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완전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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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완전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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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완전한 가족
2022.06.11.
은비는 느지감치 침대에서 일어났다. 미열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약국에 다녀와서 옷 갈아입고 미용실에 가자.’
저녁때는 맞선 약속이 잡혀 있었다. 얼마 전 은엽의 사무실에서 잠깐 마주쳤던 남자였다.
나이는 마흔, 자산이 천억대에 이르는 자수성가형 인재. 은엽이 소개한 사람 중 가장 나이가 적었고 조건도 가장 좋았다. 무엇보다도 초혼이었다. 스치듯 보았던 얼굴만 빼고는 그나마 괜찮은 사람이었다.
싫다고 고집만 부릴 수는 없다.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오빠가 소개해주는 사람들은 오빠 말처럼, 다시는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나이는 많지만 나를 온전히 사랑해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 사랑받으며 사는 것도 행복할 것이다. 엄청난 자산가라면 집안에도 보탬이 될 것이고, 나도 평생 부를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이고.
은비는 오늘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하며 집을 나섰다.
약국 가는 길에 스친 가게들의 반질반질한 유리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한동안 살이 찐다 싶었는데 조유리 대리의 지적 이후 살이 많이 빠졌다.
먹은 게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이어트가 되었다. 하지만 피골이 상접한 얼굴은 흉측해 보였다.
‘뭐라도 먹어야지.’
은비는 약국에 다녀오는 길에 뭐라도 사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약국 옆 만둣가게의 커다란 왕만두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군침이 돌 정도였다. 한 번도 맛있겠다고 느껴본 적이 없는 음식이라 은비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이 당황스러운 감정이 과거의 어느 기억에 닿았다. 7년 전에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심장을 짓눌렀다.
‘설마…….’
약국 문을 열기도 전에, 사실을 확인하기도 전에 눈물이 고였다.
한 달에 한 번,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날이 왠지 돌아오지 않았다. 월경이 규칙적인 편은 아니라 그간 너무 스트레스가 많아 조금 늦어지나 보다 생각했는데 따져보니 이제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계속 빈속에 차를 탄 듯이 속도 안 좋고, 잠이 밀려오기도 했다.
“어서 오세요. 어디가 불편하세요?”
약사가 친절하게 물었다. 은비는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임신 테스트기 한 개…… 아니, 두 개 주시고요. 두통약도 주세요.”
약사가 은비의 요청에 따라 임신 테스트기와 두통약을 내어놓고 은비가 건네는 카드를 받아들었다.
“약은 식후에 드시고요. 빈속에는…….”
“수고하세요.”
카드 계산을 마친 약사가 당부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은비는 카드를 낚아채듯 챙겨 약국을 떠났다.
그 남자. 권배일.
남자는 매번 철저하게 피임을 했다. 병적이다 싶을 정도로 피임에 신경 써서 은비는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 임신은 아닐 거야, 계속 되뇌었다. 하지만 어쩐지 급하게 불안감이 밀려왔다. 떠올려 보니 7년 전 그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후다닥 집으로 돌아온 은비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떨리는 손으로 임신 테스트기의 포장을 뜯어 시험해보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빨간 선 두 개가 나타났다. 부정할 수도 없는 새빨간 두 줄.
은비는 혼비백산이 된 얼굴로 나머지 하나의 포장을 뜯었다. 혹시나 자신의 테스트 방법이 잘못되지 않았을까 해서 테스트기를 시험하기 전에 사용방법을 천천히 정독했다. 그리고 몇 분 후 아주 정성스럽게 다시 테스트기를 사용했다.
역시 선명한 두 줄이었다.
“허어.”
눈물이 차오르며 욕지기가 밀려 나왔다.
*
이삿짐을 모두 옮긴 후 국순과 함께 차에 오른 지헌이 정오에게 물었다. 어정쩡하게 기울어져 있던 정오의 고개가 반듯하게 돌아와 있었다.
“좀 나아졌어?”
“응. 파스 붙였어. 오빠도 줄까?”
정오는 대답하며 동전파스를 내밀었다.
“효과 괜찮아. 오빠도 뻐근한 데 있으면 붙여.”
“아빠, 그거 경찰 아저씨가 주신 거야.”
정오의 말을 예나가 거들었다.
“경찰 아저씨?”
지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국순은 짝 하며, 손뼉을 쳤다.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아유, 그 경찰 총각한테 인사를 안 했다. 이사 가기 전에 반찬이라도 챙겨주고 싶었는데.”
