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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급한 요청 (110/183)


110. 급한 요청
2022.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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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대체 무슨 얘기를 들은 거냐고!”

재광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침실을 가득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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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를 고용해서 지헌이랑 그 애를 갈라놓았다고? 당신이 그런 짓을 했어?”

영미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입을 뻐끔거렸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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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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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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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어떻게 아이까지 가진 사람한테 그런 짓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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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어!”

재광이 몰아붙이자 영미의 목소리가 겨우 터졌다. 사무치는 억울함에 눈가에는 눈물이 들러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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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몰랐어! 얘기를 안 했다고, 그 애가!”

내가 그 애한테 어떻게 뒤통수를 맞았는지 당신은 몰라. 내가 얼마나 속이 문드러지고 썩어가는지 당신은 몰라.

이정오에게 아들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여전히 영미는 자신을 피해자라 여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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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나도 이러는 거 아니야. 그 애가, 이정오가 우리 몰래 아이를 낳아서 키운 거라고. 우리한테 허락도 안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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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아. 당신이 성우까지 고용해서 갈라놨다며!”

답답해진 재광이 호통쳤다.

영미가 이정오의 임신 사실을 몰랐다면, 그건 이정오가 얘기를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것이리라. 재광이 만난 이정오는 공손하면서도 할 말은 하는 당찬 사람이었다. 아마도 말할 기회가 있었다면 말했을 것이다. 아이를 가졌다고.

영미는 악에 받친 듯 얼굴을 붉히고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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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한테 대체 뭐라고 말하게 한 거야.”

그런 영미에게, 분노를 꾹 눌러 참은 재광이 점잖게 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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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그 뒤로 7년을 한 번도 찾지 못한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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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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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채은엽한테 직접 연락해서 따져 물어야겠어?”

재광이 채은엽까지 들먹이고 나서야 영미는 울컥 울음을 터트리며 7년 전의 일을 털어놓았다.

*

다음 날 낮 12시. 맥스기획 제작 2팀.

지헌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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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오야. 정오다. 나가자.

 
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내내 들었던, 선생님들이나 즐겨 하던 농담을 정지헌한테서 들으니 참 새롭고도 하찮네.

정오는 헛웃음을 툭 터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시간에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기로 했다.

그제는 프러포즈, 어제는 집 계약, 오늘은 혼인신고. 큼직한 일들이 하루에 한 가지씩 착착 진행되니 아무리 뚝심 좋은 이정오라도 벅찰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지헌이 건네는 실없는 농담은 긴장한 마음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 사람들이 몰려 기다림이 길었을 뿐, 혼인신고 절차는 간단했다. 준비해 온 서류들을 신분증과 함께 구청에 접수하면 완료. 아주 쉬운 일이었는데 지헌은 신중의 신중을 기한다는 듯 내내 심각한 표정이었다.

승규와 진서 부부의 증인 서명이 담긴 혼인신고서를 제출한 지헌이 담당 직원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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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료 처리는 언제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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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중으로 알림 문자가 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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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안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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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기다리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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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리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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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부부 대출받으시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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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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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슨 사유로 급하게 요청하세요?”

무슨 사유긴요. 그냥 얘가 마음이 급해서 그래요.

흐린 눈으로 지헌과 구청 직원을 바라보던 정오는 냉큼 지헌의 팔목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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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정오는 직원에게 인사하고 지헌과 함께 재빨리 구청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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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좀 기다리면 어때. 딱히 급할 것도 없는데.”

정오가 핀잔을 주니 지헌이 멋쩍은 듯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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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물어본 것뿐이야. 언제 처리되나 해서.”

혼인신고 처리 완료까지 하루. 단 하루도 기다리기가 힘들 만큼 마음이 급한 사람이 지금까지 이 파란만장했던 날들을 어떻게 견뎠나 싶었다.

물론 제멋대로 결정한 것들도 많았지만 그녀가 기다리라고 말하면 꽤 투정 없이 기다려주었다.

