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우리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2022.06.01.
지헌은 의사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숨만 헐떡였다.
“정지헌 씨.”
의사가 다시 지헌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지헌은 흠칫 움츠리며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그저 정오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를 놓치면 금세 어딘가로 추락해버리기라도 할 듯이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었다. 극도의 최면거부반응이었다. 기억을 되살리는 게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접근조차 불가한 상태. 지헌의 격한 반응에 정오 또한 얼음이 되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가 더욱 꽉 붙잡았다.
“가지 마.”
“…….”
“여기 있어.”
정오가 망설이며 의사를 바라보니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헌을 진정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정오는 어쩔 수 없이 지헌에게 붙잡혀 가만히 서 있었다. 오래 기다린 끝에 호흡이 차분해지고 그녀를 붙잡은 완력도 느슨해졌다. 정오는 조심스럽게 지헌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에도 지헌은 정오를 붙잡으려는 듯, 눈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손끝이 연결된 것처럼 그녀에게로 손을 움직였다. 정오는 그 손을 맞잡았다. 온기가 전혀 없는 손이었다.
“오빠, 괜찮아?”
정오는 다리를 굽혀 그의 앞에 앉았다. 창백한 안색으로, 정오의 어깨너머를 응시하고 있던 지헌이 차츰 눈을 맞추어갔다.
“이만할까요, 아니면 조금 더 해보시겠어요?”
의사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헌이 대답하지 않아 정오가 다시 물었다.
“오늘은 그만할까?”
“……어.”
지헌이 꽉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후에도 한참 지나서야 지헌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은 말없이, 입술을 꾹 닫은 채로 의사에게 꾸벅 인사하고서 먼저 상담실을 떠났다. 바다에 빠져 물 먹은 옷을 입고서 걷는 것처럼 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정오도 의사에게 인사했다.
“선생님, 오늘은 이만 갈게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따가 잠깐 통화하죠. 일단은 환자분 마음의 안정이 중요할 것 같네요.”
정지헌 씨, 라는 호칭은 어느새 환자분이 되었다. 지헌의 상태가 걱정스러워 정오는 의사와 더 얘기를 나누지 못하고 서둘러 문을 나섰다. 상담실을 나온 지헌은 슈트 재킷을 챙겨입고서 주머니를 뒤졌다.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운전기사에게 연락해야 했다. 재킷 주머니에 휴대폰이 있었다. 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낸 순간 뒤에서 정오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딱히 놀란 것도 아닌데 손가락의 힘이 쑥 빠져나갔다. 투욱.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다시 굳어 있는 것을 보고 냉큼 달려온 정오가 휴대폰을 주워 주었다.
“기사님한테 연락해야 하지? 내가 할게.”
지헌은 정오가 침착하게 전화를 거는 모습을 먹먹히 지켜보았다. 대체 왜. 왜 눈앞의 그녀를 또다시 잃어버릴 것만 같은 섬뜩한 기분일까. 왜 밑도 끝도 없이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드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 불쾌했다. 지헌은 정오의 손에 이끌려 1층으로 내려갔다. 운전기사가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회사로 가시는 거죠?”
“네.”
운전기사의 물음에 정오가 답했다. 차가 움직인 후 한참이 지나고서야 지헌이 목소리를 내었다.
“기사님.”
“네. 이사님.”
“집으로 가죠.”
“아파트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운전기사가 방향을 틀었다. 지헌의 결정에 정오는 고개를 돌려 지헌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오의 손을 굳게 잡은 채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가 지그시 눈을 감고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기 힘들 정도로 많이 안 좋구나. 정오도 속이 상했다. 최면 치료를 지헌에게 권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아파트에 도착하여, 두 사람은 함께 차에서 내렸다. 지헌은 차에서 내릴 때도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도 정오의 손을 꼭 잡고서 놓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 때도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현관문이 열린 후엔 정오가 더 앞서 움직였다.
“오빠 어제 얼마나 잤어?”
“그냥 적당히.”
“적당히 얼마나?”
물음이 이어지는 사이에 두 사람은 침실에 닿았다. 정오가 잡혀 있던 손을 먼저 뺐다. 상담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지헌의 텅 빈 손이 정오를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정오는 침대를 정리하느라 알아보지 못했다.
“일단 누워. 쉬어야겠어.”
정오는 지헌의 팔을 잡아끌어 억지로 침대에 앉혔다. 다리를 침대 위로 올려주고 셔츠 단추를 끌러주고. 정오가 손을 써주는 동안 지헌은 이발소의 손님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지헌의 셔츠 단추를 다 풀어내어 옷을 벗긴 정오가 젖혀두었던 이불을 끌어왔다.
“잠이 안 오더라도 좀 누워 있어 봐. 나는 물…….”
홱. 털썩. 그저 물을 가지러 간다는 말을 하려던 거였는데. 억센 손아귀가 그녀를 붙잡았다. 정오는 단숨에 침대 위로 끌려갔다.
