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결혼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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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결혼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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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결혼의 목적
2022.05.11.
7년 전, 지헌을 차로 들이받은 뺑소니범은 자신의 잘못을 내내 부정했다. 김진구는 전과가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 누구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은비의 주장도 한몫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은비는 한편으로 자신의 기억력에 의구심을 품었다. 정말로 김진구가 진범이 아니면 어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자신의 블랙박스를 경찰이 수거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은비는 혹시나 하며 블랙박스 동영상을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제 블랙박스에 범인의 모습이 잠시 찍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범인은 사고일 당시 김진구가 입고 있던 옷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김진구는 아니었다.
은비가 본 김진구는 왼손의 손등 위쪽에 문신이 있었지만, 동영상 속의 남자에게는 그 문신이 보이지 않았다. 김진구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한 음모가 분명했다.
하지만 은비는 끝내 이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범인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에 자신의 모습도 잠깐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사고를 발견하자마자 줄행랑치는 모습. 절대 지헌과 영미가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은비는 사건의 진실을 숨겼고 김진구는 결국 실형을 받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사이에 지헌의 건강이 회복되었고, 장영미 여사는 은비를 은인으로 여겼다.
김진구는 1년의 교도소 생활을 끝내고 출소했지만 곧 다른 죄를 지어 5년형을 선고받았다. 긴 시간이었다. 은비는 김진구라는 존재를 까맣게 잊었다.
***
어두운 밤.
은엽은 은비의 연락을 받고 바삐 은비의 집을 찾았다.
“채은비. 어떻게 된 일이야.”
다짜고짜 문을 열고 들어간 은엽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동생의 멱살을 잡고서 따졌다.
김진구가 정지헌의 뺑소니범이 아니라 한다. 진범은 따로 있다고 한다.
“김진구가 날 죽여버리겠다고 했어.”
은비가 공포에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녹음은. 녹음은 했어?”
“…….”
“녹음을 했어야지! 그거 하나 똑바로 못 해?”
“그걸 할 겨를이 어디 있어!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은엽이 소리를 지르자 은비도 똑같이 따졌다.
“진범은 어떤 놈이야. 얼굴은 똑바로 봤어?”
“…….”
“네가 동영상 파일 가지고 있다며.”
은엽은 전화로 잠깐 들었던 정보들을 바탕으로 은비에게 당장 필요한 요구를 했다. 은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랙박스 메모리카드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오래된 USB를 모아놓은 상자에 넣어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 여기에 없어…….”
은비는 찾는 것이 보이지 않아 상자를 아예 엎어보았다. 은엽도 은비와 함께 메모리카드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어디에도 메모리카드는 없었다.
“그 중요한 걸, 이렇게 허술하게 보관해?”
“…….”
“넌, 정말로 쓸모가 하나도 없어.”
언제나와 다름없이 은엽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은비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기억나는 거 아무것도 없어?”
“7년 전 일을 어떻게 기억해.”
“키가 김진구랑 비슷했다는 거지?”
“키도 체격도 옷차림까지도 완전히 똑같았다고. 지금도 기억이 의심스러울 정도야. 김진구 손등에 박혀 있던 그 문신이 아니었으면 지금도 똑같은 놈이다 확신했을 거야.”
억울함이 서린 은비의 목소리에 은엽은 생각에 잠겼다.
김진구와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김진구의 차를 몰던 남자.
그렇다면 뺑소니 사고는 영락없는 계획범죄다. 김진구에게 누명을 씌울 요량으로 오랫동안 계획을 짰던 것이다. 그런 짓을 할 인물이라면…….
일단 김진구의 오래된 원한 관계를 파헤쳐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잘 들어, 채은비. 이건 너랑 나만 아는 비밀이야. 알았어?”
은엽은 은비에게 단단히 당부했다.
*
풍선 폭탄 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거실은 예나의 놀이터가 되었다. 지헌은 청소를 잠시 뒤로 미루고 모두를 식탁으로 불렀다. 식탁 위에는 정오가 좋아하는 음식들뿐이었다. 예나가 지헌에게 부지런히 정보를 전해준 덕택이었다.
정오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이걸 다 오빠가 한 거야?”
“아니. 어머님이 해주셨어…….”
