그럼 난 뭘 할까?”
“예나랑 같이 집 구경하시고 쉬시면 됩니다.”
“그래. 알았어.”
지헌이 거듭 고집을 부리니 국순도 더는 말리지 못했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준비에 진전이 없어 보여 걱정스러워졌다. 장비는 제일 좋은데, 써먹지를 못하네……. 지금까지 지켜봐 온 예비 사위는 도움을 받는 것에 부끄러워하는 면이 있었다. 국순이 다시 한번 지헌에게 물었다.
“내가 도와줄 거 없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여섯 시에 온다며. 두 시간 반 남았는데?”
“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예비 사위는 어색하게나마 미소 지었다. 그래. 내 딸에게 음식을 해주고 싶어서 이토록 열의를 다하는데, 이 마음을 무시하면 안 되지. 뭐가 됐든 그냥 마음으로 응원하자. 국순도 마음을 비우고 돌아섰다. 그러나 또 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지헌은 거의 제자리걸음. 동영상 콘텐츠의 설명은 지헌과 같은 초보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고 어려웠다. 자신만만했던 지헌은 기어이 현실을 자각했다.
“어머님.”
“그래.”
“도와주세요…….”
“그래그래.”
국순이 다가오며 팔을 걷어붙였다.
“제가 하려는 요리는…….”
“알아. 펼쳐놓은 것들만 봐도 뭘 하려는지 알겠어.”
한 번의 스캔으로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를 빠르게 파악한 국순이 든든하게 재료를 정리했다.
“도와달라는 말 하는 거 어렵지. 근데 그거 알아?”
“…….”
“도와주고 싶어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어. 세상에는.”
국순의 도움으로 주방엔 활력이 붙었다. 화기들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오늘 구입한 예쁜 그릇들이 모두 닦였다. 한창 준비 중일 때 현관문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를 어쩌나. 벌써 온 거야?”
“아뇨. 꽃이 왔어요.”
지헌이 현관문을 열었다.
“정지헌 님, 안녕하셨습니까!”
플라워드림. 지헌이 7년 전의 기억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던 그 꽃집의 사장이 직접 배달을 왔다.
“직접 와주셨네요. 꽃은 이쪽으로.”
마음은 오랜 친구를 맞이하는 듯 반가웠지만, 오래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지헌이 안내하는 쪽으로 꽃이 줄줄이 이어졌다. 꽃은 현관부터 직선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따라 길게 깔렸다. 고운 꽃길의 맨 끝에는 화사한 꽃기둥이 세워졌다. 세간도 별로 없어 약간은 공허함이 느껴졌던 집 안이 예쁜 결혼식장이 되었다. 7년 평생 이렇게 많은 꽃을 본 적이 없는 예나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럼 오늘은 꼭 성공하십시오. 직접 지켜보지는 못해도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
꽃집 사장이 공손하게 인사하며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흐드러지는 꽃향기에 주방에서 나온 국순도 깜짝 놀라 한마디 했다.
“꽃집을 차려도 되겠네!”
국순의 말투에 빵 터진 예나가 으하하 웃었다.
“그것만 해도 하루 온종일을 투자해야겠구먼, 요리까지 준비하려고 했어?”
지헌은 멋쩍게 웃으며 꽃길의 뒤쪽으로 전구를 설치했다. 지헌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보며 예나가 들뜬 마음으로 소리쳤다.
“아빠, 예나는 축하풍선 만들어줄게!”
“혼자 만들 수 있겠어?”
“응! 예나가 연구도 다 했어!”
예나 역시 오늘을 기다려왔다. 그간 여러 동영상들을 찾아보고 아빠에게 물어보고, 오늘은 아빠와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구입했다. 이제 머릿속의 설계도대로 멋진 작품을 만들 시간이었다.
“그래. 그럼 우리 예나, 잘 부탁해.”
* 띠띠띠띠. 현관문 번호키 누르는 소리에 모두가 긴장했다. 모든 불이 꺼진 집 안. 그 어둠 속에서 다들 숨을 죽이고 정오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현관문이 열렸다. 깜깜한 복도에 정오가 들어섰다. 불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아 긴장했는지, 정오의 한숨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지헌은 곧장 꽃길 뒤편의 전구 불을 켰다. 꽃길을 끝에 서 있던 정오가 그 너머의 지헌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놀라 굳은 사이에 TV 전원도 켜졌다. TV 화면에 두 개의 사진이 반복해 돌아가는 것을 보며 순식간에 정오의 눈이 맑게 젖었다. 그제야 이게 무슨 상황인지 깨달은 것이다. 방 안에서 아이는 무엇이 즐거운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의 웃음소리에도, 꽃길의 끝에 긴장한 표정으로 꽃다발을 들고서 서 있는 지헌의 사랑스러운 모습에도, 정오는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내겐 이런 날이 없을 줄 알았는데. 목소리를 내는 대신 천천히 지헌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정오가 가는 만큼 다가온 지헌이 고백했다.
“사랑해. 정오야.”
긴장하여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나긋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랑, 결…….”
