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아저씨는 널 기억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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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아저씨는 널 기억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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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아저씨는 널 기억할 거야
2022.06.08.
정오는 지헌의 손을 잡고 집에서 나왔다.
최면 상담실에서 자신을 필사적으로 부여잡던 억센 손에는 온기가 전혀 없었는데, 이제 따뜻함이 돌아왔다. 정오는 그것에 안도했지만 그가 손수 운전을 한다고 하여 다시 걱정스러워졌다.
“정말 운전해도 괜찮겠어?”
“그럼.”
지헌은 가뿐하게 대답했다. 그의 상태는 금방 회복되었다. 정오가 옆에 있기 때문이라는 걸 지헌은 잘 알고 있었다.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더 제대로 원기를 회복했을 테지만…….”
헉.
아파트 주차장.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정오는 급하게 지헌의 입을 막았다. 약해진 마음에 제멋대로 하게 놔뒀더니 입이 방정이었다.
“으악!”
그러나 그 손은 금방 떨어졌다. 입술 사이로 벌름 나온 지헌의 혀끝이 정오의 손바닥을 핥아버린 것이다.
“야!”
정오는 빽 소리치며 손을 거두어갔다. 손바닥의 끈적한 기운에 얼굴이 화르르 붉어졌다.
메롱, 지헌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그 모습이 장난스럽다기보단 야릇하게 보였다. 눈꺼풀을 내리고서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언제든 다시 팽만해질 수 있는 욕구가 설핏 비쳤다.
정신상태가 19금인 이 남자를 예나한테 바로 데려가도 되려나 모르겠다.
정오가 분한 표정으로 노려보니 지헌은 정오의 어깨를 붙잡아 제 옆에 딱 붙였다. 한시라도 그녀와 멀어지는 것은 신경 쓰였다.
침대 위에서는 내 것이라 확신하며 확인받을 수 있었던 마음이 침대를 벗어나면 멀어진 거리만큼이나 흐릿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불안은 언제쯤이나 극복할 수 있을지 알 길이 없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와 24시간 붙어 있고 싶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함께 차에 오른 후에, 정오가 물었다.
“의사 선생님이 임신 테스트기 얘기했을 때, 오빠가 ‘아니’라고 그랬잖아.”
“내가?”
“응. 선생님이 내 오래전 원룸을 말로 묘사해주셨거든. 원룸에 이런저런 것들이 있고, 책상 서랍을 열면 임신 테스트기가 있다고. 오빠 사고 나기 전날에 같이 임신 테스트기를 봤었어.”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정오는 몇 시간 전의 상황을 또박또박 다시 읊어 주었다. 지헌의 미간에 그때와 마찬가지로 주름이 잡혔다.
“근데 오빠가 최면에 빠진 와중에 ‘아니’라고 말했어. 왜 그런 거야?”
지헌은 골똘하게 그때의 상황을 떠올려보았다. 바늘구멍만 한 시야에 무언가가 보였던 것 같긴 한데, 누군가 억지로 기억을 밀어낸 것처럼 그 이미지가 다시 떠오르지는 않았다.
“나도 잘 모르겠어. 미안해.”
“아니야. 아니야.”
지헌의 사과에 정오는 손을 휘저었다.
“내가 미안해.”
기억을 끄집어내 주고 싶었지만 자신의 욕심으로 그를 고통스럽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다시 만났고, 어렴풋하게나마 자신을 떠올렸으니 사실 더 이상 과거를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괜찮아. 당신의 텅 빈 공간들은 행복한 현재로 채울 수 있을 거야.
“최면치료 하지 말자. 안 해도 돼.”
“…….”
“그냥, 오빠가 불안해하거나 힘들어하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어.”
그는 살짝 입술 끝을 올려 미소를 보여주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예나, 국순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이제 이 집에서 보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작은 집이 주는 안락함 때문인지, 이 집의 구성원들이 주는 밝은 기운 때문인지, 이 집을 몇 번 방문하지 못한 지헌도 어느새 정이 들어 떠나는 것이 아쉽게 여겨졌다.
추억.
추억이 생겼다.
기억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아쉬울 것 없는 공허한 인생을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꼭 기억해야만 하는 시간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런 시간 덕분에 앞날을 더 제대로 살아야겠단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소중한 기억들을 쌓고 싶었다.
“왜 우리 정 서방이 설거지를 하고 있어. 그냥 둬.”
식사 후 지헌이 팔을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시작하기 무섭게 국순이 달려왔다. 국순이 화장실을 다녀온 틈에 지헌이 개수대를 차지한 것이었다.
“제가 할게요.”
