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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듣고 싶은 말 (119/183)


119. 듣고 싶은 말
2022.06.18.


분명히 예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누워 있었는데.

어느새 지헌은 정오의 옆에 있었다.


“진심이야?”

그녀의 허리에 커다란 손을 얹은 지헌이 물었다. 그 눈빛이 퍽 깊고 예쁘기도 해서 정오는 다시 한번 진심임을 강조했다.


“그럼. 당연히…….”

하지만 말끝은 이내 흐려졌다.


“예나 동생을 만들려면 뭘 해야 하는지는 알 테고.”

지헌이 덧붙인 말과 함께 정오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따뜻하고 그윽한 눈길인 줄로만 알았는데 뜨겁고 이글이글한 눈길이었다.

아이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 정오는 이제야 깨달은 듯이 숨을 삼켰다.

부부는 닮아간다고 했던가. 아니, 혼인신고도 이제야 겨우 했고, 같이 산 지는 만 하루가 안 되었는데 벌써 닮는 것을 넘어 반전되어버렸다.

과정주의자였던 정오는 머릿속에 결과만을 그려 말했고, 결과주의자였던 지헌은 그 과정을 그녀에게 일깨워주었다.


“……아니. 난 모르겠다.”

“알 거야. 내 부인은 어린애가 아니니까.”

갑작스럽게 과정주의자로 탈바꿈한 지헌의 손이 정오의 허리춤으로 쑥 들어갔다. 그 손길이 야릇해서 끄윽, 하며 숨넘어가는 소리가 나왔다. 제 음성에 놀란 정오가 지헌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예나가 옆에 있는데!

그녀가 속으로 원망하며 지헌의 가슴팍을 퉁 때렸다. 이에 반응하듯 지헌이 상체를 번쩍 일으켰다. 정오는 본능적으로 흠칫 물러났다.


“……아니, 지금 만들자는 건 아니었어.”

“아니야. 넌 엄청 진심이었어.”

그의 목소리, 그의 눈빛에 야욕이 한껏 들어차 있었다.

이제 지헌은 그녀까지 일으킨 상태였다.

불과 몇 분 전, 가슴 저릿하고 애틋한 소원을 고백하던 남자가 어느새 이렇게 변했는지, 그놈의 스위치가 왜 자꾸 눌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정오는 힘자랑 좋아하는 정지헌에게 번쩍 들어 올려진 상태. 몸이 휘청거리자 정오는 지헌을 더욱 꽉 붙잡게 되었다.

예나를 재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지헌에게는 좋은 상황이었다. 예쁜 부인이 자신을 거절할 수 없는 상황.

그녀를 가뿐하게 들어 올려 안방을 나선 지헌이 그 건넛방의 문을 열었다. 텅 빈 공간에 침대가 떡하니 있는 것이 의아했는데, 부부싸움 후에 각방을 쓰기 위한 공간인가 싶었는데 이런 엉큼한 쓸모가 있는 거였다.

드디어 침대를 침대답게 사용하는구나, 하며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하지만 침대에 안전하게 착지한 이정오는 간이 콩알만 한 여자.


“오늘 이사하고…… 오빠 피곤하잖아.”

“아니. 안 피곤한데.”

지헌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 그새 조금 더 힘이 충만해진 것 같았다.

정오는 오늘 이사까지 마친 남자가 어찌 무한동력처럼 힘이 넘치는지 알 수 없어 기가 막힐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이것이 그의 본모습이긴 했다. 그녀의 말과 행동 모두를 야하게 해석하던,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싶어 일상의 모든 상황을 야하게 만들어버리던 그 정지헌.

그런 사람에게, 가장 기분 좋은 날에 도발을 했다.

오늘 잘못 걸리면 내일 또 늦잠을 자겠구나, 하는 직감에 정오는 목을 감싸고서 앓는 소리를 냈다.


“아아아, 목이 뻐근하다…….”

“동전 파스 붙이고 나았다며.”

“약발이 다 됐나 봐. 아이고…….”

지헌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정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프다고 앓는 사람을 힘들게 할 수는 없었다.


“알았어.”

“…….”

“너무 무리하게 하지는 않을게.”

으응?

당황한 두 팔이 파득거렸다. 그보다 빨리 입술과 입술이, 가슴과 가슴이 맞닿았다. 그의 심장이 건강하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그녀의 심장인지도 모르겠다. 밀착된 부위로부터 서서히 열이 전달되었다.

그의 손길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몸이 이완되었다가도 자극의 세기에 따라 온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의 커다란 손에 요리되는 기분이었다.

나 정말…… 이 남자랑 한집에서 잘 살 수 있을까?

