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나비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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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나비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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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나비효과
2022.05.21.
퇴근 후 정오의 집을 찾은 지헌은 생각에 잠겼다.
김진구는 뭐가 대체 얼마나 억울하길래 여태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걸까. 뺑소니 사고로는 1년 형이었고, 그 이후에 더 큰 사고를 쳐서 5년 형을 받았으면서 왜 이제껏 그토록 분노하고 있는 걸까.
‘예상한 형량보다 더 살았다면, 화가 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그 일로 기억까지 잃었는데.
지헌은 김진구의 분노에 절대 공감할 수 없었다.
“아빠, 마음 풀어.”
지헌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예나가 다가와 얼굴을 빤히 관찰하며 말을 걸었다. 지헌은 예나를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뭐라고?”
“아빠가 여기를 이러고 있잖아.”
예나가 지헌의 미간을 손끝으로 꼬집으며 말했다. 심각한 생각을 하는 사이에 미간이 우그러진 모양이었다.
예나가 잠시 꼬집었던 미간을 손끝으로 꾹꾹 눌러 폈다.
“아빠, 마음 풀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을까.
예나야. 아빠는 너 때문에 마음이 풀리다 못해 녹겠어.
초롱초롱한 빛이 머릿속의 어둠을 가만히 밀어낸다.
“그러게. 우리 예나 걱정하지 않게 마음을 풀어야 하는데.”
“…….”
“아빠의 치료의 요정이 거의 사라져서 그런가 봐.”
지헌은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제 팔목을 보여주었다. 지워버리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어린이용 판박이 스티커의 유지력은 길지 않았다. 이제 치료의 요정은 형체만 얼룩덜룩하게 남아 있었다.
예나도 지헌의 팔목을 확인하고는 꽤 심각해졌다.
“어떻게 하지? 내가 스티커 사다가 다시 붙여줄까?”
“응.”
“그럼 아빠가 예나한테 돈을 줘.”
“얼마?”
“이천 원.”
예나의 깜찍한 요구에 마음의 벽이 다 흐무러진 지헌의 반응은 조금 늦었다. 지갑을 열어 그 안을 확인하니 지폐는 몇 장 없었다. 게다가 수표 빼고는 모두 오만 원짜리.
“돈이 없다.”
“아빠는 돈도 없어?”
“어. 그러네. 미안. 아빠가 내일 준비해올게.”
“아니야. 내 저금통에도 돈 있어. 예나 돈 많아.”
“저금통에 얼마나 있는데?”
“한, 일억?”
푸흡. 멀찌감치에서 조용히 지켜 듣고 있던 정오의 웃음이 가장 먼저 터졌다. 아무리 계산이 빠른 아이라도 아직 세어보지 못한 돈에 대해서는 환상이 있는 모양이었다.
모두의 반응에 이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는지 예나는 금방 말을 바꿨다.
“아니, 한 백만 원?”
이번에는 한번 질러놓고는 엄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오가 잠잠히 도리질 치자 예나는 다시 말을 바꿨다.
“한 십만 원. 아무튼 예나가 평생 모아서 돈 되게 많아.”
일억이었던 저금통의 돈은 최종적으로 십만 원이 되었다. 아이에게는 십만 원이나 백만 원이나 일억이나 똑같이 많은 돈이다.
“그러니까 내가 사줄게. 십만 원이면 스티커 오십 개나 살 수 있어.”
“평생 모은 돈을 아빠한테 쓰겠다고? 그래도 되겠어?”
“그럼. 당연하지. 예나는 돈보다 아빠가 소중하니까.”
대답한 예나는 곧장 제 방으로 뛰어가 저금통을 가져왔다. 토끼 저금통에서는 제법 묵직한 소리가 났다. 아이의 일곱 살 평생 모은 돈이 스티커가 되는 소리.
“예나야. 아빠 이제 하나도 안 아프고 마음도 다 풀렸어. 그러니까 치료의 요정은 하나만 있어도 되겠어.”
예나가 토끼의 목을 똑 따버리기 전에 지헌이 냉큼 말했다.
*
뚜르르르. 뚜르르르.
벌써 열 통째,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연달아 통화버튼을 누르던 은비는 침대 위로 휴대폰을 집어던지고서 아아악 소리를 질렀다. 두 눈엔 눈물이 찔끔 맺혔다.