“그래도 새신랑이 그러면 쓰나.”
역시 사위를 부려먹긴 아깝다. 그러면서도 지헌의 행동이 기특하게 여겨지기도 하여 국순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헌은 예나 물통 입구의 물때를 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국순은 결국 씨익 웃으며 지헌이 들고 있던 솔과 물통을 가져갔다.
우리 사위는 솔질할 줄을 몰라.
“때가 낀 방향으로 솔질을 해야 해. 가로줄에 때가 끼었는데 백날 세로로 솔질을 하는 건 소용없지.”
국순이 요령 좋게 물통의 때를 긁어냈다. 지헌은 때가 빠진 물통 입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나를 재우고 정오와 지헌은 밖으로 나왔다.
정오는 계속 지헌의 상태를 살폈다. 집에 와 예나와 시간을 보내며 지헌의 얼굴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제 몇 시간 전에 그런 힘든 일을 겪었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러 더 힘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걱정스러웠다.
“운전 잘할 수 있겠어?”
“당연하지.”
이전과 마찬가지로 믿음직스럽게 대답한 지헌이 느긋하게 정오를 불렀다.
“정오야.”
“응.”
“나 최면치료 계속 받으려고.”
“……괜찮겠어?”
“잘 모르겠어. 아무튼 해볼게.”
때가 낀 방향으로 솔질을 하자.
반응이 있다면 반응이 있는 방향으로 시도해보자. 피하지 말자. 오늘 지헌이 설거지를 하면서 얻은 인생의 교훈이었다.
지헌의 결심을 들은 정오의 눈이 빛났다. 신이 나서가 아니라 감격스러워서였다. 지헌이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을 한다는 점이 고마웠다.
“응! 그럼 선생님한테 내가 다시 연락할게. 어쨌든 너무 무리하지 마. 기억은 찾지 않아도 되고, 치료도 다른 방법이 있을 테니까.”
“…….”
“오빠가 소중하지, 기억이 소중한 건 아니야.”
“너 지금 나 집에 가지 말라고 그러는 거야?”
따뜻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는데 돌연 또 그의 눈빛이 음흉해졌다.
정오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코를 벌름거렸다. 지헌이 그런 정오를 껴안았다.
“이제 이런 작별하고도 안녕이야.”
한마디 잔소리를 해줄까 했는데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정오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이사 이틀 전. 이제 그와 한집에 살 수 있게 된다. 정오 또한 그 사실이 어린애처럼 설렜다.
*
정오와 헤어진 후, 지헌은 기운을 차린 김에 카운슬러를 만나러 갔다. 약속장소에 도착한 카운슬러에게 지헌은 가장 먼저 김진구에 대해 물었다.
“사고 현장은 방문해보셨습니까?”
“네. 경찰이 실족사로 처리를 해서 현장은 금방 수습됐습니다.”
“부검 결과는 나왔습니까? 사체에 이상한 점은 없었고요?”
“혈중 알코올 농도가 높은 것 외에는 별다른 게 없었던 모양입니다. 다만…….”
“…….”
“아직 휴대폰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휴대폰으로 제게 보낸 동영상을 찍었을 텐데요.”
지헌은 김진구가 보내온 이메일을 다시 카운슬러에게 보여주었다.
“이 이메일을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았습니다. 경찰도 찾지 않으니 제가 나서서 제출할 필요는 없겠죠.”
김진구가 첨부한 동영상을 유심히 보는 카운슬러에게 지헌이 말했다.
카운슬러는 동영상을 몇 번이나 살펴보다가 인상을 찡긋거렸다.
“차량 번호가 보이질 않아요. 번호판만 보이면 알기 쉬울 텐데. 차종부터 파악해서 차량을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배경으로 보이는 풍경도 특별할 게 없어서 쉽지 않겠네요.”
“그래도 하실 수는 있겠죠?”
“해봐야죠. 아주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사례는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혹시 힌트가 될 만한 게 더 없을까요? 짚이는 사람이 있다거나.”
카운슬러의 물음에 지헌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김진구가 7년 전 사고의 목격자 채은비를 협박했습니다. 제가 채은비한테 오빠가 한 명 있다고 말씀드렸죠.”
“네. 채은엽 변호사.”
카운슬러가 바로 대답했다. 카운슬러도 조사를 통해 파악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채은엽은 야망이 크고, 목표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놈입니다. 섣불리 의심할 수는 없지만 김진구를 추적하던 사람은 채은엽이 고용한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한번 알아봐야겠네요.”
카운슬러가 끄덕였다.
*
일주일간의 공사가 마무리되고 도배와 입주 청소를 하고 가구를 들이고, 지헌의 집 이사에 이어 드디어 일요일. 정오네도 이사를 하는 날이 되었다.
