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 추적 (125/183)


125. 추적
2022.07.09.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배일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제 얘길 많이 들으셨군요.”

“네. 옆집에 사셨다고.”

“제 이름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성함은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배일의 물음에 지헌이 건조하게 답했다.

지헌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굳어 있어 정오는 조금 의아했다. 대회장 앞에서 재회했을 때보다도 더욱 굳은 표정이었다.

지헌과 배일 사이에 흐르는 기류 또한 어쩐지 묘했다. 정오의 눈에는 두 사람이 정중한 태도로 기 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오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경사님, 어떻게 여기까지 나와 계세요?”

“잠깐 볼일 보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급한 일인 것 같아서 부랴부랴 왔네요. 같이 들어가시죠.”

정오와 지헌, 예나는 배일의 안내에 따라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출입문을 지나며, 정오는 배일에게 예나가 찍은 사진을 건넸다.


“오늘 대회장에서 예나가 찍은 사진이에요. 상아색 옷을 입고 있었고, 남편하고 어깨를 부딪쳤대요. 남편이 뒤늦게 뒤쫓아갔는데 이미 사라진 후였고요.”

“일단 오늘 예나가 찍은 사진과 이전에 확보한 CCTV 자료를 비교해보죠.”

세 사람은 배일을 쫓아 형사과 출입문을 지났다. 다른 형사들의 책상 위가 무척 난잡한 것에 비하여 배일의 책상은 그의 곱상한 이미지처럼 꽤 깔끔했다.


“비어 있는 진술실이 있으니 거기서 살펴보는 게 좋겠네요.”

배일이 책상 위의 노트북을 들고 앞서갔다. 지헌과 정오와 예나는 그 뒤를 따랐다.

네 사람은 진술실에서 예나의 사진과 이전의 CCTV 녹화본을 비교해 보았다. 배일은 CCTV 동영상을 예나가 새로 찍은 사진과 각도가 가장 유사한 지점에서 정지시켰다.


“둘 다 흐릿하지만 체형이나 얼굴 윤곽이 비슷하네요.”

배일이 말했다. 동일인일 확률 90% 이상. 판별 프로그램의 판단 역시 예나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예나를 제 무릎에 앉힌 정오가 예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예나가 보자마자 알아봤다고 했어요.”

“역시 예나는 똑똑하네요.”

배일이 예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지헌은 묵묵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유의미한 증거가 있으니 수사협조를 받기가 수월할 것 같습니다. 바둑대회 주최 측에 요청해놓겠습니다.”

배일은 바둑대회의 주최 회사를 파악하는 한편, 지헌이 전해주는 책임 감독관의 연락처를 받아 연락을 시도했다.


“대회는 한 시간 후엔 마무리된다고 합니다. 저희 팀 순경이랑 같이 가셔서 확인하시죠. 저는 오후에 다른 일이 있어 동행하지는 못하겠네요. 죄송합니다.”

연락을 마친 배일이 돌아와, 따라가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후배 경찰을 소개해주었다.

이윽고 현장 수사를 맡은 순경과 인사한 세 사람은 경찰서를 떠났다. 용의자 특정이 가능해졌다는 안도감에 정오의 안색은 좋아진 반면, 지헌은 여전히 표정이 어두웠다. 정오가 이를 알아채고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오빠, 괜찮아?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은데.”

“아니야. 괜찮아.”

지헌은 더 내색하지 않았다.

정오도 지헌에게서 바로 눈길을 거두고 차에 올랐다. 한숨을 돌린 후에야 예나에게 바둑대회에 대해 물어볼 여유가 생겼다.


“예나, 대회는 어땠어? 재미있었어?”

“응. 대국에서 세 번 이겼어.”

“세 번이나? 와아! 우리 예나 정말 잘했다!”

“응. 사실 네 번째도 이길 수 있었는데 못 했어. 꼭 이기고 싶었는데.”

엄마에게 대답하며, 아이의 표정이 금세 일그러졌다.


“우리 예나가 꼭 이기고 싶었구나. 그런데 그 아줌마를 발견하는 바람에 대국을 그만하게 된 거야?”

엄마가 모든 것을 헤아려주니 예나는 크게 끄덕이며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이기고 싶었는데 졌어…….”

흐어어엉.

그제야 놀란 마음에도 울 만한 공간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우리 예나는 시합보다 더 중요한 걸 해낸 거지. 정말 잘했어. 대회는 나중에 또 기회가 있을 거야. 그때는 더 잘할 거고.”

정오는 그런 아이를 안아서 다독이고 격려해주었다.


 

*

두 아이의 어린이집 방학. 또한 오늘은 바둑학원 방학에, 예나와도 놀 수 없는 데다가 남편은 출근.

