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이제 울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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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이제 울지 마
2022.06.04.
은비는 다시 오빠의 회사를 찾아갔다. 김진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도 어쩐지 주변을 둘러보며 불안해하게 되었다. 울렁거리는 속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은엽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은엽이 얼굴을 구겼다.
“여기가 네 놀이터야?”
소리를 빽 지른 은엽은 짜증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생이 직접 찾아온 김에 타박을 덧붙였다.
“내가 그 자리 마련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 자리를 그렇게 망쳐 놓으면 어쩌라는 거야.”
은비가 중간에 뛰쳐나가버린 맞선 자리를 두고 하는 얘기였다.
“속이 안 좋았어.”
“약 먹고 버텼어야지. 그게 어떤 자리인 줄이나 알아? 너는 이제 그 사람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
“오빠. 김진구가 죽었대.”
은비는 은엽의 잔소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경찰에게서 들은 것을 털어놓았다.
잔뜩 구겨져 있던 은엽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10분은 잔소리를 할 것 같더니, 아예 목소리가 사라졌다. 은비는 그런 반응이 더 섬뜩했다.
“……오빠도 알아?”
“넌 어떻게 알았는데.”
“경찰에서 전화가 왔어. 김진구 수첩에 내 연락처가 적혀 있어서 연락했대.”
“…….”
“나 무서워. ……혹시 오빠가 그런 거 아니지?”
“헛소리할 거면 나가. 손님 오기로 했어.”
“그럼 대답해. 오빠랑 연관된 거 정말 아니야?”
은비의 질문과 동시에 끼익, 문이 열렸다.
“……채 변호사님?”
중년의 남자가 얼굴을 내밀고서 은엽을 찾았다. 은비를 향해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은엽의 얼굴이 반드르르하게 펴졌다. 은엽은 몸을 깍듯하게 세우며 슈트 재킷의 단추를 잠갔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고개를 돌린 은비는 흠칫 놀랐다. 오빠가 건넨 종이뭉치에 사진이 있던 남자였다. 사진보다 더욱 흰머리가 성성했지만.
“은비, 인사해. 대근물산 함대근 대표님이셔.”
은엽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여긴 제 동생 채은비입니다. 아주 유능한 카피라이터고요.”
“오. 그렇군요.”
남자가 이를 드러내고서 미소 지었다. 입을 벌리니 금니 여러 개가 번쩍거렸다. 은비는 겁이 나 더 머무를 수가 없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은비가 도망치듯 떠나는 모습을, 함대근은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
“동생분이 아주 미인이시네요.”
“제 자랑입니다. 누구한테 소개시키기도 아까워서 꽁꽁 감추고 있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조만간 다시 만나시겠네요. 제 동생 잘 부탁드립니다.”
“허허. 제가 잘 부탁드리죠.”
대근은 머쓱한 듯 뒷머리를 만지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변호사의 사무실을 직접 방문한 건 처음이었다. 책장을 꽉 채운 책들은 법 관련 서적뿐은 아니었다. 가장 아랫단의 책장을 살핀 대근이 물었다.
“변호사님은 최면술에도 관심 있으신가 보네요?”
“변호사들은 사람을 설득해야 하죠. 설득의 기술은 사실 최면이나 똑같습니다.”
“하긴. 맞는 말씀이네요.”
대근이 끄덕이는 것을 보며 은엽은 정제된 미소를 지었다.
***
9년 전. 은엽은 정지헌의 입대 소식을 들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인생을 사는 것도 설렁설렁, 그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고 결벽증까지 있는 녀석이 대뜸 군대를 간다고 하여 은엽은 속으로 비웃었다.
은엽의 아버지는 동반 입대를 권유했지만 은엽은 그러고 싶진 않았다. 정지헌은 이용해먹기 가장 좋은 친구였지만 군대까지 따라갈 만큼 소중하진 않았다.
또한, 군대에 가더라도 정지헌은 2개월쯤 지나면 못 버티고 돌아올 거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은엽의 예상과 달리 지헌은 군대 생활을 잘해냈다. 제대 후에는 조금 달라졌다. 지헌의 옆에는 새 친구가 생겼다.
은엽도 아는 녀석이었다. 박승규.
박승규와는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한 번 같은 반이었던 적도 있었다.
은엽은 박승규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박승규는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평범한 녀석이었다. 공부는 그럭저럭 했지만 그렇다고 은엽처럼 특출나지도 않았다.
뭐 하나 빼먹을 게 없는 녀석이라 은엽은 내내 무시해왔는데, 그런 녀석이 정지헌에게 들러붙은 것이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동기, 그리고 군대의 선후임이라는 명목으로.
박승규 녀석이 정지헌을 어찌나 잘 구워삶았는지, 정지헌은 은엽에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표정을 박승규에게 보여주었다.
