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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시간여행 (113/183)


113. 시간여행
2022.05.28.


다음 날. 지헌의 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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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헌.”

지헌은 집무실을 방문한 승규가 연거푸 부르는 것을 듣지 못했다. 전날 카운슬러가 전달해준 소식과 뒤이어 확인한 이메일에 생각이 많아졌다.

지헌은 김진구가 사망하기 전에 보낸 이메일을 카운슬러에게도 보여주었다. 카운슬러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관찰 대상자를 이런 식으로 가까이 뒤쫓은 적은 한 번도 없다고도 말했다. 지헌의 의뢰와도 거리가 멀었기에 지헌은 카운슬러의 대답에 금방 수긍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또 다른 집단에서 김진구의 뒤를 쫓았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김진구는 그 추적자가 지헌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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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정지헌.”

복잡한 일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승규가 다시 지헌을 불렀다. 그제야 지헌은 고개를 돌려 승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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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넋이 나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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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안.”

승규가 최면치료 전문가를 알아보았다고 하여 지헌이 먼저 부른 거였다. 그렇게 찾아온 친구를 두고 딴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미안했다.

승규는 흥, 하며 콧방귀를 뀌고는 종이 한 장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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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 연락하면 돼. 대학교 선배가 의전에 가서 정신과 의사가 됐거든. 선배가 아는 최면치료 전문 닥터 중에 제일 상담을 잘하시는 분이래.”

심리학 전공인 승규의 대학 동창 중에는 심리 상담가와 정신과 의사가 적지 않았다. 승규는 그중 가장 능력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을 지헌에게 소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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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가보고 어땠는지 말해줘. 내 체면 생각해서 상담 이어갈 필요는 없고, 네 성향이랑 안 맞으면 언제든 중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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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정말 고맙다.”

지헌은 승규가 내민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최면치료로 과연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까? 김진구가 일으킨 뺑소니 사고까지도 기억해낼 수 있을까?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희망을 걸어본다. 단 몇 분의 기억이라도, 잃어버린 3년의 시간 중 단 몇 분만이라도 더 떠오르는 게 있다면 반가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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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집 계약을 했을 때는 이삿날이 까마득하게 여겨졌었는데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오는 천천히 짐 정리를 시작했다. 포장이사를 한다지만 그전에 버릴 것들은 파악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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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말이야. 여기 이러고 있어도 돼? 짐 안 싸?”

늦은 밤. 예나를 재우고도 웬일로 집에 돌아가지 않고 제 옆에 앉아 있는 지헌에게 정오가 뾰로통하게 물었다.

짐 정리를 도와줄 게 아니면 빨리 가서 쉬지, 왜 야릇한 눈으로 내내 쳐다보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핀잔에도 아랑곳없이 내내 지켜보고 있던 지헌이 입을 연 건 한참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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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야. 할 말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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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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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첫 번째는.”

무거운 주제라는 듯 지헌의 목소리가 좀 전보다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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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에 네가 받은 전화는 어머니가 성우를 고용한 거였어.”

야무지게 입가에 힘을 주고서 지헌을 바라보던 정오의 표정도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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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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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얘기해주셨어. 아버지는 어머니가 채은엽이랑 통화하는 걸 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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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채은엽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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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고용한 성우랑 채은엽이 아는 사이였나 봐. 성우를 통해서 알게 됐대.”

그 사람은 참, 발도 넓다, 정오는 탁한 한탄과 함께 중얼거렸다. 실은 지헌이 걱정스러웠다. 어머니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하니 정오 또한 마음이 아렸다.

지헌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정오의 기분을 먼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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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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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비슷한 일일 거라고 예상은 해서 딱히 놀랍지는 않아. 오빠는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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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마찬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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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마음이 힘들면 언제든지 얘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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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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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해줘서 고마워.”

인사에 반응한 손이 그녀에게로 움직였다.

7년 전에도 그는 정오가 곁에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계속 만져대는 버릇이 있었다. 머리칼이 얼굴을 가리면 머리를 쓸어넘겨주고, 쓸어넘긴 뒤에도 계속 머리를 쓰다듬고. 그 의식 없이 흘러나온 행동들이 정오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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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번째는 뭐야?”