“총각?”
국순의 이어진 말에 지헌은 자그마하게 웅얼댔다. ‘총각’이라는 말이 머리에 박힌 것이다.
정오는 슬쩍 마른침을 삼켰다.
정지헌 씨, 정신 차려. 이러다가 장모님 앞에서까지 흉하게 질투하는 꼴을 보일 건가? 겨우 옆집 경찰 아저씨한테?
“그냥 옆집 사는 경찰이야. 예나가 유괴될 뻔했던 날 학원 앞으로 데려와 준 경찰 선생님.”
정오가 수습했다. 우리 예나를 찾아준 고마운 경찰 선생님이라는 말에 지헌도 더 이상 질투하는 꼴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돌려 운전대를 잡았다.
거리가 멀지 않아 새집에는 금방 도착했다.
“와아아아! 집이다아아! 만세에에!”
예나는 깔끔하게 정리된 집에 들어서며 소리쳤다.
“우리 예나 방이 어딜까? 맞혀봐.”
“그건 딱 알아. 말해줄까?”
정오의 물음에 예나가 자신 있게 답했다.
“이 방! 여기야!”
예나는 복도 두 번째 방 앞에 서서 문을 찰싹 두드렸다.
“여기 문은 핑크잖아. 예나가 좋아하는 핑크. 그리고 여기 하트도 보여? 예나가 좋아하는 하트.”
예나의 방은 방문부터 예나의 취향대로 꾸며졌다. 지헌과 정오가 예나에게 해주고 싶은 것은 다 해주자는 의지로 머리를 맞대어 만든 방이었다.
“맞아. 여기야. 우리 들어가 볼까?”
정오가 예나의 손을 잡았다. 예나가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펼쳐진 핑크빛 세상.
예쁜 책상과 공주님 침대, 그리고 벽을 가득 채운 장난감과 인형과 동화책들.
“우와아.”
감탄사를 내놓은 예나는 그 채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휘둥그레 뜨인 두 눈에도 얼떨떨한 떨림이 그대로 드러났다.
“엄마, 여기가 예나 방이야?”
“그럼. 예나 방이지.”
정오의 단단한 대답에 예나는 폴짝폴짝 뛰어 장난감 정리대 앞으로 갔다. 예나가 TV 광고로 보고 눈독 들였던 장난감도 그 안에 있었다.
예나는 장난감을 끌어안고서 또 폴짝폴짝 뛰었다. 예나의 가슴 안에서 심장도 폴짝폴짝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오가 물었다.
“좋아? 마음에 들어?”
“응! 너무 좋아!”
뛰다가 멈춘 예나가 장난감을 내려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회전대가 달린 의자 위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예나는 한 바퀴 빙 돌고는 다시 대답했다.
“예나 생일보다 더 좋아!”
하지만 차츰 얼굴이 일그러졌다. 으어어엉. 이내 예나의 맑은 두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이는 우는데 너무 사랑스러워서 미소가 입에 걸렸다. 정오는 예나에게 다가가 안아 주었다.
“왜 울고 그래.”
“여기는 진짜 공주님 방이잖아.”
그거야 우리 예나가 진짜 공주님이니까.
“우리 예나도 공주님 아니야?”
“엄마한테만 공주님이지이. 으어엉.”
“아니야. 우리 예나는 누구한테든 공주님이 맞아.”
아이는 기쁠 때도 눈물이 나온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정오는 그런 아이를 가만히 다독였다. 지헌이 그 뒤에서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정오의 짐과 예나의 짐은 따로따로 각각의 방에 들어갔다.
집 안의 모든 방 중에 국순의 방이 가장 컸다. 화장실이 딸린 방엔 책상과 온돌침대를 비롯하여 안마 의자, 그리고 안마 의자에 앉아 시청할 수 있도록 높이 올라가 달린 벽걸이 TV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국순은 가만히 침대에 앉아 침대 끝을 더듬어보았다. 그사이에 노크 소리가 들리고 지헌이 들어왔다.
“어머니. 방은 마음에 드세요?”
“그럼. 마음에 들다마다.”
“…….”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지 모르겠어. 너무 좋아서 부담스러울 정도네.”
침대에 앉아서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은 국순의 앞에 지헌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머님, 저는 이제 어머님께서 해주시는 건 조금도 부담 갖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받을 거예요. 음식이든 선물이든 뭐든요. 다 제가 좋아서 해주시는 거니까.”