언제나 자신에게는 냉랭하게 대꾸하며 철벽을 치던 녀석이 박승규 놈에게는 진짜 친구처럼 먼저 말을 걸기도 하고 놈의 농담에 진심으로 웃기도 했다. 듣자 하니 박승규의 추천으로 홀로 해외 배낭여행을 다녀왔다고도 들었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동반 입대를 하지 않은 게 후회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뒤로 은엽은 지헌의 마음을 돌려 친구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관계의 기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 등 친목과 설득과 화술에 대한 자기계발류의 책들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은엽은 정말로 진심이었다. 변호사 시험에 붙은 후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지헌의 사적 모임 정보를 알아내어 따라가려고 애썼다.
그 어느 날은 지헌이 고등학교 동기 모임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한 날이었다.
은엽이 뒤늦게 술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창이었다. 지헌은 술을 꽤 마신 듯 얼굴이 붉어져 있었고 승규는 그런 지헌을 가지고 놀려댔다. 휴대폰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누르고서.
“정지헌. 대체 무슨 일인데.”
“그만해.”
“아니 술만 마시지 말고 말을 좀 해봐. 왜 기분이 좋아. 의심스럽게.”
“그만 좀 찍어어.”
지헌은 카메라를 들이대는 승규에게 그만하라고 하면서도 내내 미소 지었다.
은엽은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 아니 상상해본 적도 없는 모습이었다. 언젠가 은엽이 같이 사진 좀 찍자고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는 정색하며 손으로 렌즈를 막았었다. 그랬던 정지헌이.
은엽은 승규의 휴대폰을 빼앗아 녹화 정지 버튼을 눌렀다.
“지헌이가 하지 말라잖아.”
은엽의 저지에 술집 안의 공기가 잠시 싸해졌다. 승규는 머쓱하게 은엽에게서 다시 휴대폰을 넘겨받았고, 지헌은 그런 승규를 보며 풉 웃었다.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는 그 잠깐의 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은엽은 다른 친구들의 틈을 파고들어 지헌의 앞에 앉았다.
“정지헌, 진짜 오랜만이다. 너 왜 그렇게 바빠.”
“네가 바쁜 거지. 변호사 됐다며. 축하해.”
지헌이 은엽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지헌의 음성에 이어 여기저기에서 덩달아 축하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으스댈 수 있는 상황은 기분 좋지만 오늘 은엽의 목적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은엽은 별 볼 일 없는 친구들의 축하를 겸손하게 물리치고 지헌에게 말을 걸었다.
“호주여행 다녀왔다며. 재미있었어?”
“응.”
“정말 요즘 표정이 많이 밝아진 것 같네. 여친이라도 생긴 거야?”
그저, 그간의 벌어진 거리를 메우기 위해 꺼낸 이야기였는데 지헌은 짧은 대답도 꺼내지 않았다.
뜸을 들이는 것인지 아니면 은엽의 질문을 무시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은엽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꽈악 쥐고서 지헌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니.”
대답은 아주 늦게 흘러나왔다. 은엽은 곧장 끄덕이고는 둘만 알 만한 화제를 꺼냈다.
“아버지 많이 바쁘시지? 베트남 진출 사업이 잘되고 있다며. 우리 아버지가 아는 분을 연결해줬다고 하시더라.”
그런데, 그 와중에 박승규가 끼어들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너만 아는 얘기를 꺼내냐.”
승규는 지헌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은엽을 바라보았다. 눈치가 없는 놈이라 그런지 악의가 없어 보이는데도 천성적인 얄미움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지헌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규가 가게 앞까지 내다보겠다며 함께 일어났다. 물론 은엽도 따라나섰다.
아무 일 없이, 또 내일 만날 것처럼 승규와 지헌이 인사를 나누니 은엽은 조바심이 일었다. 지헌이 떠난 후 은엽은 승규를 향해 빈정거렸다.
“인생 폈다. 그치?”
“뭔 소리여.”
승규가 대꾸했다.
“뻔한 거 아니야? 네 후임으로 들어온 동창이 없는 집 자식이었어도 네가 그렇게 챙겼겠어? 다 계산이 있어서겠지.”
은엽이 콕 집어 짚어주자 승규가 눈을 뚱하게 뜨고서 쳐다보았다.
“군대에서 후임으로 정지헌을 만났으니. 전생에 뭐 하나 구하셨나 봐. 봉 한번 거하게 잡았네.”
“채은엽. 넌 친구가 봉으로 보이냐?”
술이 꽤 취해 붉어진 눈, 흐릿한 시선으로 승규가 물었다.
“내가 너랑 그다지 친하진 않아서 지헌이한테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공격, 그런 사고, 진짜 저질이다. ”
“…….”
“내가 지헌이랑 친해 보여서 질투하는 거라면 그래도 이해할 만하다만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라. 있는 정도 떨어지겠어.”
