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소문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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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소문의 진상
2022.08.20.
밤늦게 집에 돌아온 재광은 아침에 일어나 깜짝 놀랐다. 자택에도 꽃 선물이 가득했던 것이다. 자신이 회사에 있는 동안 한 번도 연락이 없었던 영미가 묵묵히 꽃 선물을 챙겨 리스트를 만들어놓았다.
영미도 이곳저곳에서 연락을 받을 터였다. 남에게 내 자식을 깎아내리는 말 같은 것을 할 리 없는 사람이니, 축하를 받을 때마다 어디 푸념도 하지 못하고 속앓이만 할 것이다.
마음이 편할 순 없겠지.
그래도 아주 조금씩 마음이 변해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주말에 애들이 집에 왔을 때 찍은 사진 좀 봐. ”
조심스럽게 다가간 재광이 들고 있던 태블릿을 영미의 옆에 놓으며 말했다. 태블릿 화면에 예나의 웃는 얼굴이 큼지막하게 떠 있었다. 영미는 잠깐 눈길을 주었으나 태블릿을 들어보지는 않았다.
“어제 예나한테 전화가 왔는데 말이야. 사탕을 다 먹었다고 또 만들어달라네.”
“…….”
“다음에 예나가 올 때는 당신도 있었으면 좋겠어.”
재광이 영미에게 소망을 말했다. 집안 잔무를 살피던 영미의 손이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다시는 안 볼 사이가 됐는데 무슨.”
“사과하면 받아줄 거야. 외면할 애들은 아니라는 거, 당신도 알잖아.”
재광의 설득에 영미는 입을 굳게 닫았다. 재광은 영미의 어깨를 어루만지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출근할게. 사진은 여기 두고 갈게.”
“필요 없어.”
“그래도 한번 봐봐.”
집안의 구성원 모두가 한 고집 하는 사람들이라 마음을 돌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재광은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묵묵히 집을 나서려는 재광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비서의 연락이었다.
“벌써 출근하셨나? 나는 지금 떠나려는 참인데.”
[회장님, 잠깐 기사를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비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소식을 알렸다. 재광은 비서가 전한 뉴스 기사를 읽었다. 세련그룹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
「세련그룹 오너 일가의 갑질」
「세련식품 신제품 만두에서 발견된 유충」
「세련식품 만두공장 위생 불량. 퇴사자의 고백」
「세련건설 관계사 불법 입찰. 페이퍼컴퍼니 의심」
「세련그룹 2세 정지태 정지헌의 방탕한 생활, 비리 의혹」
「세련식품 사장 정지태, 동생 회사 맥스기획에 일감 몰아주기」
마치 날을 잡은 것처럼 줄줄이 세련그룹에 대한 새로운 기사가 생겨났다.
일반 폭로글에는 세련식품의 제품 사진도 있었고 세련식품 공장의 동영상도 있었다. 출처를 알 수 없고 진위 여부 또한 불분명하지만 그저 부정하기만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지헌 역시 그룹 본사로 불려갔다. 회사에는 기자들의 전화가 빗발쳤고, 연락을 주고받던 클라이언트 회사에서는 경쟁 프레젠테이션에서 맥스기획을 제외했다고 알려오기도 했다. 세련그룹의 모든 계열사 주가가 내려앉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전날 결혼 발표를 한 여파로, 정오 또한 엉뚱한 관심을 받게 되었다. 기자들이 어떻게들 알았는지 정오의 회사 내선번호로 연락을 해왔다.
그 덕택에 정오는 일찍 퇴근하게 되었고 오랜만에 예나의 바둑학원 앞에서 진서와 만나 진서의 산부인과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진서 역시 오늘의 화두는 세련그룹이었다. 살다 살다 그런 일은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 모든 일이 우연은 아닐 거예요. 분명 누군가의 음해가 있는 거예요.”
진서는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일을 꾸몄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았다. 정오도 골똘히 생각해보게 됐다.
정말 누군가의 계략이라면, 대체 누가 그랬을까? 혹시 레미레미?
월요일에 지헌에게 망신당하고서 쫓겨난 레미레미는 다원주류에서도 징계 위기에 놓였다고 한다. 지헌이 다원주류의 임원에게 동영상 파일을 전송한 덕이었다.
동영상을 확인한 다원주류는 맥스기획에 진심 어린 사과의 뜻을 전했고 앞으로 레미레미 같은 관계자는 보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맥스기획에는 다행스런 일이었지만 레미레미는 어딘가에서 칼을 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정오는 금세 고개를 저었다. 레미레미가 꾸민 일이라고 속단하기엔 규모가 너무나 컸다.
진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엄청난 계략인 것 같아요. 혹시 채은엽이 꾸민 짓이 아닐까요? 지헌 씨랑 정오 씨의 결혼 발표에 악의를 품은 거죠.”
정오는 진서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쉽게 단정 짓지는 못했다. 아버지가 대법원장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있으니 채은엽도 몸을 사릴 터였다. 꽤 계획적인 사람이니 이런 기간에 괜스레 일을 만들어 공든 탑을 무너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세 진서의 산부인과에 닿았다. 산전검사 결과를 들으러 가는 것이라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진서는 빈혈이 심한 편이라 의사가 처방해주는 철분제를 먹어야 했다.
“정오 씨는 산전검사 안 받으세요?”
“산전검사요?”
“네. 둘째 생각 있으신 거죠?”
진서의 물음에 정오는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임신하고서 받아도 좋지만 임신하기 전에 받으면 더 좋잖아요. 간염 항체도 확인하고 항체 없으면 미리 주사도 맞고요.”
“…….”
“검사도 간단해요. 시간 얼마 안 걸리는데.”