오빠가 말해준 대로 선 자리에 나갔다. 43세의 이혼남이었다. 없는 머리에 흑채를 쏟아부은 건지 고개를 숙일 때마다 까만 가루가 떨어졌다. 은비는 구역질이 나서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이혼남은 은비의 외모에 관심을 보였지만 나이가 서른이라는 말에 조금 찌푸렸다. 서른 살짜리는 처음 만나본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을 만난 것을 자랑스러워하라는 투로 으스대며 제 자산을 읊었다. 집은 몇 채, 건물은 몇 개, 다 합치면 몇천억……. 넘쳐나는 자신감의 원천은 돈이었다.
이혼남은 자신에게 이만큼의 돈이 있으니 알아서 맞춰달라는 식으로 말했다.
은비는 차마 이혼남의 비위를 맞춰주지 못하고 속이 좋지 않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맥스기획을 떠나며, 그녀는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은엽은 돈만 많은 40대의 남자들과 동생의 선 자리를 줄줄이 예약해놓았다. 그중에는 이혼 경력만 두 번 있는 남자도 있었고, 애까지 달린 남자도 있었다.
그런 리스트를 받고 나니 더욱 남자가 그리웠다.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젊고 스마트하고 잘생겼던, 외모만으로는 정지헌과 비교해서도 절대 뒤처지지 않았던 남자.
은비는 자존심을 꾹 누르고 남자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 자기 왜 나한테 연락 안 해?
- 너무 힘든 일이 많아. 죽을 것 같아. 빨리 와서 위로해줘.
*
예나를 재운 후, 정오와 지헌은 밖으로 나왔다. 늦은 밤인데도 공기가 후텁지근했다. 왠지 정오가 지헌의 어깨너머 골목 끝 편의점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지헌은 단단히 일러두었다.
“이정오, 밤에 돌아다니지 마.”
“왜?”
“네가 너무 예뻐서 누가 잡아가겠어.”
“후우.”
“진심이야.”
“그래. 고마워.”
한숨을 쉬던 정오가 영혼 없이 대답했다.
진짠데. 지헌은 김진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가 금세 입을 닫았다. 따로 조사해보기 전에 걱정을 끼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떨떠름하게 지헌을 바라보던 정오가 말했다.
“오빠야말로 조심해.”
괜한 걱정을 하는 지헌과 헤어진 정오는 곧장 편의점으로 갔다. 더운 날씨라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맥주 한 캔만 재빨리 비우고 집에 가서 편히 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편의점 앞에서 의외의 남자와 마주쳤다.
“어? 경사님!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한 정오와는 달리, 배일은 당황스러운 듯 금방 얼굴을 붉혔다. 배일은 편의점 앞에 혼자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미 소주병이 반쯤 비워진 상태였다.
정오는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 한 캔과 함께 냉큼 안줏거리를 사 가지고 나왔다.
“생소주만 드시면 속을 버립니다. 민중의 지팡이는 튼튼하셔야죠.”
“……저 괜찮은데.”
어수룩하게 대답한 배일이 꾸벅 인사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정오는 씨익 웃고는 맥주캔을 땄다. 그녀야말로 안주 없이 맥주만 후딱 마시고 떠나려고 했는데, 술친구가 생겨서 든든했다.
그리고 이웃에게 할 말도 있고.
“경사님, 저 이사 가요.”
“……아.”
이번에도 역시 배일의 반응이 늦었다.
“좋은 일이죠?”
“네. 아이 아빠와 만났거든요.”
“……장기미제사건이 해결된 거군요.”
배일의 조심스런 예측에 정오는 힘껏 끄덕여 보였다.
“어떤 기분이십니까.”
“좋죠. 말로는 다 할 수가 없어요.”
“…….”
“하지만 좋은 만큼 무섭기도 해요.”
“다 잘될 겁니다.”
배일이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로 정오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이정오 씨는 굳센 분이시니 뭐든 다 잘 이겨낼 거고요.”
“제가 굳센지 약해빠졌는지 경사님이 어떻게 아시나요?”
“아이를 그렇게 잘 키우셨으니 짐작할 수 있죠.”
겸손하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도 정오는 기분이 좋았다. 확실히 배일은 민원 상담 스킬이 좋은 남자였다.
자신의 주장에 확신을 보태듯이, 배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예나가 저와 닮았습니다. 저도 아버지가 안 계셨거든요. 세상에 어머니와 저, 둘이었죠.”
“아…….”
“이제는 다르네요. 예나는 아빠를 만났으니까.”
처음 듣는 배일의 개인사에 정오의 입이 벌어졌다. 선해 보이는 그의 눈매가 쓸쓸하게 보였다.
“저요. 저야말로 경사님 처지와 비슷했을 것 같네요. 저도 아빠 없이 자랐거든요.”
