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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새집 마련 (109/183)


109. 새집 마련
2022.05.14.


그의 체온이 닿은 그녀의 피부 곳곳이 발긋해졌다. 몇 시간 전 그의 청혼에 감격하여 맑게 젖어 있던 그녀의 눈망울은 이제 다른 이유로 뜨겁게 젖어 있었다. 얕은 호흡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의 열망이 그녀의 몸에 차곡차곡 쌓였다. 확실히 지헌에게 유리한 시간이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무슨 장난을 치든 어떻게 괴롭히든 화를 낼 수도, 요리조리 이 방 저 방으로 도망을 갈 수도, 소리도 지를 수도 없으니.

아무 거리낌도 없이, 시간에 쫓기지 않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는 욕심껏 정오를 안았다.

그럼에도 조금은 맹렬해졌다. 여전히 그녀가 언젠가 자신을 떠날 수도 있다는 초조함이 있는 건지, 떠난 것은 자신이었는데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완벽한 행복은 불안을 동반하는 걸까. 햇빛이 뜨겁게 타들어가는 날에 그늘이 더 짙어지는 이치이려나.

지헌에게 확실하게 유리한 시간이었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승리였을 뿐 이전에도 그랬듯 그는 정오에게 압도되었다.

손등으로 입을 막고는 끙끙대며 소리를 참는 그녀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빛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느낌. 속절없이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가 이성을 끊어먹고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홀리고 미쳐서.

그래도 더 빠지고 싶었다. 영원히 이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바보 같은 바람을 가져보기도 했다.

지헌은 이 마음을 평생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 다시는 잊지 않겠다고.

가파른 열락의 순간 그 끝이 보일 때마다 정오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오므렸다.

하지만 끝내는 말하지 못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관계가 그녀의 입술을 연거푸 막아버렸다. 그 집요함에 울먹이다가 결국 토라져버린 정오에게 그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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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있지 않았어?”

빨리도 묻는다. 정오는 원망의 마음을 그득 담아 그에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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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고마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하나도 고맙지가 않아졌어.”

그 귀여운 투정에 또다시 마음이 동하는 지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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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오, 큰일 났다.”

그녀의 모든 것은 그를 자극하는 구실이 될 뿐이었다.

*

다음 날.

암막 커튼이 살짝 벌어진 틈으로 금색 옷감 같은 빛이 들어왔다. 시각을 확인하고 벌떡 일어난 정오는 몸이 뻐근한 느낌에 또다시 털썩 누워버렸다.

아, 이 가식덩어리 정지헌.

국순과 예나의 앞에서는 새 가정의 서열 가장 말단에 있는 사람처럼 겸손을 떨면서, 정오와 둘만 남겨지면 매번 주도권을 잡았다.

복수할 테다! 절대 용서하지 않아!

큰맘을 먹고 어기적어기적 거실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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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가 꼴찌야!”

퍼즐을 맞추고 있던 예나공주가 가장 먼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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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일어났어?”

국순은 안마의자에 앉아 느른하게 물었다. 예나의 옆에 앉아 있던 지헌은 그새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식탁에는 깔끔한 아침 식사 1인분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오가 좋아하는 계란국과 유부초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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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좋아한다며. 먹어.”

쒸익쒸익. 복수하려고 했는데.

정오는 분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음식 앞에서는 마음이 물러지는 그녀의 약점을 가족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어느새 뾰로통한 표정을 풀고 와구와구 음식을 흡입하는 정오의 앞에 지헌이 앉았다. 턱을 괴고서 그녀의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이는 것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그시 바라보던 지헌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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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약 좀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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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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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을 좀 길러야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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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 식사 후 지헌은 정오와 예나와 국순을 데리고 승규의 동네로 갔다. 우선 승규의 추천대로 승규의 동네를 살펴보기로 했다.

꼭 승규가 추천한 아파트가 아니더라도 아이를 키우기 좋은 지역이었다. 승규가 추천한 공인중개소 앞에서 지헌은 승규네 가족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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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야아아!”

언제나와 다름없이, 도빈이 가장 먼저 우렁차게 예나를 외치며 달려왔다. 진서와 승규도 다가와 국순과 정오에게 인사했다.

지헌의 눈썹은 반대로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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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너까지 왔어?”

지헌의 뚱한 물음에 정오가 대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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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얘기했어. 흔쾌히 오신다고 한 거고. 다 같이 보면 좋잖아. 두 분이 이 동네 잘 아시기도 하고, 도빈이 어머니는 꼼꼼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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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집은 꼼꼼히 살펴야 하니까.”

승규가 정오의 의견을 거들었다.

결국은 여덟 명에 이르는 대가족이 우르르 집을 보러 다니게 되었다. 지헌이 요청하는 기준이 명확하여 승규네 옆동네까지 발품을 팔았다. 하지만 모두 내부 수리가 필요한 집들이라 썩 내키지는 않았다.

승규가 그제 얘기했던 매물을 확인한 건 앞서 두 집을 보고 나와 기대감이 훅 떨어졌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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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

예나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탄성을 터트렸다. 이전에 본 집들과는 확실히 반응이 달랐다. 정오와 국순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탁 트인 전망과 따뜻하게 들어오는 햇살, 넓고 깔끔한 집 안. 까다로운 지헌 또한 딱히 흠잡을 데 없는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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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죠! 높지도 않고 딱 좋네요.”

진서가 국순에게 말을 걸었다.

지헌은 수상한 낌새를 느꼈다. 승규 진서 부부가 중개인과 작당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부러 안 좋은 집을 몇 개 보여주어 이 집을 고르게 만들기 위해서.