술에 그만큼 취했으면 감정이 격해질 만도 한데, 승규는 손찌검 한번 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리로 돌아가 친구들과 유치한 농담을 하며 웃었다.
휩쓸려가지 않는 태도. 이성적이면서도 계산이 없는 행동.
너무 제대로 된 친구였다. 정지헌의 옆에 있어서는 안 되는, 너무나도 바르고 밝은 녀석.
정지헌은, 그 집안은 내 것이어야 하는데 이미 내 머릿속에는 정지헌을 주물러 삶는 10년의 계획이 짜여 있는데. 은엽은 마음이 급해졌다.
마음은 불안했지만 은엽도 일에 치여 지헌과 자주 연락을 할 수는 없었다. 지헌이 연락을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러 미국에 유학을 간 동생 채은비에게서 연락이 왔다. 은비는 지헌이 다니는 K대 편입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은엽은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지헌을 좋아했다. K대 편입을 준비한 것도 지헌과의 접점을 갖기 위한 것이리라.
은엽은 지헌의 오피스텔에 은비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뜻밖의 우연으로 은비가 지헌의 사고를 목격하여 드라마틱한 만남이 성사되었다. 하늘이 도왔다고밖에 할 수 없는 좋은 기회였다.
지헌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VIP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은비와 은엽과 승규는 부지런히 병실을 오갔다.
오가는 와중에 은엽은 지헌의 곁에 붙어 있는 뇌파활성감시장치를 유심히 관찰했다. 지헌의 뇌파를 모니터링하며 은엽은 지헌이 긴 잠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현듯 어떤 사기꾼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말이 생각났다.
[최면은 누구나 걸 수 있습니다. 자기 암시든, 사람을 홀리는 화술이든, 결국은 최면술이라고 할 수 있죠.]
은엽은 닥치는 대로 논문을 읽고 전문서적을 탐독했다. 직접 전문가를 찾아가 염탐하여 스킬을 익히고 술집에서 만난 여자에게 배운 것을 써먹어보기도 했다.
스스로도 놀라웠다. 최면이란 게 이렇게 쉬운 줄은. 약한 사람들이 어떻게 종교나 다단계 사기에 빠지게 되는지, 그 과정까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엽은 매일같이 지헌의 병실을 찾았다. 사실 처음에는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밑져야 본전이니 해보자 하는 마인드로 접근했다. 하지만 점점 스킬이 붙을수록 미래를 기대해보게 되었다.
“지헌아, 내가 구해줄게.”
아무도 없는 병실. 은엽은 지헌의 손을 잡고서 느릿하게 말을 건넸다.
“내가 치료해줄게. 날 믿어. 이제 편해질 거야.”
귓가에 대고서, 은밀하게.
“이제 아픔이 사라지고 몸이 편안해질 거야.”
지헌의 손끝이 꿈틀 움직이는 느낌이 들 때마다 은엽의 심장도 미친 듯이 두근댔다.
“가까운 기억부터 하나하나 없애버려. 성냥에 불을 켜서 뇌를 태우듯이. 성냥불이 지나간 자리에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질 거야. 여행을 다녀온 기억, 군대를 다녀온 기억, 새로운 사람을 만난 기억. 모든 기억에 불을 붙여. ……내게 필요 없는 기억이니까. 쓸데없는 기억이니까.”
지금 내가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걸려든다면, 아주 굉장한 것을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동안 내게 쓸모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 속으로 계속 되뇌어야 해. 모조리 다 태워버려야 해.”
조근조근 지헌의 귓가에 음성을 흘려보내던 은엽은 흠칫 상체를 바로 세웠다.
병실 문이 슬쩍 열려 있었다.
문이 왜 열려있지? 분명히 닫았는데.
은엽은 의아하게 여기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닫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스물여섯, 스물다섯, 스물넷……. 시간이 전부 사라진 거야. 모든 기억을 지워버려.”
지헌이 깊게 인상을 썼다.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광기에 가깝도록 광채를 띤 은엽의 눈이 탐욕스럽게 번뜩였다. 독한 술이라도 들이킨 것처럼, 몸속의 뜨거운 피가 빠르게 도는 기분이었다.
“이제 나는 텅 비었다. 눈을 뜨면 나는 아무것도 몰라. 그냥 정지헌이야. 집안에서 정해준 인생을 사는 속 편한 정지헌.”
희열을 주체할 수가 없어 목소리까지 떨려왔다.
점잖게 얘기하느라 꽤 진땀을 뺐다.
“새 인생을 시작하기 딱 좋은 나이 어디쯤. 잃어버린 것에 미련 따위 없는 편한 인생.”
정지헌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히는 것이 보였다.
네 탓이지. 정지헌.
네가 조금만 나를 덜 무시했어도 내가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 울지 마. 지헌아. 내가 도와줄게.”
은엽은 그 눈물을 휴지로 꾹꾹 눌러주었다.
“그러니 내 말을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