정오도 벽을 허물어버리며 개인사를 고백했다.
“그래도 아시죠. 편모 가정도 충분히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거.”
“…….”
“경사님 어머니도 정말 뿌듯하시겠어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이렇게 훤칠하게, 민중의 지팡이로 훌륭하게 자라주어서.”
“그러게요.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
“제가 경찰이 되는 걸 못 보고 돌아가셨어요.”
아아. 다시 한번 정오의 입술이 벌어졌다. 위로해보겠다고 건넨 이야기였는데 배일의 아픈 마음을 건드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정오가 당황스러워하는 것을 알아본 배일이 곧장 사과했다.
“아. 우울한 얘기를 했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경사님.”
머쓱해진 정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맥주를 홀짝였다. 할 말이 없어서 그런지 몇 모금에 맥주캔은 홀딱 비워졌다. 알코올이 속에서 뻗어가니 몸이 따끈해지며 용기가 생겼다.
“경사님,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잖아요. 살아가는 건 괴로움이라고.”
오늘따라 왠지 쓸쓸하고 기운 없어 보이는 우리 민중의 지팡이 권배일 경사님을 격려해줄 용기.
“그러니까 경사님의 나이는, 그 괴로움을 이겨낸 시간인 거거든요. 경사님 스스로에게 박수 쳐주어도 된다고요.”
정오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기운차게 말했다.
“어머니께서도 분명히 자랑스러워하고 계실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그럼요.”
“고맙습니다. 정말로.”
배일이 지그시 미소 지었다. 그의 선한 인상에 도리어 정오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정오의 맥주캔이 비워진 것을 알아본 배일이 말했다.
“먼저 일어나셔도 됩니다. 저는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겠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고민이 있는 것 빼고는 괜찮습니다. 저의 장기미제사건은 아직 끝나질 않아서요.”
“아…… 해결의 조짐도 없고요?”
“저도 앞으로 어떻게 되려나 모르겠네요.”
정오가 언젠가 제 속을 털어놓았듯, 배일 또한 현재의 고민을 전했다.
“나비효과 아시죠. 어느 마을 나비의 미약한 날갯짓이 어느 지역의 태풍이 되어버려서요. 그 태풍이 어떻게 될지에 따라서 태풍 유발자 나비의 운명도 정해질 텐데.”
배일의 심오한 비유에 맹하니 눈을 굴리던 정오가 대뜸 말했다.
“혹시 그거 아세요?”
“…….”
“나비효과에 나오는 나비가 고양이라는 얘기가 있어요. 날개 없는 고양이가 한번 날아보겠다고 용을 쓰니까 온 마을 사람들이 엄청 도와준 거죠. 우리 나비 비행기 태워주려고. 그렇게 비행기를 만들면서 그 마을에서 이산화탄소가 엄청 배출됐거든요. 결국 그게 태풍이 된 거래요.”
정오의 엉뚱하고도 진지한 이야기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귀 기울였던 배일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고민 많은 얼굴. 미소조차도 쓸쓸해 보이던 선한 얼굴에 진짜 웃음을 불러온 정오가 뿌듯하게 함께 웃었다.
“예나 아버님은 정말 좋겠네요. 이정오 씨가 정말 재미있는 분이라.”
“에이, 뭐 이런 걸 가지고.”
“감사했습니다. 이사 잘하시고요.”
“네. 경사님도 언제나 어디서나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정오는 평생의 마지막 인사를 하듯이 배일의 앞날을 축복해주고 떠났다. 배일은 정오가 멀어져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덜터덜. 발걸음은 내내 무거웠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옷자락에 땀방울이 들러붙었다.
아무도 없고, 세간마저 별게 없어 쓸쓸한 집 안에 이르자 집 밖에서 겪은 일들은 더욱 꿈처럼 여겨졌다.
침대 위, 하루 종일 울려대 무음으로 해놓은 휴대폰은 잠잠히 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 자기 왜 나한테 연락 안 해?
- 너무 힘든 일이 많아. 죽을 것 같아. 빨리 와서 위로해줘.
두 건의 문자메시지에 잠시 인상을 구긴 배일은 곧장 삭제 버튼을 누르고서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 한 캔을 꺼냈다.
그 또한 좀 전의 이정오처럼 단숨에 맥주캔을 비웠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더운 바람이 들어왔다. 배일은 그 옆으로 몸을 기댔다.
창문 밖 옆 건물의 4층, 거실 불이 켜졌다가 이내 꺼지는 것이 그의 두 눈에 담겼다. 눈가에도 땀방울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