아이 둘과 함께 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 진서는 내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박도빈과 박도윤. 두 아이는 절대 같은 놀이는 하지 않으려고 했고 서로 엄마를 차지하겠다며 떼를 썼다. 한 아이와 놀아주면 다른 한 아이는 어김없이 말썽을 피웠다.

이번에도 딸과 퍼즐 놀이를 하는 사이에 방에 들어간 도빈이 일을 저질렀다.


“박도빈, 이게 뭐야.”

“헉!”

엄마가 부르자 도빈은 움찔하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팽개치고서 도망갔다.

그렇게 도망을 갈 거면서 왜 일을 저지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아이였다.

이번에 아이가 저지른 짓은 동생 인형의 집 지붕과 마당에 하얀 가루 뿌리기. 마치 지붕에 눈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진서는 어제 아이들과 눈의 여왕이 나오는 영화를 본 것이 기억나 힘없이 웃었다.

방바닥에는 도빈이 내던진 약통이 도르르르 구르고 있었다. 상처에 뿌리는 가루약 통. 범행의 증거였다.


“박도빈 이리 와. 와서 엄마랑 얘기해.”

“안 때릴 거야?”

“그래.”

“용서해줄 거야?”

“그래.”

아이를 혼내는 것도 힘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엄마가 자신을 혼내지 않을 거란 확신을 얻은 도빈이 다가왔다.


“왜 여기 이걸 뿌렸어?”

“눈 내린 집을 표현하고 싶었어.”

눈 내린 집을 표현하고 싶은데 엄마가 주방엔 못 가게 하니 약상자에서 약통을 꺼내 가루를 뿌린 거였다.


“앞으론 이런 거 할 때 엄마한테 먼저 얘기해야 해. 알았지?”

“응. 먼저 얘기하면 하게 해줄 거야?”

“봐서.”

진서는 미소 지어주었다. 눈 내린 집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아이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기특하여 더는 나무라지 않았다.

아이에게 예술가적 자질이 있나 보다. 미술학원을 알아볼까…….

그러나 다정하고 자애로운 엄마의 단꿈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인형의 집에 폭폭 쌓인 가루약을 털어내고 물로 닦고 다시 정리한 후 아이들에게로 돌아온 진서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바악도오비인!”

분노에 찬 진서의 목소리에 온 집 안의 창문들이 부르르 흔들렸다.

*

지헌과 정오와 예나는 바둑대회장 앞에서 경찰과 다시 만나 안으로 들어갔다. 대회는 어느덧 최종 결승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아직 대회가 끝나지 않아 예나는 관중석에서 스크린으로 1등과 2등을 가리는 대국을 지켜보게 되었다. 정오는 그 옆에서 예나와 함께 있었고 지헌과 경찰은 대회장 이곳저곳을 살피며 돌아다녔다.

접전 끝에 흑돌을 잡은 아이가 승리하자 예나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짝짝 쳤다. 어느새 아이는 시합에서 진 아쉬운 마음을 잊고 순수한 마음으로 대국을 관전하게 되었다. 정오는 예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윽고 대회 시상식까지 마친 후 네 사람은 대국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다들 정리를 하느라 어수선한 와중에,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헌이 총 책임 감독관에게 안내했다.


“안녕하세요. 광진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아, 네. 연락받았습니다. 안녕하세요.”

경찰이 인사하자 감독관이 공손히 대답했다. 몇 시간 전에 내쫓은 사람이 경찰까지 대동하여 나타나 어쩔 수 없이 수사에 적극 협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분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 감독관을 하셨던 분인데요. 아시는 분이 있을까요?”

경찰이 물음과 함께 예나가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경찰의 물음에 책임 감독관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여자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른 사람을 불러왔다.


“아, 이분.”

다른 감독관 역시 똑같은 표정으로 사진을 바라보다가 소리를 높였다.


“아마추어 바둑협회에서 아르바이트 추천받아서 온 걸로 기억해요.”

감독관이 들고 있던 자료를 넘겨 명단을 확인했다.


“표지애 씨라고 나오네요. 그런데…… 출석 확인은 됐는데 마감 확인은 아직 안 하셨네. 그러면 일당도 못 받는데.”

“이분, 지금 어디 계시는지 알 수 있습니까?”

이어진 경찰의 물음에 감독관은 휴대폰을 들어 ‘표지애’라는 이름 옆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잠시 후 감독관은 고개를 저었다.


“전화는 안 받는데…… 자택 주소가 여기 적혀 있네요.”

바로 연락이 닿진 않았지만, 그래도 신원을 확인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네 사람은 표지애의 자택 주소와 연락처를 확보한 후 대회장을 떠났다.