혼인신고 처리에 대한 걱정을 떨쳐낸 지헌이 이후의 계획을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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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은 내가 프라이빗웨딩이 가능한 곳을 알아볼게. 꼭 와줬으면 하는 하객들만 초대해서 조촐하게 하자. 아니, 화려하게 할 수도 있어. 네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그렇게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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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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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나가 우리랑 떨어지는 걸 싫어할 테니까 신혼여행은 예나랑 어머님까지 모시고 가자. 어디 가보고 싶은 여행지 있는지 어머님께 넌지시 여쭤봐.”

이 남자는 내내 일은 안 하고 결혼 생각만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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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깔끔하긴 한데 주방은 좀 더 편하게 고쳤으면 좋겠고, 예나가 있으니 계단이랑 옥상도 안전하게 손봐야 해. 내일 바로 공사 시작해서 다음 주까지는 다 끝낼 수 있도록 할 거야. 그럼 도배하고 입주 청소하고 바로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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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러자.”

하아.

줄줄이 계획을 늘어놓은 그가 후련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어깨 위로 그의 한숨이 고이 내려앉았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긴 지헌이 평온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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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됐어.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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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우리가 가족이 됐어.”

정오도 그가 자신을 감싸 안은 팔 위로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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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구청 문을 나서는 순간 혼인신고 완료 처리가 되는 시스템이었다면 더 폼이 났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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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때문에 그런 거였어?”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다. 그가 혼인신고서 접수 후에 직원에게 집요하게 꼬치꼬치 물었던 이유는 그런 거였다.

이런 하찮은 생각을 하는 지헌이 참 우습고도 사랑스러웠다.

*

점심 식사 후 지헌은 정오를 회사에 데려다 주고 나서 바로 재광을 찾아갔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건 연례행사 같은 일이었는데, 어느덧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일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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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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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의자에 등을 기대고서 생각에 잠겨 있던 재광은 지헌이 부르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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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라.”

평소보다도 더 묵직한 목소리로 지헌에게 소파 자리를 권한 재광이 그 맞은편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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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신고를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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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점심시간에 정오랑 구청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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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축하한다.”

아들을 축하하는 재광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지헌은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다. 요 근래에 재광이 정오나 예나를 대하며 보여준 밝은 모습들이 아버지의 본래 모습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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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도 구했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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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제요. 승규네 집 근처에 괜찮은 아파트가 있어서 바로 계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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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인이랑도 같이 살게 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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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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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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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은 절 항상 편하게 대해주십니다. 정말 좋은 분이세요.”

아들에게는 이제 새 어머님이 생겼다.

지헌의 목소리를 듣는 재광의 얼굴에 옅은 그늘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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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네가 좋으면 됐지.”

재광은 조심스럽게 차를 들이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제 아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친모자 사이는 더욱 멀어지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사실 영원히 감추고도 싶지만 채은엽이 중간에 끼어 있으니 다른 방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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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에 네가, 어떻게 예나 엄마와 헤어지게 되었는지 알아냈다.”

결혼과 이사. 새로운 시작을 앞둔 아들의 얼굴에 곱게 피어 있던 미소가 단숨에 쑥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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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엄마가…… 사람을 고용했어…….”

재광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차분하게 이어간 목소리는 점점 자신 없이 작아졌다. 이토록 아들의 눈치를 본 적은 처음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지헌은 무릎 위에 둔 두 손을 꽉 쥐고 있었다. 무릎 위에서 주먹이 부르르 떨려오는 것이 보였다. 격분하여 소리를 내지르지는 않았지만 재광에게는 그 침묵 속의 절규가 짐작되었다. 재광에게도 힘든 시간이었다.

재광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후, 지헌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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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얼추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꾸민 일일 거라고. 다만 그 사실을 채은엽도 알고 있었다는 부분은 좀 걸리네요.”

