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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형의 기억 (129/183)


129. 형의 기억
2022.07.23.



 
재광이 젊은 날을 다 바쳐 만든 지금의 세련그룹은 과자 사업을 통해 성장한 기업이다.

지금은 재광이 직접 제품 개발을 하진 않지만 젊었을 때는 쉴 틈 없이 전국 각지, 해외 각지를 돌아다니며 맛을 공부하고 연구했다. 재광이 만든 수많은 스낵류들은 여전히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사랑받고 있다.

식품 사업 하면 세련그룹. 몇십 년이 지나도록 깨지지 않는 공식이라 재광 또한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재광은 미각이 예민한 인재들을 아끼고 사랑한다.

재광의 웃음 덕에 정오는 조금 긴장이 가라앉았다. 예나도 재광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칭찬까지 해준 것에 흐뭇해하며 담뿍 미소 지었다.


“우리 예나, 사탕은 좋아하려나?”

재광이 고개를 기울이고 예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예나는 사탕을 많이 먹지는 못하게 하는 엄마의 눈치를 잠깐 보다가 대답했다.


“네.”

“그래. 그럼 이따가 밥 다 먹고 나서 할아버지랑 사탕 만들어보자.”

회사에서 신제품으로 사탕 만들기 키트라도 나온 모양이었다.

예나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사탕을, 심지어 만들어 먹을 수 있단 사실에 신이 났다. 할아버지와 함께 만들어 먹는 사탕이라면 엄마도 제지하진 못할 터였다. 덕분에 예나는 채소 반찬도 맛있게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새아가는 음식이 입에 맞나?”

“네. 아주 맛있습니다.”

“그래. 많이 들어요.”

재광은 예나를 향해서는 눈빛으로 하트를 발사하지만 정오에게는 어색해했다.

며느리가 반가운 마음, 아이를 잘 키워준 며느리에게 고마운 마음은 가득했지만 제 아내와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미안함이 더 컸다. 그래서 식사시간은 은근히 어색하고 조용했다.

그 와중에 다이닝룸으로 사람이 들어왔다.


“아버지.”

지헌의 이복형 정지태였다.

밥을 한 숟갈 떴던 정오는 깜짝 놀라 음식물을 꿀떡 삼키고서 고개를 돌렸다. 지헌만큼이나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가까이에 있었다.

뉴스 기사에서 접했던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사진발을 못 받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래. 이제 오냐? 밥 다 먹고 오려나 했네.”

재광이 뚱하게 대답하는 사이에 정오는 입을 쓰윽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옆에서 정오의 반응을 눈여겨보던 지헌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정오의 손을 잡아당겨 다시 앉혔다. 아내가 미남을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남편은 아내의 반응이 신경 쓰였다.

정작 정지태는 그런 지헌의 태도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정오에게 무덤덤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정지태입니다.”

“네. 이정오라고 합니다.”

지헌이 형이다, 정지헌 씨 아내다, 같은 부차적인 소개 없이 담백한 인사가 오갔다. 정오는 다시 긴장하게 되었고 지태는 정오의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예나구나.”

“안녕하세요.”

입술 끝이 변함없는 듯, 아니면 살짝은 올라간 듯, 미소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반응으로 아이를 쳐다본 지태는 그대로 자리를 돌아 재광의 옆자리에 앉았다. 지헌에게 인사를 건넨 건 그 후였다.


“오랜만이다.”

“응.”

지헌은 지태가 건넨 인사에 아주 짧게 대답했다. 지헌의 옆자리에 있던 정오의 눈만 커졌다.

그게 다야? 1년 만에 만나는 거라며.

이들은 1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 같지 않게, 어제도 보고 오늘도 보는 듯이 싱겁게 인사했다. 이미 지헌에게 들은 것이 있는데도 새삼 충격이었다.

정지태는, 정지헌과 그의 가족들을 보고 싶어 본가를 찾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태는 자리에 앉자마자 재광에게 식사 자리와 동떨어진 이야기를 건넸다.


“소식 들으셨어요? 내일 대법원장이 은퇴할 거라고 합니다.”

“그렇게 됐다니? 몸이 안 좋다는 얘기는 건너건너 들었지만.”

“청와대에서 바로 차기 대법원장 후보를 지명할 거라고 하네요. 채서복 판사가 유력하고요.”

판사 채서복. 채은비와 채은엽의 부친이었다. 지헌과 영 관계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식사 자리에는 부적합한 이야기라 지헌과 정오의 젓가락질이 동시에 멈추었다.


“꼭 식사시간에 그런 얘기를 해야겠냐.”

재광이 먼저 한소리 했다.


“그럼 무슨 얘기를 할까요.”

마치 이 자리를 책임지는 진행자라도 된 양, 지태가 재광에게 물었다. 정말 대화가 부족한 집안이구나 싶어 정오가 고개를 숙이고서 몰래 눈치만 보고 있을 때 다시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결혼하겠습니다.”

정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지헌에게서 들려온 말이 아니라 정지태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지헌 역시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지태를 바라보았다. 재광도 놀란 듯했다.


“네가 왜.”

“저는 하면 안 되나요? 쟤도 했는데.”

재광은 턱짓으로 지헌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사람은 있고?”

“사람 없이 혼자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데.”

“조만간 다시 말씀드릴게요. 오늘은 제가 주인공이 아니니까.”

주인공이 아니라고 하면서, 주인공 같은 짓을 하고 있잖아!

지헌의 두 눈에선 불꽃이 이글거렸다.

재광이 예나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애라도 생긴 건 아니지?”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죠.”

흡. 정오는 결국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웃음을 재빨리 삼켰다.