눈빛의 뜨거움이 깊어지기 전에 정오가 얼른 물었다. 지헌도 손을 거두고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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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규가 최면치료를 알아봐줬어. 한번 가볼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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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래.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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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너도 같이 가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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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정오는 흔쾌히 수락했다. 조금은 신이 난 것 같기도 하여 지헌도 걱정을 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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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기억났으면 좋겠다, 오빠.”

정오가 몇 마디 진심을 더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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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금 무섭기도 해. 오빠의 과거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이 힘들었다면, 굳이 기억을 꺼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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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많이 힘들었더라도 다 기억해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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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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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네가 있었잖아.”

후훗. 간지러운 말이었지만 싫지 않은 듯 정오가 흐뭇하게 웃었다. 지헌이 그런 정오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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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과거의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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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있어.”

정오가 냉큼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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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빠 친구들을 하나도 소개시켜주지 않았는지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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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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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박승규 차장님하고 알고 지냈더라면, 우리가 그렇게 헤어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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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알 것 같긴 한데……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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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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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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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나 술 먹는 걸 좀 싫어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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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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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중엔 그나마 괜찮아졌는데 사귀던 초반에는 정말 싫어했었어. 대놓고 화내는 건 아니었지만 둘이서 마시는 것도 안 된다고 했다고.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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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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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있어.”

궁금한 것들은 줄줄이 이어졌다. 이제껏 이것들을 꾹 참고 어떻게 지냈을까 싶을 만큼 그녀는 신이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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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임신하지 않았어도 오빠가 나랑 결혼하려고 했을까? 우리가 오래오래 사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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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지금 대답해줄까?”

그녀의 순도 높은 질문에 지헌이 입을 열었다. 이 질문만은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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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다시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여태 순결한 줄 알았어. 언젠가는 마법사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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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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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때가 아니었더라도 결혼했을 거야. 그럼 지금의 예나보다 조금 더 어린 꼬맹이가 하나 생겼겠지.”

세상에 이정오는 하나뿐이라, 네가 없었다면 나는 내내 혼자였을 거야.

*

다음 날, 지헌과 정오는 오전 근무만 하고 회사를 나와 상담클리닉을 찾았다.

특수진료 케이스라 지헌보다 정오가 먼저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가 내담자의 배우자와 먼저 대화하여 내담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최면 방향에 대한 힌트를 얻기 위해서였다.

의사는 선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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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정오 씨. 정지헌 씨의 배우자님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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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7년 전에 연인 사이였고요.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나서 이번에 혼인신고를 했어요. 일곱 살짜리 딸이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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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헌 씨와 이정오 씨, 두분의 따님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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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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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은 운명인 것 같네요.”

의사는 정오가 부담 없이 편안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나긋하게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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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났을 때, 처음 정지헌 씨 이미지는 어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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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상사로 다시 만났는데, 초반에는 많이 날카로웠어요. 저한테 특히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예민하게 굴면서도 다정한 면이 있었어요. 따로 불러서 안부를 묻거나, 어려운 회식 자리에 따라가 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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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신경 썼다는 말씀이시죠? 기억이 없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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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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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헌 씨가 7년 전과 똑같은 행동을 하거나, 어떤 기억을 붙잡고 있는 것 같다, 하는 느낌이 들 때는 없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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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킨십 문제인데…… 스킨십 하는 방식이 똑같은 건 조금 놀라웠어요. 그 외에는…… 아! 제가 예전에 살았던 원룸이 있거든요. 그 앞에서 마주친 적이 있어요. 지헌 씨도 정처 없이 걷다가 거기 온 것 같았어요. 그리고 지헌 씨 사는 집에 제 원룸과 비슷한 인테리어로 꾸며놓은 방이 있어요. 막연히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미지가 있는데 그 기억이 왠지 좋아서 그런 식으로 방을 꾸며봤다고 했었어요. 그 방 사진이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정오는 휴대폰을 꺼내 지헌의 맨 끝 방 사진을 찾았다. 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구석구석을 확인해본 의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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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저한테도 전송해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의사는 그 외에도 사고가 났던 날과 그 전날의 일이라든가, 7년 전 지헌에게 있었던 일, 그때의 인상 등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파악했다. 꽤 길었던 상담이 끝나고 정오는 진료실에서 나왔다. 이제 지헌의 차례가 되었다.