지헌의 수줍은 대답에 국순이 손사래를 쳤다.
“시간이 없어서 그런 거지. 나는 그냥 옆에서 거들기만 했어.”
국순이 지헌에게 공을 돌렸지만 정오는 국순이 거의 다 했을 거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지헌은 다 펼쳐놓고 우왕좌왕했을 것이다. 7년 전, 그가 요리를 해보겠다고 처음으로 팔을 걷어붙인 날도 그랬으니까.
“엄마, 지헌 씨 요리 잘해. 지금은 물론 다 잊어버렸지만 7년 전에 하던 게 있으니 엄마가 가르쳐주면 금방 배울 거야.”
“너는 네가 배울 생각은 안 하고 남 시켜 먹을 생각만 해?”
“엄마가 잘 얻어먹고 사는 것도 팔자라며. 그리고 오빠가 요리에 욕심이 있다니까?”
정오의 상상은 벌써 장모와 사위가 주방에서 사이좋게 요리를 하는 모습에 닿아 있었다. 지헌은 불편한 기색 없이 정오의 말을 거들었다.
“저는 좋습니다. 어머니께서 가르쳐만 주신다면 열심히 배울 수 있습니다.”
“아유, 이보다 부담스러울 수가 없네.”
부담스럽다고 말하면서도 국순의 입술선은 길게 늘어났다.
예나도 내내 행복한 얼굴이었다. 식사를 마친 예나는 다시 집 안 곳곳을 누비며 어질러댔다. 그런 예나를 따라 정오의 걸음도 바빠졌다. 국순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지헌의 시선이 이따금 정오를 향해 진득하게 움직였다.
엄마와 잡기놀이를 하다가 달려온 예나가 국순의 무릎 위에 호흡을 풀어놓으며 외쳤다.
“할머니, 나 여기서 살고 싶어! 여기 좋지!”
“그러게. 할머니도 좋은데, 주방도 정말 좋고…….”
국순은 무엇보다도 넓은 주방에 눈이 갔다. 식당 주방만큼이나 넓은데도 복잡하지 않아서 마음에 쏙 들었다. 이런 주방에서라면 요리할 때마다 행복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집은 너무 부담스러웠다.
“너무 좋은데…… 창문만 보면 좀 어지럽네.”
창문을 쳐다보기도 힘들 만큼 어지러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때도 속이 계속 울렁거려 호흡을 꾹 참아야 했다.
“미안해. 예나 아빠.”
“아닙니다.”
지헌 또한 정오에게 미리 들은 바가 있어 국순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최대한 빨리 집을 먼저 알아보려고요. 도빈이네 집 옆 단지 아파트가 잘 나왔다고 합니다. 내일 같이 가보시죠.”
지헌이 차근차근 이후의 계획을 읊었다.
“그리고 월요일엔 혼인신고를 하려고 합니다. 결혼식은 이후에 준비하고요.”
“결혼식을 꼭 해야 할까?”
아이가 일곱 살이 되어서야 이루어지는 결혼식. 게다가 세간에 이런저런 말이 나올 것이 뻔한 결혼식. 정오에게 떨어질 스포트라이트가 걱정스러워 국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 겁니다. 해야 하는 건 다 할 거예요.”
지헌의 결심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확고했다. 사위가 확실하게 대답해주니 국순도 마음이 놓였다.
정오에게 힘든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헌이 잘 보호해주리라 믿을 수 있었다. 그사이에도 지헌의 눈길은 간간이 정오를 향하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집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졌다. 주말 근무를 하고 온 정오도 노곤해졌다. 예나는 지헌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국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나도 좀 졸음이 오네. 얼른 쉬어. 나는 저쪽 맨 끝방에서 예나 데리고 잘게.”
“아니야, 엄마. 예나는 내가…….”
“고맙습니다. 어머니.”
정오가 예나를 챙기려는데 지헌이 먼저 넙죽 인사했다. 자신의 말을 막아선 것 같은 느낌에 정오는 흠칫 지헌을 쳐다보았다.
지헌은 국순의 분부에 따라 잠든 예나를 끝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국순과 예나의 잠자리를 손본 후 다른 중요한 것들을 차분히 일러주고는 공손히 인사했다.