“어딜 가려고.”
“아니, 그냥 물 가지러…….”
“너도 여기 있어.”
지헌은 정오의 허리를 붙잡아 더 바짝 앞으로 끌어당겼다. 슬쩍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다시 고이 쓸어 넘겨주며 손이 미끄러지는 방향으로 눈길을 흘려보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기도 했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기도 해서 정오는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사이에 스륵, 그가 다시 허리를 잡아당겼다.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정오는 허공에서 수영을 하듯 팔을 버둥거리며 아래로 다시 끌려갔다. 상체가 뒤로 밀려나며 등이 침대 시트에 내려앉았다. 그를 눕히려 했는데 그녀가 먼저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그 위로, 셔츠를 벗겨내 맨몸이 된 남자가 다부진 그늘을 드리웠다. 좀 전까지만 해도 갈기 잃은 수사자처럼 힘이 쭉 빠진 눈빛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또 살아나 이글이글한 열기를 내뿜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간극이 혼란스러워 그녀의 입술 사이로 눈 내리는 날의 입김 같은 한숨이 포옥 터졌다. 당신은 쉬어야 하는데. 하지만 권고를 해주기 전에 눈물부터 나올 것 같았다. 그가 가진 묵직한 뜨거움이 그녀에게도 전해졌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녀는 할 말을 잃고서 뻐끔거렸다. 그녀의 멍하니 벌어진 입을 신호로 받아들인 듯 갈라진 숨소리와 함께 입술이 내려앉았다. 제 스스로 숨을 얽어놓고도 인공호흡을 갈구하는 것처럼 급한 호흡이었다. 숨결이 뭉개지는 순간에도 가쁘게 움직이는 손이 그녀가 했던 짓을 되갚아주듯 많은 단추들을 풀어냈다. 임무를 완수한 손이 떠난 후, 다시 상체를 일으킨 그가 입을 열었다.
“너도 알다시피.”
“…….”
“하고 싶은 게 아니고, 할 건데.”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말은 거기서 끊겼다. 그의 음성이 막연했음에도 정오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왜 여전히 그가 무언가를 잃은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여태 최면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우는 법을 알지 못해 울음을 가둬놓은 산짐승 같았다. 그러면서도 다분히 태연한 태도. 그 모순된 모습에 그녀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정오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짐승을 처음 마주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요구를 했지만 내심 허락은 받고 싶었던 능청스런 마음이 고요히 안도했다. 미약하게나마 미소를 되찾은 지헌이 열이 오른 상체를 다시 내렸다. 커튼에 걸러져 흐트러지며 들어온 빛이 그녀의 곡선에 스며들었다. 그녀의 하얀 피부에 발긋한 흔적이 내려앉으면 함께 피어나는 죄책감 한가운데에 벅찬 희열이 일었다. 지헌은 빛을 손에 쥐지 못해 애가 끓는 남자처럼 그녀를 탐했다. 한순간 자신을 잡아 누르는 듯한 만족감이 또 그다음 순간엔 미칠 것 같은 갈증이 되었다. 정오는 우악스럽게 밀어붙이는, 조금은 버거운 무게를 감싸 안았다. 그를 걱정해야 하는 시간이었는데 그녀의 눈앞이 팽그르르 돌았다. 이따금 튀어나오는, 7년 전에도 미처 몰랐던 그의 낯선 모습들이 벅차고 무서웠지만 그래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이정오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를 안아주었다. 그가 ‘정오야’ 하고 부를 때, 그녀의 눈꺼풀 안쪽이 뜨겁게 습해졌다. 정오야. 정오야. 나는 분명 너에게 감추고 있는 마음이 있었을 거야. 네가 아이를 가졌다고 했을 때, 나는 너를 걱정하면서도 아마 몰래 기뻐했을 거야. 너를 드디어 내 옆에 묶어둘 수 있게 되었다고. 부끄러운 이기심이었다. 그녀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마음. 하지만 여전히 지헌은 그녀를 더 잡아두고 싶고 더 차지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을 갖고 있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는 갈증이 났다. 이를 제어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알게 되더라도 영원히 모르고 싶었다. 이미 제 옆에 있는 사람을 더 어쩌지 못해서 속이 타들어가는, 어쩌면 그 마음은 사랑보다 더 지독한 중독이었다.
* 승규는 지헌과 정오가 상담센터를 떠났다는 소식에 회사 1층으로 내려와 기다리다가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채은엽이었다. 채은엽의 로펌은 얼마 전에 맥스기획과 인연을 끊었는데 왜 녀석이 여태 여기서 어슬렁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 채은엽이 한 걸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다. 박승규.”
오랜만이었지만 껄렁한 태도는 똑같았다. 승규는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네가 여길 왜 어슬렁거려.”
“여기 뭐 네 회사만 있는 줄 알아?”
“…….”
