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 지헌의 소원 (118/183)


118. 지헌의 소원
2022.06.15.


집에 가기 아쉬워진 도빈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다가 지헌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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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늘은 가고, 내일 또 와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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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일 또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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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잠옷 가져와서 자고 가면 안 돼요?”

허허. 요 녀석 봐라?

이 넉살을 보니, 오래전 아들 체면을 세워주려고 아들의 여자친구와 놀아달라며 앙탈을 부리던 박승규의 아들이 맞구나.

지헌은 도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손끝에는 왠지 꾹꾹 힘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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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이 코딱지만 한 녀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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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20cm인데? 아저씨는 120cm 코딱지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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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규. 네 아들 데려가야지.”

지헌이 고개를 돌려 현관 쪽을 내다보며 말했다. 지헌과 도빈의 대화를 듣지 못한 승규가 심드렁하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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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빈, 지금 안 오면 놓고 간다.”

누구 마음대로 놓고 가냐고!

결국 울컥한 지헌이 도빈을 번쩍 안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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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어! 예나야, 안녕!”

도빈은 견우와 직녀 동화 속의 오작교 위에라도 오른 듯이 팔을 허우적거리며 예나에게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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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안녕!”

예나도 도빈의 뒤를 쫓아가며 인사했다.

후우. 이제 좀 안심이 되네.

승규네 가족을 보낸 후에야 지헌은 진짜 평온을 되찾았다. 현관까지 나온 예나가 우산꽂이에 꽂힌 노란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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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빠도 이 우산 있네? 예나도 이 우산 있는데.”

예나가 제 신발장에서 똑같은 우산을 가져와 내밀었다. 꼭 닮은 두 우산이 만났다.

오래전 비 오던 어느 날 광고주와의 회식에 가는 길에 정오가 사준 우산이었다.

그녀가 그 우산을 내밀었을 때만 해도 지헌은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다. 왜 그녀에게 끌리는지, 왜 자꾸 휘둘리는지, 잘 모르면서 마냥 그녀에게로 눈이 향했다. 사랑인 줄도 모르고 사랑을 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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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아빠한테 사준 우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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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엄마가 사준 거구나. 그럼 그렇지.”

아이의 말투에 지헌은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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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둑한 밤. 은엽은 은비의 집을 찾아갔다.

맞선 자리에는 나가지도 않고 휴대폰도 꺼놓고, 하나뿐인 동생이라는 게 집안에는 조금도 보탬이 되는 법이 없고 멍청해서 시키는 일도 제대로 하질 않으니 천불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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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비.”

억지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은엽은 짜증스럽게 동생을 불렀다. 집에 있긴 한 모양이었다. 화장실에서 구역질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디 아픈가 싶어 인상을 쓰고서 주변을 쓰윽 둘러본 은엽의 눈길이 협탁 위에서 멈추었다.

사용한 임신 테스트기가 놓여 있었다. 빨간 선 두 개가 나란히 평행을 이루는 임신 테스트기의 결과에 은엽은 기가 막혔다.

잠시 후, 변기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은비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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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왜 왔어.”

은비는 은엽을 발견하고서 소름 끼친다는 듯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은비에게 은엽은 임신 테스트기를 들이밀었다.

헉, 금세 얼굴색이 창백해진 은비가 재빨리 달려들어 은엽이 들고 있는 것을 휙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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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뭐 하는 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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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아빠 누구야.”

은엽이 싸늘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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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굴러먹은 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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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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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너 혼자 사는 집에서, 그게 네 게 아니면 누구 건데.”

은비는 몸에 오한이 든 것처럼 팔이 추워졌다. 몸을 움츠리고서 조심스럽게 은엽에게서 몸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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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아빠는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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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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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굴러먹던 놈이냐고.”

은엽은 계속 추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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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그것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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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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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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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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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짜리 애냐고!”

딱히 배 안의 것을 지키려는 마음은 없는데, 어쩐지 은비는 입을 다물고서 배를 감싸게 되었다.

더는 대화를 나누기 짜증 난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돌린 은엽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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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해, 내일 당장. 내가 알아볼 테니까.”

은엽은 아는 여자들을 몇 번 수술시킨 전력이 있었고, 그때마다 찾는 병원이 있었다.

그러나 알았다고, 고맙다고 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던 동생은 눈물을 머금고서 은엽을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은엽은 기가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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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빨리할수록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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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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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하지 말고 눈 딱 감고 해. 다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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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못 해, 못 해.”

은비가 울먹이며, 사정하듯이 은엽의 팔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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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난 못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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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구나? 너 미혼모 되고 싶어?”

은비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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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때문에 네 인생 망치고 싶어? 아니면 애 아빠가 같이 살재? 애 아빠가 억만장자라도 돼? 정지헌이라도 돼?”

철없는 동생에게 현실을 일깨운 은엽이 휴대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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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말 말고 해. 병원에 연락해놓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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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본 적 있어!”

은비의 비명과 같은 고백에 은엽은 위로 들어 올렸던 휴대폰을 내렸다. 뜻밖의 이야기에 은엽이 눈가를 찡긋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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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수술. 해본 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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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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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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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어쩔 수 없이, 은비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7년 전 미국에서, 은비는 사귀던 남자친구의 아이를 가졌다. 남자는 당혹스러워하며 수술 절차를 밟아주었다.

은비는 의사 면허도 없는 남자에게 수술을 받았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귀에 들어갈까 봐 제대로 된 병원을 선택하지 못했다.