용의자의 신원을 파악했으니 예나가 계속 옆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정오는 예나를 데리고 집으로 떠났고 지헌만 남아 경찰과 동행하게 되었다.

용의자의 자택은 천호동 주택가의 빌라 3층이었다. 차에서 내려 빌라를 올려다보며 용의자의 집이 빌라 어디쯤인지 가늠해보는 사이에 열려 있던 3층의 창문이 닫히는 게 보였다.


“저 집인 것 같은데요.”

지헌의 의견에 경찰도 고개를 끄덕였다. 3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이 초인종을 누르려는 찰나에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하지만 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확인한 여자는 곧장 문을 닫으려 했다. 그사이에 경찰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경찰입니다. 표지애 선생님 본인이시죠?”

“뭐예요? 무, 무슨 일로 그러세요?”

여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헌은 경찰의 뒤에서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예나의 사진 속 그 여자가 확실했다. 표지애의 뒤쪽에는 커다란 여행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급히 여행을 떠나려는 모양이었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혹시 5월 13일에 화양동 학원가 지나시지 않으셨습니까?”

“5월 13일? 두 달도 전의 일인데,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해요.”

경찰이 동영상 캡처 화면을 여자에게 보여주었다.


“혹시 화면에 찍힌 사람이 선생님 아니십니까?”

“어머, 나 아니에요. 이런 옷 입지도 않고요. 이런 모자도 없어요. 그리고 이 옆에 있는 애는 누군데요. 이런 애는 알지도 못해요.”

마치 준비한 듯한 반응이었다. 격하게 부정한 표지애는 잠시 멈칫하고는 생각에 잠긴 듯 눈동자를 굴리다가 경찰에게 물었다.


“잠깐만요. 5월 13일이라고 했죠?”

“네. 5월 13일.”

“그럼 얘기할 수 있겠네요. 5월 13일이 제 친구 생일이라 친구 만나러 여수에 갔었어요. 오후 6시쯤 도착했고요.”

표지애는 휴대폰을 꺼내 자신의 SNS 계정 사진을 보여주었다. 5월 13일 오후 6시 50분. 업로드 일시가 정확하게 찍힌 글자에 지헌의 이맛살이 우그러졌다.


“사진에 날짜 시간 보이시죠? 위치태그도 돼 있고요.”

여수의 유명한 조형물 앞에서 찍은 독사진이었다.

서울에서 여수. 고속열차를 타도 두 시간 반 이상은 걸리는 거리다. 게다가 화양동에서 역까지의 거리, 여수역에서 표지애가 사진을 찍은 장소까지의 거리를 고려하면 그녀는 사건의 범인일 수 없었다.

범인이라면 5월 13일 오후 6시 50분에 여수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헌은 표지애의 말을 곧장 신뢰할 수가 없었다. 표지애는 억울하다는 듯 큰 소리를 냈지만 미약하게 떨고 있었고 눈빛도 불안정했다.

무엇보다 채은비가 거짓말을 하고 발뺌할 때의 행동과 말투, 눈빛이 보였다. 표지애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지헌은 표지애의 뒤편에 있는 가방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지금 어디 가시려는 중인가 봅니다.”

“네. 여행이요.”

“바둑대회 감독관 아르바이트를 하시다 말고, 여행을 가신다고요.”

“그럼 안 되나요? 원래 여행 계획이 잡혀 있었어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끄덕인 지헌은 고개를 돌려 여자가 보여준 사진을 한 번 더 눈여겨보았다.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헌이 다시 물었다.


“이건 5월 13일 사진이 맞습니까?”

사진의 상점들엔 모두 불이 켜져 있는 반면 맨 끄트머리 단 한 곳, 약국은 불이 꺼져 있었다. 5월 13일은 목요일. 목요일 오후 6시 50분에 이렇게 큰 약국이 문을 닫을 확률은?


“다른 상점 불은 켜져 있는데 약국 불은 꺼져 있네요. 약국은 일요일에 문을 닫죠.”

지헌이 지적하자 경찰이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 끄덕였다.


“……그 약국이 그날 어쩌다 문을 닫은 거겠죠! 아니면 잠깐 자리를 비운 거겠죠!”

표지애는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부정했다. 정작 지헌은 그 반응을 확인한 후에 여자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단 사실을 더욱 확신했다.


“여수에 사는, 5월 13일이 생일이라는 그 친구 이름을 여쭤봐도 될까요?”

지헌의 침착한 압박에 표지애가 바짝 마른 아랫입술을 말아 감추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도 보였다.


“대답만 해주시면 되는데, 왜 아무 말씀도 못 하시죠?”

“아니, 절 왜 그렇게 몰아붙이세요!”

기어이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