지헌은 좀더 편안한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지헌이 방으로 들어간 후에 정오는 지헌의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지헌의 상태를 유리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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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기분은 어떠신가요?”

의사의 안내에 따라 의자에 몸을 기댄 지헌이 대답했다. 조금은 경직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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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진 않고, 조금 긴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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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좀 풀죠. 가볍게 움직여서 이곳저곳 굳은 데를 풀어주시고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해 주세요.”

의사는 지헌이 긴장을 풀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지시했다. 얼마 후에 지헌의 몸이 조금 더 편안해지자 의사는 방의 온도, 방의 느낌, 의사의 인상, 의사의 목소리 등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어 차츰 친밀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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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힘이 풀릴 겁니다. 편안하게.”

이윽고 지헌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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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헌 님의 배우자가 가까이 있어요.”

편안하게. 편안하게. 지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에 집중하며, 의사가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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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손을 펴서 손바닥을 보여주세요.”

지헌은 손을 느리게 폈다. 그 아무것도 아닌 움직임이 조금 힘겨워 보였다. 내면의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눈은 뜨지 않았다. 손을 움직일 수 있다뿐이지 수면 상태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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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주 오래전으로 시간여행을 해볼 겁니다.”

의사의 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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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옆에는 누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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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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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아는 친구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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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수, 조수영, 이재정, 정성록, 이춘구 ……채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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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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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련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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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후련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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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던 입시가 끝났고…… 독립하기로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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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독립하고 싶었던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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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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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집에 가볼까요? 집은 언제나 변함이 없어요. 그렇죠?”

의사는 점점 과거에 접근해갔다.

지헌은 눈꺼풀 안쪽에서 눈을 굴리며 묵묵하게 있다가 의사가 묻는 말에만 짧게 대답했다. 그다지 괴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긴 시간 끝에 의사도 7년 전의 기억에 대한 접근을 시도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의사가 정오에게서 넘겨받은 사진을 묘사하며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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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좀 더 최근으로 갈게요. 나는 방 한가운데에 있어요. 아주 작은 방이고 파스텔톤의 침대가 있고 그 옆으로 나무색 책상이 있고 책상보다 작은 냉장고가 있어요. ……여자친구의 원룸이에요.”

여자친구의 원룸이라는 말에 지헌의 손끝이 흠칫 움직였다. 편안히 풀어졌던 표정에도 딱딱한 인상이 잡혔다. 잃어버린 기억과 잃지 않은 기억은 반응부터가 달랐다.

꽉 붙이고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입술 사이로 탁한 한숨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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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책상 서랍을 열면 임신 테스트기가 하나 있어요.”

꿈속인가 싶은.

바늘구멍만 한 시야에 흐릿하게 임신 테스트기가 보였다. 지헌은 미간을 한껏 구겼다. 짤막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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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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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고요?”

그 순간.

우우욱.

휘청거리며 허리를 세운 지헌은 외마디 구역질 소리를 내며 몸을 숙였다.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듯한 느낌에 토기까지 불쑥 올라왔다.

우우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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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헌 씨.”

맞은편 방에서 지헌을 지켜보고 있던 정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사도 가까이 다가와 지헌의 등을 쓸었다.

가까스로 토기를 가라앉혔으나 두통이 밀려왔다. 호흡도 꽉 막힌 느낌이었다. 살을 베어가는 것만 같은 오한이 느껴졌다.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와 등을 새우처럼 말고는 두 팔을 꽉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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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헌 씨, 괜찮아요. 천천히 호흡하세요. 후우우우, 후우우우.”

의사가 진정시키고자 하였으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분명히 눈을 뜨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눈을 막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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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야.”

간신히,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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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오.”

숨이 끊어질 듯 애절한 목소리에 의사가 급하게 맞은편 방문을 열었다. 정오가 뛰어와 지헌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지헌은 낭떠러지에서 움켜쥘 것을 발견한 듯 허겁지겁 정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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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으. 흐으으.

호흡을 정리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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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헌 씨?”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의사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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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최면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으십니까?”

침착한 목소리였으나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 얼핏 보였다.

지헌의 눈이 크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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