이 사람들, 어쩌면 표현이 서툴러서 그간 대화 없이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친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세 사람 모두 꼭 닮은 사람들이라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미흡한 모습들이 정오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이 어색함 속에서 예나만이 묵묵히 식사에 집중했다. 목표가 확실한 예나는 평소보다도 밥그릇을 빨리 비웠다.


“할아버지, 저 밥 다 먹었는데요. 사탕 언제 만들어요?”

“예나야.”

다른 이들은 아직 식사 중이라 정오가 주의를 주었지만, 역시 재광은 예나의 재촉을 반겼다.


“그래! 우리 예나가 그래서 밥을 빨리 먹었구나! 그럼 우리 사탕 만들러 갈까?”

재광은 식사도 마치지 않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다른 이들도 같이 일어났다.

재광이 예나를 데려간 곳은 주방 옆 방이었다. 신제품 사탕 키트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지헌이 아버지의 작업실이라고 알고 있는 공간에, 널따란 철판 작업대와 색색깔의 밀가루 반죽덩이들이 있었다. 밀가루 반죽덩이가 아니라 사탕 반죽덩이였다. 직접 사탕을 만들 계획이었던 것이다.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하신 거예요……?”

적잖이 놀란 지헌이 멍하니 물었다. 그 옆에 선 지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어렸을 때는 라면 한번 끓여주신 적이 없던 아버지가, 손녀를 위해 사탕을 직접 만드시겠다니.


“할아버지가, 우리 예나 만들어주려고 밤새 연습했지!”

재광이 반죽을 스트레칭시켜 공기를 불어넣으며 말했다. 손녀딸에게 점수를 따려고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

정말로 밤새 연습했는지 재광의 손은 철판 위에서 능란하게 움직였다. 반죽덩이들이 길게 나열되며 ‘정예나’라는 이름이 커다랗게 만들어졌고 그 옆에 하트가 박혔다.


“이제 이 커다란 게 예나 손가락만 한 작은 사탕이 될 거야. 자, 우리 예나도 한번 굴려봐라.”

이름을 빚은 사탕반죽을 가래떡처럼 길게 늘여뜨려 굴리던 재광이 말했다. 예나가 눈을 빛내며 다가와 재광의 옆에 섰다.

예나의 고사리 같은 손과 재광의 거친 손이 리듬을 타듯 움직였다. 사탕 반죽은 가래떡 굵기에서 떡볶이떡 굵기로 차츰 변해갔다. 예나의 손이 지나가며 굵기가 일정치 않아진 곳은 재광이 재빨리 보완했다.

이윽고 기다란 사탕 줄기가 만들어졌다. 재광은 식은 사탕줄기를 빠르게 커터로 쳐냈다. 예나처럼 지헌의 입도 벌어졌다.

아버지는 저런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는 저런 사람이 아니다…….

저렇게 아이와 허물없이 놀아주며 산타할아버지처럼 선물을 안겨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 변화가 얼떨떨하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지헌이 처음에 재광에게 딸을 소개했던 그대로, 예나는 세상을 구하는 공주님이었다. 아이의 얼굴을 보면 뭐든 주고 싶어지는 그 마음을 지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 봐라. 세상에서 하나뿐인 정예나 사탕이다.”

할아버지가 건넨 사탕의 단면에는 정예나란 이름이 예쁘게 박혀 있었다. 그 옆의 하트까지 아주 앙증맞았다.


“우와!”

예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은 낯선 이름이 이제는 마냥 달콤하게만 보였다. 재광은 사탕을 통에 가득 담아 예나에게 안겨주었다. 예나는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뒤편에서 지헌도 정오와 함께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 예나가 바둑도 잘 둔다고 하지? 할아버지랑 바둑도 한판 둘까?”

“네!”

사탕 만들기를 마친 후에는 또 곧장 이동이었다. 재광은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아이가 얼마나 바둑을 용하게 두는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재광이 예나의 손을 잡고서 떠나고 정오가 그 뒤를 따랐다.

지헌은 지태가 바로 자리를 옮기지 않고 작업대에 남아 흩어진 사탕들을 모아서 빈 통에 담는 것을 보았다. 이 역시 이상한 모습이었다. 지헌이 지켜보자 지태는 자신이 못 할 짓이라도 했느냐는 듯 덩달아 빤히 쳐다보았다.


“가져갈게. 괜찮지?”

“내 딸 이름이 박힌 사탕을 갖다가 뭐하려고.”

“사탕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지헌의 인상이 반듯하게 펴졌다. 지헌은 곧장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형은 사랑에 빠진 거였다. 결혼을 하려는 그 사람에게 가져다주려는 것 같았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저렇게 달라 보일 수 있구나. 지헌은 새삼스럽게도 그 사실에 웃음이 났다.


“나는 이만 가야겠다.”

지태가 지헌과 함께 응접실로 이동하며 말했다.


“벌써?”

“일이 바빠. 바둑을 안 좋아하기도 하고.”

아.

지헌은 아주 어렸을 때, 20년도 더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지헌과 지태는 같은 시기에 바둑을 배웠다. 지헌이 지태에 비해 어린 나이에 바둑에 입문한 것이다.

딴 공부에 얽매이지 않는 나이라 지헌은 바둑의 세계에 더 빨리 빠져들었고 지태와 재광이 바둑을 둘 때 옆에서 훈수를 둘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그때 대국에서 참패한 지태가 얼굴을 굳히며 했던 말을 지헌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적당히 지켜보기나 할 것이지 왜 나대냐.”

 
그 말이 상처였을까. 그 무렵 지헌은 지태와 자신의 어머니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고 서서히 멀어져갔다. 지태가 중학생이 될 무렵에는 하루에 한마디도 나누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기억나? 형이 나한테 훈수 둔다고 뭐라고 한 적이 있었어.”

“그럼. 기억하지.”

잊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지나가듯 물었는데, 형은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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