그것이 새삼 걱정스러워지는 첫날 밤이었다.

*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나 확인한 풍경이 어색해서 정오는 몇 번 눈을 비볐다.

새집에서의 첫 아침.

여기가 정말 내 방이냐, 하며 눈물을 뚝뚝 떨구던 예나처럼 정오 또한 새집 새 방이 낯설었다. 사실 모든 것이 얼떨떨했다. 언제쯤이나 적응될지 알 수 없었다.

방 안엔 정오 혼자였다.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나가니 국순은 밥을 안치고 있고, 예나의 방에선 딸과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문 앞에 있는 자전거는 누구 거야?”

“예나 거지. 아빠가 자전거 사놨다고 했잖아.”

“예나는 자전거 탈 줄 모르는데?”

“이따가 아빠랑 타러 가자. 아빠가 가르쳐줄게.”

“아빠는 회사 가야 하잖아.”

“빨리 퇴근할게.”

“정말? 약속.”

“약속.”

“야근하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

“다른 날로 미뤄도 안 돼. 알았지?”

“알았어.”

열린 문으로 얼굴을 비추니 새끼손가락을 걸고서 흔들고 있는 다정한 부녀가 보였다. 아침부터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단 사실이 새삼 감격스러웠지만.


“엄마!”

“목은 괜찮아?”

예나의 목소리 뒤에 이어진 지헌의 음성이 왠지 따끔했다.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아직 안 나았다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은 뭘까.


“……응. 괜찮아.”

“그래. 다행이네.”

그가 다행이라고 대답해 주는데, 다행이 아닌 것처럼 들리는 마음은 대체 뭘까.


 

*

은비는 밤새 같은 전화번호로 수십 번 전화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남자의 전화번호는 이제 없는 번호가 되었다.

내가 속았을까? 이용당한 걸까?

은비는 인정할 수 없었다. 돈을 뜯긴 것도 아니고 금품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저 권배일이라는 이름 세 글자와 그가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이름은 주민등록증을 잠깐 보여준 게 다였고, 회사 이야기를 한 적도 없었다. 그저 은비는 제 이야기를 하는 데에만 급급해서 그에 대해 따로 묻지 않았다.

감정의 쓰레기통처럼 남자를 이용했다.

남자는, 내내 자신을 위로해주다가, 지쳐서 떠나버렸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고 조언해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내 상황, 내 욕심, 내 속상한 마음 모든 걸 이해해주던 소중한 사람이었는데…….

날이 밝고서야 겨우 잠이 든 은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은엽이었다.


“여보세요.”

[집으로 퀵 하나 보냈어.]

“퀵? 뭔데?”

[약이야. 간신히 구했으니까 바로 먹어.]

“…….”

[얼른 약 먹고 함대근하고는 다시 약속 잡았으니까 이번엔 꼭 나가. 오늘 여섯 시. 장소는 어제랑 똑같고.]

“……오늘 약을 먹고, 오늘 바로 맞선을 나가라고?”

은비가 기가 막혀 쏘아붙이니 은엽이 설득했다.


[괜찮은 사람이라 그러는 거야. 나이도 너랑 열 살밖에 차이 안 나고 초혼이야. 성공한 사업가라 인기도 많은 사람인데 널 좋게 봐주고 있는 거라고. 네가 한번 바람맞혔는데도 꼭 만나고 싶어 하잖아.]

“…….”

[잘 잡아. 너도 이제 사랑받고 살아야지, 은비야.]

은엽이 말하는 내내 은비의 눈앞에는 권배일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 사람은 어디 있을까. 내가 이토록 힘들고 불안한데 왜 나의 위로가 되어주지 않는 걸까.

얼마 후 은비의 앞으로 퀵이 도착했다. 아주 작은 상자였다. 포장을 뜯어 약을 확인한 은비는 복용방법을 단번에 읽지 못했다.


“흐으윽.”

눈물 때문에 자꾸 눈앞이 흐릿해졌다.

*

출근길. 지헌은 오늘도 어김없이 정오를 회사 근처에서 내려주고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서 사무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직전에 아버지 재광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네. 아버지.”

[이사는 잘했어?]

영미의 악행을 알게 된 후, 재광은 더 이상 예나를 데려오라며 닦달하지 못했다. 지헌의 집을 방문하겠단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손녀와 만나고 싶은 마음을 접을 수는 없어 매번 지헌과 연락할 타이밍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네. 잘 마쳤어요.”

[그래. 고생했다. 새집 마련한 거 축하하고.]

“고맙습니다.”

[나도 우리 손녀와 만나야 하는데 말이야.]