부부사기단까지는 아니고 부부계략단의 느낌은 조금 나지만, 그래도 자신의 일에 이렇게나 나서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니 아무 말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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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분이 여기서 오래 사시려고 인테리어를 싹 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해외발령이 나는 바람에 얼마 못 살고 미국으로 가셨어요.”

중개인이 집에 대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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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대기 층이지만 7층이라 그다지 높지도 않죠. 방도 많고, 복층이라 아이들이 뛰어도 문제없고, 옥상에는 테라스도 있고요. 공실이니 언제든 들어올 수 있고. 특히, 이쪽 베란다에 와보시면요. 초등학교가 딱 보이죠.”

중개인은 정오와 지헌을 주방 쪽 베란다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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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학교에 들어가는 것까지도 확인할 수 있어요.”

약간의 미소만 짓고 있던 정오의 눈빛이 달라졌다. 초등학교 뷰에 홀딱 반한 것이다.

아이들은 이미 제집인 양 깔깔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발 빠른 예나는 벌써 계단을 올라 옥상 테라스까지 확인하고 돌아와 지헌에게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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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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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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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좋아! 맘에 쏙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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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제일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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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빈이네 집이랑 가까운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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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예나의 기쁜 반응에 흐뭇하게 올라섰던 지헌의 입술 끝이 슬쩍 내려갔다. 승규가 다시 지헌의 옆구리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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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결정해야 할 거야. 이렇게 좋은 집이라면 내일 당장 팔려도 이상하지 않을걸.”

조만간 팔릴 집이라는 데엔 큰 이견이 없다. 지헌은 마음을 바꿔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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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살까? 살다가 별로다 싶으면 또 이사 가면 되니까.”

공실의 넓은 집. 하루라도 빨리 같이 살 수 있는 집.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헌의 물음에 정오가 싱긋 웃었다.

*

영미는 여전히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제 잠깐 방으로 들어와 그녀를 달래는 듯했던 재광도 이후로 통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영미도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재광까지 제게 질려서 떠나지 않을까 하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누워만 있으니 더더욱 마음은 우울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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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모님.”

그 와중에 집안의 직원이 다가와 영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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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엽 변호사님이 제 연락처로 전화를 해서요…….”

직원의 화두에 영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친자검사 후 영미는 채은엽을 수신 차단했다. 이를 깨달은 은엽이 알고 있는 직원에게 연락을 하여 영미에게 다시 접근하려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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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놈 연락처를 왜 가지고 있어! 당장 지워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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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데…… 사모님이랑 꼭 통화를 해야 한다고, 중요한 일이라고 그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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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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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뺑소니범이 복수를 하겠다고 했다던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직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읊은 이야기에 영미 또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국 영미는 은엽에게 전화를 걸고 말았다.

잠깐의 통화연결음이 흐르고, 은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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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연락이 되네요. 어머니.]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채은엽의 간교한 목소리에 영미의 빈속이 울렁거렸다. 영미는 용건만 듣고 얼른 끊을 생각으로 반응 없이 곧장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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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구가 출소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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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네요. 은비한테 직접 연락을 했습니다. 출소를 하자마자 우리 은비를 없애버리겠다고 협박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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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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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롭게 목격자 증언을 한 대가가 이런 거라니. 은비가 너무 안됐습니다. 은비도 많이 원통해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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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으면 애초부터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영미가 호통쳤다. 목소리가 시원하게 나오지는 않았다. 먹은 것이 없는 채로 소리를 지르니 누군가가 바늘로 골을 찌르는 듯이 아프기도 했다.

영미의 책망에도 은엽은 반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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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어머니. 저는 지헌이의 친구로서, 어머니의 변호사로서 노력하다가 버림받은 게 다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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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네 잘못을 모르니 됐다. 너와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아.”

그 순간 방으로 남편 재광이 들어왔다.

그리고 동시에, 수화기 저편으로 섬뜩한 은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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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7년 전에 성우를 고용하신 적 있으시죠?]

심장이 철렁했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손마디까지 하얗게 질렸다. 눈앞의 재광과 휴대폰의 목소리. 모두가 저승사자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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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 성우랑 친하거든요. 세상이 참 좁네요.]

휴대폰에서는 계속 은엽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두 가지에 동시에 놀란 영미가 굳어 있는 사이에 저벅저벅 걸음을 옮긴 재광이 영미의 휴대폰을 가져갔다.

아내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재광은 방문 밖에서 영미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무것도 먹은 게 없어서 기력이 없을 텐데, 전화통화도 힘들 텐데, 아주 심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내용 또한 수상했다. 아내가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미는 휴대폰을 빼앗아간 재광에게 곧장 손을 뻗었으나 재광이 이보다 빨리 한 발짝 물러났다. 재광은 휴대폰의 볼륨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은엽의 목소리가 고요한 방안에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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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우 친구가 7년 전에 어머니께 아주 희한한 의뢰를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지헌이 목소리를 흉내 내서 지헌이의 여자친구한테 전화를 하라고 하셨다면서요.]

하얗게 질려 있던 영미의 얼굴이 시퍼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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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지헌이한테서 떼어놓은 여자가 이정오,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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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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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머니 때문에 지헌이가 7년 동안 제 자식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았던 거였네요.]

기어이 영미는 다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재광이 들고 있는 휴대폰을 빼앗아 전원을 꺼버렸다.

다시 고요해진 침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재광은 분노에 서린 눈으로 영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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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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