“그렇게 협소한 사고로 어떻게 일하냐.”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 여러 회사가 한 건물에 있으니 정말로 다른 회사를 찾아 왔을 수도 있다. 승규는 은엽을 로비에서 내쫓지 못하는 것을 속으로 분개하며 돌아섰다. 지헌이 운전기사를 대동하여 떠났으니 1층 로비로 나타날 텐데. 그때 부디 은엽과 마주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몇 걸음 옮긴 승규의 등 뒤에서 은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기생충 같은 자식.”
“뭐?”
“뭐 그렇게 발끈하고 그래. 그런 말 생전 처음 들은 것처럼.”
반응을 보인 승규가 다시 다가갔다.
“박승규. 너도 결국 정지헌의 돈 때문에 접근한 거잖아. 정지헌이 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아?”
은엽이 비릿한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어갔다.
“정지헌이랑 군대에서 얼마나 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지헌은 기억도 못 하지. 네가 작정하고 병원에 찾아와서 친한 척한 건지 아닌지 알 게 뭐야. 그렇게 결국 세련그룹에서 돈 타 먹는 기생충이 돼가지고 정지헌을 7년이나 우려먹었으면서 참된 우정인 척하는 게 웃기지도 않아.”
승규는 분에 못 이겨 은엽의 앞섶을 붙잡았다. 은엽은 어서 때려보라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것이 녀석의 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승규는 인상을 구기며 손을 놓았다. * 얕은 잠을 자는 건지 지헌의 눈꺼풀이 떨려오고 있었다. 꿈속에서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왠지 그가 악몽을 꾸는 것 같아 걱정되었다. 당신이 악몽을 꾼다면 깨워주어야 할까? 아니, 그것도 당신의 소중한 휴식이니 그대로 두어야 하나? 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많은 고민이 따라붙는다. 정오는 오늘 그녀가 상담실에서 보았던 그의 또 다른 모습을 떠올리며 시름에 잠겼다. 당신의 심연에는 나를 사랑했던 기억뿐 아니라 나를 떠났던 고통까지 새겨져 있는 게 아닐까? 한참을 지켜보다가 몸을 일으킨 정오는 거실로 나와 의사에게 연락했다. 의사는 진지한 목소리로 소견을 전했다.
[7년 전의 사고에 대한 트라우마가 상당한 것 같습니다. 그때의 충격이 사고를 꽉 막고 있는 게 아닐까 하네요.]
“…….”
[과거의 일에 대해 반응을 보인다는 것 자체로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기억을 이끌어내기 전에 치료가 먼저이지 않을까 하는데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이 이렇게 고통스럽다면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도 같아요.”
정오도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이대로는 많이 힘들겠죠. 하지만 제가 아니더라도 치료는 꼭 필요합니다.]
“…….”
[그래도 이정오 씨를 많이 의지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계속 지지해주세요.]
“제가……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옆에서 말을 많이 걸어주세요. 많이 웃게 해주시고 편안하게 해주시고. 이정오 씨의 솔직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도 좋겠네요. 우선은 그것만으로도 정지헌 씨에게는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겁니다.]
의사는 친절하게, 지금 정오와 지헌에게 필요한 조언을 일러두고는 전화를 끊었다. 정오는 통화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왔다. 그새 지헌은 잠에서 깨어나 침대에 앉아 있었다. 조금은 불안해 보이던 눈동자가 정오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안정되었다.
“왜 일어났어. 더 자.”
“너도 이리 와.”
정오가 침대에 걸터앉자 지헌은 다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안 돼. 예나한테 가야 해서.”
“아, 그렇지.”
“아니야. 오빠는 누워 있어도 돼.”
그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어나려 하기에, 정오는 저지했다.
“너무 고생했잖아.”
오늘은 이만 쉬었으면 했다.
“정지헌 씨.”
“…….”
“사랑해.”
고요한 가운데 느닷없이 들려온 고백에 지헌은 멍해졌다. 심장이 욱신거린다고 해야 할까. ……이게 이런 느낌이구나. 그녀가 먼저 사랑한다 말해준 건 처음이었다.
“다시 말해봐.”
“사랑해.”
“……또.”
“사랑해.”
그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는 듯, 그녀는 고백을 이어나갔다. 몸속 군데군데 끼어 있던 그을음이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은 청량한 고백이었다. 지헌은 그녀의 허리를 억세게 붙잡았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이런 느낌이었구나. 이런 고마운 느낌이었구나.
“다시 해봐.”
“사랑해. 오빠.”
그녀의 고백마다 나를 사랑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덧붙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헌은 긴장감을 가득 안고, 그가 원하는 것만을 취했다.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보답하지 않아도 원래 그의 것인 양 돌아오는 사랑이 너무도 신기했다. 나는 아직 꿈속인 걸까? 그대가 내 옆에 있는 게 여전히 꿈만 같다. 정오야.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우리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이번에는 내가 그대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더 이상 잊고 싶지 않아. 이젠 내가 그대를 기억하게 해줘. 내가 그대에게 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