펑! 그러나, 지헌이 청혼을 다 내놓기도 전에 불상사가 터져버렸다. 문 옆에 매달려있던 풍선. 예나가 열심히 만든 축하 풍선이 펑 터져버린 것이다. 준비한 풍선은 예나의 순수한 마음 그대로였다. 아빠의 프러포즈를 축하하는 마음을 풍선에 꾹꾹 눌러 담았다. 종이꽃가루를 한주먹만 담아도 충분했을 텐데, 예나는 욕심껏 색종이를 잘라 풍선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동영상 콘텐츠에서 배운 대로 릴테이프까지 넣었다. 결국 축하풍선은 그 무게와 진동을 버티지 못하고 펑 터져버렸다. 여기가 인기가수 공연장인가 싶을 만큼 많은 양의 종이꽃가루가 쏟아졌다. 풍선 바로 아래에서 축하 풍선인지 축하 폭탄인지를 직격으로 맞은 지헌은, 불과 3초 전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남자였지만, 이내 종이플라워와 릴테이프를 뒤집어쓴 인간 데커레이션 케이크가 되었다. 준비를 하며 진땀을 뺐던 그의 얼굴에도 종이가 덕지덕지 들러붙었다. 풉. 정오는 웃음을 터트렸고 지헌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랑하는 아이가 한, 사랑스러운 짓. 으아앙. 방 안쪽에서는 사랑스러운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이 또한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아 실망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여기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마저 해!”
민망해하는 국순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엄마아. 미안해애. 으어어엉…….”
한스러운 사과를 끝으로 아이의 울음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지헌의 시선, 문틈으로 국순이 우는 아이를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헌 역시 방으로 들어가 아이를 안아주고 싶었다. 실패했다고 울 일이 아닌데. 겨우 일곱 살짜리가 엄마 아빠를 위해 축하 풍선을 설계하고 그걸 엄청나게 크게 터트렸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인데. 아이를 안아주는 일은 뒤로 미루고, 지헌은 다시 제 역할에 집중하며 몸에 붙은 종이들을 털어냈다. 집 안은 엉망이 되었고 무드가 조금 깨졌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고 벅찬 마음이었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하는 프러포즈를, 그녀의 가족들이 도와주었다. 지헌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괜찮아. 모든 게 다 괜찮아.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어도.
“정말 예측 불가 인생이지만, 그저 고마울 뿐이야.”
제멋대로 흘러간 인생의 끝에 그대가 있다면, 나는 운명을 언제나 감사하게 받아들일 거야.
“네가 옆에 있어서 나는 모든 것에 감사해.”
고마워. 내게 와줘서.
“앞으로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다시 돌아오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계속 이렇게 살자. 평생.”
7년 만의 프러포즈. 이 순간을 위해서 아껴두었던 말. 아껴두었던 사랑. 이제 마음껏 표현해도 되겠지.
“사랑해. 정오야.”
웃음을 머금고 있던 정오의 눈이 다시 한번 맑게 젖었다. 7년 전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이정오를 향한 본능은 그대로이기 때문일까. 이 순간을 7년간 기다려왔던 것처럼 그의 심장도 그녀의 고운 눈망울에 반응을 보이며 뜨겁게 울렁거렸다.
“결혼하자.”
지헌은 주머니에서 꺼낸 반지를 정오의 손에 끼워주었다. 7년 전에 준비했던 디자인의 반지를 다시 주문했다. 7년 만에 주인을 찾은 반지가 그녀의 고운 손에서 예쁘게 반짝 빛났다. 정오가 울먹거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
나도 고마워. 내게 돌아와줘서.
“나도 사랑해.”
정오에게서 사랑한단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지헌은 자신 또한 이 말을 기다려왔음을 깊이 깨달았다.
어느새 울음을 뚝 그친 예나가 문틈으로 엄마 아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할머니. 엄마랑 아빠랑 뽀뽀한다.”
“그걸 왜 보고 있어. 이리 와.”
할머니와 손녀딸의 속삭임은 정오와 지헌의 귀에도 들려왔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붙들린 손을 풀지 않았다. * 은비는 며칠 동안 내리 잠만 잤다.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잠만 쏟아졌다. 자신의 인생이 왜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너무 억울해서 속이 터질 것 같은 순간에도 잠은 계속 왔다. 어쩌면 모든 것을 회피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외롭고 괴로울 때는 남자가 옆에 머물러줬는데, 남자 또한 그녀의 투정에 지친 건지 연락이 없었다. 드르르. 멍하니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는 사이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가만히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지방의 지역번호가 찍혀 있었다. 생각해보니 어제도 같은 지방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장난 전화인 것 같았다. 수신 차단을 할까 하다가 왠지 시원하게 욕을 쏟아내고 싶은 욕망에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저편에서 아무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아 은비는 용기가 생겼다. 될 대로 되라지.
“장난 전화 하지 마, 이 개만도 못한 쓰레…….”
[채은비.]
그런데, 수화기 저편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섬뜩한 기운에 은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누구야.”
[나를 몰라?]
“…….”
[내 목소리 알잖아. 기억한다며.]
“…….”
[네가 감방에 처넣은 김진구. 기억 안 나?]
꺅. 은비는 깜짝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휴대폰의 소리는 더 커졌다. 손이 미끄러지면서 스피커폰 버튼을 누른 것이다.
[내가 아니라고 아니라고 그렇게 항변했는데도 줄줄이 없는 증거를 만들어서 1년이나 감방에 살게 만들었지.]
은비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휴대폰을 주워들었다.
[잘 들어. 너 가만 안 둘 거야.]
빨리 끊어버려야 해. 아, 아니, 녹음 버튼!
[똑같이 만들어줄게.]
당황한 은비가 공포에 휩싸여 휴대폰을 집어 들고 안절부절못하는 사이에 김진구가 무시무시한 말을 뱉어냈다.
[너도, 정지헌도, 죽여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