조심스럽게 꺼낸 아버지의 이야기에 지헌은 마음 놓고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 영미와의 뿌리 깊은 갈등을 무시한 채 재광의 집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한번 정오랑 얘기해볼게요.”

[그래. 좋게좋게 얘기해봐.]

“네.”

간단히 통화를 마치고 끊으려는데 재광이 다시 붙잡았다.


[김진구가 사망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아는 거 있어?]

재광도 김진구에 대한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지헌은 김진구에게 이메일을 받은 사실을 털어놓을까 하다가 입을 닫았다.


“아뇨. 아버지는요?”

[나도 뒤늦게 소식을 들었다. 어쨌든 김진구가 그렇게 됐다 하니 너희 결혼은 공식화해도 될 것 같구나.]

“그것도 정오랑 얘기해볼게요.”

[그래. 얼른 얘기하고 얼른 연락 줘.]

“네.”

아버지와의 통화를 마친 후, 9층에 이르러 집무실로 향하는 길에 지헌은 낯선 남자와 정오가 마주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정오의 얼굴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제작 1팀에 새 카피라이터가 온다고 했던가.

지헌의 부임 초기에 맥스기획은 상아기획을 인수했다. 하지만 본사를 이전하지 않는 이상 상아기획의 인력을 소화할 수 없는 상태라 상아기획과는 이따금 인력만 주고받으며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덕에 정오도 맥스기획으로 이직하게 된 것이고 지금 지헌의 눈앞에 있는 자도 상아기획에서 자리를 옮겨오게 된 것이다.

지헌이 다가가니 제작 1팀 안찬섭 팀장이 소개했다.


“이사님, 오늘 제작 1팀에 합류한 카피라이터 곽동재 차장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곽 차장님.”

반갑다는 인사와 그렇지 못한 표정.

지헌의 눈길은 곧장 그 옆의 정오에게로 옮겨갔다.


“두 분은 아는 사이인 것 같네요.”

“네. 제 이전 회사의 선배예요. 제 이직을 도와주신 분이기도 하고요.”

정오의 대답을 곽동재 차장이 거들었다.


“제가 도와줄 것도 없이 우리 이정오 대리가 너무 일을 잘해서.”

우리 이정오 대리?

곽 차장의 표현에 지헌의 눈썹은 반대로 휘었고 제작 2팀의 기훈과 영광은 창백해진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헌이 날카로워진 눈빛을 발사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 이정오 대리가 일을 잘하는군요.”

정오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일 잘하는 우리 이정오 대리님한테 할 말이 있는데, 잠깐 제 집무실에서 얘기 좀 할까요?”

정오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는 자그마하게 대답했다.


“네.”

“가죠.”

곽동재 차장에게서 팽하니 돌아선 지헌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우두커니 서 있던 정오가 그 뒤를 따랐다. 긴장하고 있던 제작 2팀의 사람들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젊은 본부장의 서슬 퍼런 카리스마에 놀란 곽동재 차장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며 안찬섭 팀장이 다독였다.


“원래 말투가 그런 분이야. 신경 쓰지 마, 곽 차장.”

“…….”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이야. 알고 보면. 알고 보면.”

제작 2팀의 고은주 대리도 제 옆까지 다가온 성미란 팀장에게 몰래 말했다.


“솔직히요 팀장님.”

“…….”

“이사님은 그냥, 이정오 대리님 지키러 회사 나오는 분인 것 같아요.”

“쉿. 그런 말 하면 안 돼.”

미란이 조용히 은주를 다그쳤다.

정오는 종종걸음으로 지헌의 뒤를 따랐다. 일찍 출근한 부속실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네.”

지헌은 짧게 고개만 끄덕인 후 바로 집무실로 들어갔다. 정오도 허둥지둥 비서에게 인사를 하고서 지헌을 따라 들어갔다.


“월요일 아침부터 할 말이 있다고 부르는 게 어디 있어.”

지헌이 곽 차장과 자신이 마주 서 있는 것을 보고서 질투하고 있다는 걸 파악한지라 정오는 당당하게 핀잔을 주었다. 지헌의 가늘어진 눈매가 그녀를 향했다.


“솔직히 할 말 없지? 괜히 부른 거지?”

“여보.”

지헌이 놀리듯 쏘아대는 정오를 불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호칭에 정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곽 차장과 친하게 지내지 마라, 둘이서 같은 프로젝트 맡을 생각하지 마라, 그런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우리가 혼인신고를 한 지 2주가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그 말을 못 들어봤네.”

“……무슨 말?”

“여보.”

엄청나게 엉뚱한데 엄청나게 진지했다.


“해보라고. 여보.”

꿔준 돈 내놓으라는 듯 당당한 요구에 정오는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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