졸음이 온다는 국순의 말이 나오자마자 착착 일이 진행되었다. 이때를 기다려온 것처럼.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래. 예나 아빠, 오늘 너무 고생했어. 아주 멋졌어.”
“감사합니다.”
“축하해. 두 사람.”
다정한 인사가 오고 가고 국순이 손을 흔들었다. 이미 결혼식까지 마친 분위기에 정오의 두 뺨이 슬쩍 붉어졌다.
정오가 얼떨떨하게 손을 흔드는 사이에 지헌은 국순에게 꾸벅 인사하고 뒷걸음질로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호텔 지배인 만큼이나 능숙하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었다.
돌아선 그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어디 아파? 얼굴이 빨간데.”
“어? 아니. 그냥.”
“…….”
“아아, 오늘 정말 고생했어. 오빠 많이 피곤하겠다.”
“아니, 전혀 안 피곤한데.”
“말은 그렇게 해도 피곤할걸? 누우면 잠이 쏟아질 거야.”
“정오야.”
“…….”
“할 말이 있는데.”
그의 표정이 돌연 긴하여 그녀 또한 긴장하게 되었다. 한껏 피곤한 표정을 연출하며 반쯤 감겨 있던 정오의 눈꺼풀이 위로 휙 뜨였다.
“무슨 말? ……어머니 얘기야?”
“…….”
“아니면 채은비 얘기?”
“어쨌든 들어가자.”
지헌이 정오의 손을 움켜잡았다.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악력은 거세었다. 성큼성큼 발을 옮기는 지헌을 따라 정오도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의 잰걸음만큼이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발끝이 침실에 닿았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서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달칵, 문이 닫히고. 불이 켜지고.
“무슨 일인데. 얼른 얘기해봐.”
“그게.”
“응. 응. 말해.”
“사랑한다고.”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가 해서 정오의 눈빛이 멍해졌다. 바짝 긴장해있던 어깨가 툭 풀렸다. 그러나 눈빛만은 매서워졌다.
“……장난해?”
그는 그저 느긋한 미소를 지을 뿐.
“심장이 철렁했잖……!”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붕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부드러운 침대 시트가 그녀의 등을 포근하게 감쌌다. 그리고 눈앞에는 정지헌.
제 위를 단숨에 점령한 지헌의 눈빛은 정말로 피곤한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라는 듯 열망이 가득했다.
눈앞의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집어삼키기 전에 시간을 들여 탐미하는 눈이었다. 실은 오늘 내내 그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녀는 예나만 쫓아다니느라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내내 기다렸어. 널 여기 눕히려고.”
그가 노골적인 말과 함께 성큼 몸을 숙였다. 뜨거워진 숨결이 그녀의 뺨 위를 배회하다가 목선과 쇄골라인을 따라 흘렀다. 옅은 자극에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 얼굴이 너무 예뻐서 지헌의 숨은 더욱 탁해졌다.
호주에서의 밀회 이후, 두 사람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서로의 마음은 닿았지만 몸은 좀처럼 닿지 않았다. 과제가 많은 시간이었다.
“넌 결혼이 뭐라고 생각해. 그냥 육아공동체라고 생각해?”
예쁜 아이를 함께 키우는 매 순간순간이 소중하고 행복하지만, 서로를 그저 아이의 아빠, 아이의 엄마로 여기며 만족할 수는 없었다.
국순의 앞에서는 꽤 점잔을 떨었고 예나에게는 해달라는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는 상냥한 아빠가 되어주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정지헌은 사실 점잖은 사람도 상냥한 사람도 아니다.
“난 이거라고 생각해.”
숭고하게만 여기던 결혼의 정의가 그의 목소리를 따라 농염해졌다. 딱 정지헌다운 주장. 외설스럽지만 가장 본질에 가까운 주장이었다. 정오도 반박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진실을 일깨운 입술이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핥다가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오직 정지헌만이 손을 댈 수 있는 영역으로 나아갔다.
그녀가 입안에 머금고 있던 숨을 앗, 하고 터트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녀의 작은 떨림에도 신경이 곤두서는 남자가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흥분되는 와중에도 묘한 위안을 얻는다.
그녀가 자신을 흔들고 미치게 하는 이 순간이 오히려 그에게는 구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