“…….”
“그러니까 어머님도 제가 좋아서 하는 일에 부담 갖지 마세요.”
이제 우리는 부담 없는 사이. 가족.
국순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사위의 눈동자를 처음으로 제대로 보게 되었다. 예나와 같은 색이 보였다.
이제 완전한 가족. 아들처럼 아껴주어야 할 사위.
“그래.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우리 정 서방도 나한테 바라는 거나 서운한 거 있으면 바로바로 얘기해줘.”
“네. 그럴게요. 어머니, 지금 주방 봐주셔야 해요. 식기들이랑 주방도구 들어갈 거라서.”
“아, 그래야지. 알았어. 알았어.”
국순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헌이 먼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국순은 사위의 등이 듬직하게 여겨졌다.
이삿짐은 착착 정리가 되어갔다.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엔 승규네 가족이 찾아왔다.
오늘 역시 도빈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목청 좋게 소리쳤다.
“예나야아아아아아아!”
“박도빈!”
예나도 달려왔다.
“나 방 생겼다! 빨리 와. 빨리!”
예나는 도빈의 손을 잡고 제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뒤를 도윤이 총총 따라갔다.
“우와! 여기는 천국이야?”
방에 들어온 도빈이 감탄한 목소리로 외쳤다.
조명 한 곳에 이상이 생겨 조명기술자를 부르려는 와중에 승규에게 전화가 왔다. 지헌이 승규에게 조명에 대해 얘기하니 그런 건 자신에게 맡겨달라며 찾아온 것이다. 가족들을 죄다 데리고서.
“어서 와.”
“야아. 꾸며놓으니까 더 예쁘다. 집 좋다.”
“실례합니다. 오늘 이사하고 바쁘실 텐데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하네요.”
지헌의 환영에 승규와 진서도 인사를 전했다.
“아니에요. 잘 오셨어요. 짜장면 시켜 먹으려고 하는데 이 동네 중국집 좀 추천해주세요.”
정오도 현관으로 나와 승규와 진서를 환영했다. 예나의 방에선 아이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 명의 아이들은 침대 위에서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침대는 사자마자 망가지게 생겼다.
“아유, 박도빈! 엄마가 침대에서 뛰지 말랬지!”
손님 모드였다가 금세 엄마 모드로 돌아온 진서가 도빈에게 호통쳤다.
“그건 엄마 침대잖아. 이건 예나 침댄데?”
“예나 침대에서 뛰는 건 더 안 되지.”
“예나가 뛰어도 된댔어.”
“여긴 뛰어도 괜찮아요.”
예나가 도빈의 말을 거들었다.
“도빈아. 내 방에서 많이 뛰고 가.”
“응!”
예나의 허락에 도빈은 더욱 힘차게 뛰었다. 뛰기 위해 뛰는, 무아지경에 이른 것 같았다.
진서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요. 침대 튼튼하니까. 다치지만 않으면 돼요.”
정오가 말했다.
승규는 지헌과 조명을 손보고, 정오와 국순이 주방을 마저 정리하는 동안 진서는 아이들을 감독했다.
이윽고 진서가 추천해준 맛집에서 짜장면이 도착했다. 널찍한 식탁 앞에 다 같이 모여 앉아 짜장면을 먹고, 아이들이 조금 더 뛰어노는 사이에 세상은 완전히 어둑해졌다.
“이제 가자. 박도빈.”
승규가 도윤의 신발을 신기며 도빈을 불렀다. 도빈은 아쉬운 듯 예나의 방에 드러누웠다.
“아. 여기서 살고 싶다!”
“그럼 도빈이는 아줌마한테 엄마라고 불러야 하는데?”
정오가 농담하니 도빈이 대꾸했다.
“그건 안 돼요.”
“왜?”
“우리 엄마가요. 엄마가 같으면 결혼을 못 한댔어요.”
도빈의 대답에 지헌의 눈이 번쩍 뜨였다.
“도빈아, 아빠가 부르신다. 얼른 집에 가야지.”
“그래도 자꾸 더 놀고 싶은데.”
지헌의 권고에 눈치 없는 도빈이 웅얼거렸다.
지헌은 이를 악물고서 미소 지었다.
“도빈아, 삼촌 말 들어야지?”
입술은 길게 호선을 그리고 있지만 눈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