수술 후 남자는 당연히 은비를 떠나갔다. 그것은 은비가 유학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아주 끔찍했던 시간. 정지헌과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오랫동안 고통에 허덕였을 시간.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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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무리를 해서, 자궁이 유착됐다고 그랬어. 한 번 더 수술하면 난 못 살아. 안 돼,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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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사람이냐, 쓰레기냐.”

그러나, 오빠에게서 위로를 받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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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좀 쓰고 살아. 7년이면 다 회복됐겠지. 그러니 임신도 잘된 거잖아. 뭐가 문제야.”

7년이나 지난 과거로 오빠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은비는 필사적으로 은엽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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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그래도 수술은 못 해. 약으로 할 거야.”

다시 그 수술대에 올라갈 수는, 또다시 그런 고통을 감내할 수는 없었다. 너무나 끔찍했다.

*

어느덧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다.

거실에서 예나와 TV를 보던 국순도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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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들어가서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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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내가 잠들었네.”

정오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뜬 국순이 느른하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새벽에 일어나 이삿짐 운반을 감독하고 새집을 정리하고 손님맞이까지 하고, 너무나 고단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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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 자야지. 너도 얼른 자.”

천천히 방으로 향하는 국순과 마주친 지헌도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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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니. 오늘 너무 고생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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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예나 아범도 얼른 자. 예나 아범도 고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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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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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고맙고.”

국순이 손을 흔들고 방으로 들어간 후, 지헌이 예나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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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도 얼른 씻고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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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씻겨줘.”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정오가 잔소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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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나, 이제 좀 스스로 해봐.”

하지만 예나는 아랑곳없이 아빠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피식 웃은 지헌이 예나를 번쩍 들어 화장실로 향했다.

아이의 손발을 씻기고 세수시키고 이도 깨끗하게 닦아주고. 이제 제법 지헌도 아이를 씻기는 일이 노련해졌다. 아주 조금씩 아빠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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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아빠가 책 읽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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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화장실에서 나온 예나는 아빠의 말에 따라 재빨리 제 방으로 가 잠옷으로 갈아입고서 베개와 동화책을 가지고 나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안방으로 향하는 예나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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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빨리 와!”

이럴 줄은 몰랐기에, 지헌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아이에게 그 속을 다 보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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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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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하긴, 계속 엄마와 함께 자던 아이가 혼자 자는 게 쉬울 리는 없었다. 아이를 키우는 건 그런 거였다. 아내를 독차지하겠단 욕심은 언제든 내려놓아야 했다. 당분간은 이런 밤에 순응해야 할 것 같았다.

예나가 침대를 차지한 걸 보고는 안방에 들어선 정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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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야. 근데 이 침대는 침대 가드가 없잖아. 너는 100퍼센트 굴러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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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나는 엄청 예쁘게 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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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엄마가 아침마다 엄청 예쁘게 제자리로 돌려놓으니까 그런 거고.”

결국 세 사람은 안방 침대 옆에 이불을 크게 펴고서 나란히 눕게 되었다. 비싼 침대를 사도 소용이 없다. 그나마 예나의 침대는 트램펄린 대용이라도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봐야 할까?

엄마와 아빠의 사이에 끼어 이불을 어깨 위로 바짝 올리고서 예나는 계속 킥킥 웃었다. 지헌이 읽어주는 동화책의 주인공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예나는 집중하지 않고 킥킥 웃기만 했다.

지헌이 동화책을 읽다가 덮고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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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안 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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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오늘 예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예나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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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가 가진 마음의 그릇은 이미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른 마음이 들어갈 자리도 없을 만큼 꽉 찬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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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날이야. 소원을 다 이뤘으니까.”

어떤 소원인지 묻지 않았다. 소원을 짐작할 수 있었고, 왠지 물어보면 울음이 다시 한번 터질 것 같았다. 지금은 아이의 이 맑은 웃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아하하하 으흐흐흐 키킥킥킥. 예나의 재미난 웃음소리를 따라 지헌도 웃음이 터졌다. 아이가 행복하다 하니 지헌 또한 행복하기만 했다.

정오도 그렇게 크게 웃는 지헌을 본 적이 없었다.

예나는 한참을 웃다가 정오에게 몇 번 잔소리를 듣고서야 잠이 들었다.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 일. 그렇게 꿈에 그리던 일을 지헌은 이제 매일 할 수 있게 되었다.

지헌이 예나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모습을 보며 정오는 빌라에서 살던 시절의 일상을 떠올렸다.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 지헌을, 응시하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엄마도 이런 감정으로 나를 보았을까.

한동안 잠자코 바라보던 정오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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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소원 있어?”

지헌은 아주 늦게야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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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원은 영원히 이뤄지지 않아.”

정오에게 그러했듯, 지헌은 예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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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하루만이라도, 예나의 더 어렸을 때로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서 더 어린 예나를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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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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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나타나서 그렇게만 해준다면 나도 지금보다 열 배든 백 배든 더 열심히 살 텐데.”

거기까지 대답한 지헌은 피식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신에게 조건을 걸고서 소원을 들어주면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을 하는 마음이 유치하고 쑥스러웠다.

정오는 그런 지헌이 사랑스러웠는데도.

아이를 어루만지던 지헌의 손끝이 아이의 어깨너머로 떠올라 정오에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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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후회하고 있는 지금도 엄청 소중한 시간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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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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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이 귓불, 턱을 지나 목선을 훑어갔다. 맥박이 느껴지는 곳을 따라 손끝이 움직였다.

그를 바라보는 정오의 눈망울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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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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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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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한테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어.”

나도 사랑한다는 대답 대신, 정오는 애틋한 대안을 내놓았다.

……몇 초 후 이 말을 한 걸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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