정오는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켰다. 베개에서 밀려나 목을 아무렇게나 꺾고 잠들었던 것이다. 밤사이에 예나가 얼마나 차댔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예나야, 넌 아무래도 바둑기사가 아니라 축구선수가 될 것 같은데 어쩌지?
정오는 예나를 바르게 눕혀주고 방을 나왔다. 목이 뻣뻣해서 뒷목을 잡고 물을 마셔야 했다.
이제 예나는 어떻게 자려나. 내가 계속 데리고 자게 되려나?
‘정지헌이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정오와 지헌은 예나의 침실을 꾸며주었다. 이사 후에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어 아직 예나에게는 방을 보여주지 않은 상태였다. 당연히 예나와 잠자리에 대해 얘기한 적도 없었다.
예나가 혼자 방을 쓸 수 있도록 잘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오늘의 과제가 될 터였다.
“왜 그래. 잠 잘못 잤어?”
정오보다 일찍 일어나 방을 다 정리하고 거실로 나온 국순이 물었다. 국순은 금방 딸의 상태를 확인했다.
“응. 예나가 잠을 험하게 자서.”
“너 어렸을 때처럼 아주 포악해.”
“엄마, 예나 아빠한테 그 얘기 하지 마. 알았지?”
지헌은 정오의 약점을 발견하면 아주 즐거워하며 놀리는 재미를 알아가고 있었다. 왠지 이 비밀을 알게 되면 또 엄청 놀릴 것 같아 정오는 엄마에게 단단히 당부했다.
띠띠띠띠.
당부하기 무섭게 현관문이 열리고 지헌이 들어왔다.
“어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정오는 왜 그래?”
지헌 역시 정오의 삐뚜름한 고갯짓을 알아보고는 곧장 물었다.
“잠을 잘못 잤어…….”
“그럼 내 차에서 쉬어. 이사 돕겠다고 나서지 말고.”
정오의 고백에 지헌이 대책을 마련해주었다.
이삿짐을 옮기는 동안 정오와 예나는 지헌의 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국순과 지헌은 인부들에게 지시하며 잔무를 도왔다. 정오와 국순이 전날 깔끔하게 정리해놓아 짐은 금방 빠졌다.
국순과 지헌을 기다리는 와중에 똑똑, 누군가 차창을 노크했다.
“어? 아저씨!”
예나가 먼저 소리쳤다. 권배일이었다.
정오와 예나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예나야. 안녕.”
“아저씨, 안녕하세요.”
“오늘 이사 가시는군요. 그런데 어디 불편하세요?”
정오의 움직임이 불편해 보여 배일이 살갑게 물었다.
“아뇨. 그냥 잠을 잘못 자서.”
정오가 대답을 하니 예나가 옆에서 깔깔 웃었다. 그사이에 배일은 집에 들어갔다가 재빨리 나왔다. 배일의 손엔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배일이 정오에게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바둑판과 바둑알, 그리고 동전파스가 들어있었다.
“동전파스예요. 목에 담이 왔을 때 이게 효과가 좋더라고요. 나중에 이사 끝나면 뻐근하실 테니 가족분들도 붙이시면 좋겠네요.”
“아, 아니, 뭐 이런 걸…….”
정오는 뜻밖의 선물에 당황하여 감사 인사도 제대로 내놓지 못했다. 배일은 정오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예나에게 말했다.
“예나야. 이건 아저씨가 주는 선물이야.”
“바둑판이요?”
“그래. 이건 보통 바둑판이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우승을 많이 한 프로기사님이 사인해주신 바둑판이야.”
배일의 설명을 듣고 정오가 더 놀랐다.
“아니, 이런 귀한 걸 주시면 어떡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는 이제 바둑을 안 둬서요. 예나는 바둑을 좋아하니까 예나를 주는 게 뿌듯할 것 같네요.”
“아니 그래도…….”
“이사 잘하시고요. 건강하시고요.”
정오가 안절부절못하는 사이에 예나는 종이가방을 넘겨받았다.
“아저씨 근데 이거 무거워요.”
“아저씨가 실어줄까?”
“네!”
배일은 이삿짐 트럭 안에 종이 가방을 집어넣었다. 예나가 우렁차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예나 내년이면 초등학생이지?”
“네!”
“그래. 학교 잘 다니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지내.”
“네!”
배일이 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뜻한 손길이었다.
“이예나. 이제 이름이 바뀌겠네.”
배일의 말뜻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예나에게, 배일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이름이 바뀌더라도 아저씨는 널 오래오래 기억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