의외로 덤덤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지헌 역시 중간에 채은엽이 끼어 있어 좀 더 이성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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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민망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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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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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엄마가 그렇게까지 악독한 사람은 아닌데, 네 일에서만큼은 사람이 극도로 예민해져. 네 엄마도 아이가 있는지까지는 몰랐다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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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들에게는 변명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는 재광의 구차한 말들이 지헌의 부름에 가로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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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감싸주시고 싶은 아버지 마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걸로 됐어요.”

아버지는 이런 일로 어머니에게 실망하여 돌아서는 사람은 아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세월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지헌은 그것이 맞는 이치라고 생각했다. 어긋난 채로 맞물려 움직이던 톱니바퀴가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나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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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 어머니를 만나지 않을 테지만 아버지는 계속 같이 사실 거잖아요. 그러니 저는 괜찮습니다. 어머니께 더 마음 쓰고 싶지 않고요.”

재광은 과묵하게 입을 다물고서 한참 동안 빈 찻잔만 바라보았다.

아들에게는 아들의 인생이.

잘 아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무엇이 평화를 지키는 방법인지를 판단한 재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후 말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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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7년 전에 너를 차로 쳤던 남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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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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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했는데, 여태 네 사고에 앙심을 품고 있다더구나. 채은비한테 협박을 했다나 봐.”

재광은 영미가 털어놓았던 이야기를 지헌에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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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 진술을 했던 채은비한테 앙심을 품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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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도 뭔가 억울한 게 있는 모양이야. 이미 7년이나 지난 일인데 여태 그러는 걸로 봐서 그걸 빌미로 채은비한테 돈이라도 받아내려는 게 아닐까 생각은 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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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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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너도 몸조심해. 혼인신고 발표도 조금 늦추는 게 좋겠다.”

재광은 지헌에게 신중하게 당부했다.

*

김진구의 전화를 받은 후로 은비는 계속 속이 울렁거렸다. 가만히 있어도 헛구역질이 나왔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졌다. 그런 상태로 은비는 은엽을 만나러 나갔다.

길거리에 나오니 호흡이 가빠지는 느낌이었다. 사방 어딘가에서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튀어나와 자신의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공포감에 뻣뻣해진 몸으로 은엽의 회사에 닿았다.

은엽은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은비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은엽은 흘깃 눈짓을 한번 주고는 다시 서류 뭉치를 향해 고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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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기까지 오라고 했어?”

뚱하니 묻는 은비에게 은엽이 서류를 내밀었다. 명함이 붙은 서류였다. 은비도 이름을 알고 있는 광고회사에 다니는 누군가의 명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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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말해뒀어. 면접 봐.”

맥스기획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평판이 좋은 회사였다. 은비가 멍하니 누워 있는 동안 은엽은 은비의 이직 자리를 봐놓은 것이다.

그래도 생판 남보다는 핏줄이 낫구나. 은비도 오빠의 배려에 조금은 울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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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싫어? 싫으면 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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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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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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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서류를 만지작거리며 수줍게 고맙다고 말하는 은비에게 은엽이 대뜸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한 장 한 장, 낯선 남자들의 이력이 담겨 있는 리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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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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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여지는 없어. 거기 있는 남자들 다 만나봐. 좋은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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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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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페이지 그 남자는 오늘 6시야.”

기껏 고마워했더니, 그녀를 회사로 부른 진짜 목적은 선을 보라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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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죄다 40대잖아.”

서류를 모두 훑어본 은비가 기함했다. 그런 은비의 태도에 기가 막히다는 듯 은엽이 쓰게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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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비, 네가 그런 거 가릴 처지야? 널 누가 데려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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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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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정지헌한테 복수하고 싶을 거 아냐. 그러려면 정지헌보다 더 대단한 남자를 만나야지.”

속으로는 분했지만, 은비는 은엽에게 따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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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꼴로 가지 말고 미용실 가서 머리나 좀 정리해. 옷도 단정한 걸로 사 입고.”

은엽은 선심 쓰듯 카드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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