“아, 그럼 받고 갈까요?”
정오는 진서의 설득에 힘입어 산전검사를 받았다. 진서의 말대로 검사 시간은 짧았다.
검사를 마친 후 병원에서는 기념으로 엽산제까지 챙겨주었다. 걸을 때마다 엽산제 통이 달그락거렸다.
예나를 임신했을 때는 영양제를 일찍 챙겨 먹지 못했다. 그건 지금도 예나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남아 있다. 정오가 엽산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조금 걱정이긴 해요. 지금 낳는다고 해도 예나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
“우리 셋째랑 같이 키우면 되죠.”
진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정오와 비슷한 때에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생각만으로도 든든하고 좋았다. 그런 미래를 상상해본 진서는 지난 주말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다시 말을 걸었다.
“우리도 참 인연인가 봐요. 얼마 전에 도빈이 어렸을 때 사진을 봤는데 글쎄…….”
그러나 사연을 다 얘기하기도 전에 눈앞의 정오가 사라졌다. 정오는 멀찍이 앞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길 한가운데 사람이 쓰러져 있었던 거였다. 정오는 쓰러진 사람을 붙잡고서 외쳤다.
“채은비! 은비야!”
채은비?
정오가 외치는 소리에 진서도 놀라 달려갔다. 길바닥에 쓰러진 사람은 다름 아닌 채은비였다. 창백한 얼굴이 되어 정신을 잃은 은비를 안고서 정오는 호흡을 확인하고는 계속 이름을 외치다가 고개를 들었다.
“병원에 데려다줘야 할 것 같아요.”
“아이들은 제가 데리러 갈 테니 얼른 다녀오세요.”
진서가 택시를 잡아주었다. 정오는 택시기사의 도움으로 은비를 부축하여 병원으로 향했다.
왜 쓰러졌을까. 왜 이런 몰골일까. 은비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무언가를 지키듯 배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순간 묘한 마음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병원에 도착한 은비는 곧장 스트레처에 실려 응급실로 향했다. 비쩍 마른 몸인데 아랫배가 어쩐지 조금 불룩해 보였다. 정오는 의료진에게 은비의 상태를 전하며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덧붙였다.
“주사약 확인해주세요. 임신했을 수도 있어서요.”
“환자분 가족이세요?”
“아뇨. 친구예요.”
“보호자분께 연락해주시겠어요?”
정오는 난감해졌다. 은비의 휴대폰은 잠금상태인 데다가 왜인지 비행기탑승모드로 되어 있었다.
연락처를 알고 있는 은엽에게 연락을 하자니 다른 해코지를 당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지헌에게 연락하여 은비의 어머니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간 한소리를 들을 것만 같았다.
정오는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은비의 옆을 지켰다. 의사가 다녀가서는 별 이상이 없다면 곧 깨어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은비는 한참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못했다. 저녁 7시가 다 되어갈 무렵 국순에게 연락이 왔다. 정오는 응급실에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왜 안 와. 도빈이네 집에 갔어?]
“아니, 엄마, 지금 아는 사람이 쓰러져서 병원에 와 있어.”
[누가!]
“채은비가.”
[……채은비가 쓰러졌는데 왜 네가 병원에 있어. 딴 사람은 없어?]
“응. 없어서. ……내 앞에서 쓰러져서 어쩔 수가 없었어.”
정오의 난감한 목소리에 수화기 저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걱정하지 마. 예나는 오랜만에 도빈이네 집에서 놀고 있으니까 엄마가 데리러 가도 되고, 나중에 지헌 씨가 데려와도 돼.”
[그래. 알았어. 너도 몸조심하고.]
엄마가 무얼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아 정오는 힘없이 웃었다.
*
은비는 사방에 커튼이 둘러진 응급실에서 깨어났다.
“헉!”
섬뜩한 광경에 확 몸을 일으킨 은비는 배를 먼저 만져보았다. 나를 의지하여 제 몸을 키워가던 아기가 여전히 배 속에 있는지 아니면 사라졌는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오후에 은엽이 집으로 직접 찾아와 은비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이미 은엽이 모든 수속을 마쳐놓은 상태였다.
은엽은 의사에게 ‘합법적으로, 임신의 지속이 모체의 건강을 해치고 있으므로’ 수술해줄 것을 당당하게 요구했다. 의사의 확답을 받고서 은엽은 흡족한 표정으로 떠났고, 은비는 곧장 수술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건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은비는 도망치듯 허겁지겁 병원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병원 근처에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아이는…… 무사할까?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커튼이 젖혀지고 사람이 들어왔다. 이정오였다. 섬찟하여 은비의 눈이 퀭하니 커졌다.
“괜찮아?”
“…….”
“길에 쓰러져 있길래 내가 옮겨왔어.”
“네가 왜 여기 있어. 꺼져.”
정오가 움직이지 않아 은비는 자신이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은비가 주삿바늘을 잡아 빼려고 하여 정오가 저지했다.
“안 돼. 주사는 다 맞아야지.”
“내가 어떻게 네 앞에서 주사를 맞겠니? 주사액 안에 뭐가 들었을지 알고.”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그런 말을 해.”
“…….”
“이건 그냥 영양수액이야. ……태아한테도 무리 없는…….”
정오가 조심스럽게 아이에 대해 말했다.
이미 자신의 몸 상태를 다 알고 있는 듯한 정오의 말에 은비는 비참한 기분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그와 동시에 어떤 안도감이 생겨났다.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이를 인정해주는 유일한 이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끔찍했음에도 알 수 없는 위안을 얻게 되었다.
“네 몸을 생각해. 네 상태는 네가 더 잘 알잖아.”
정오가 적당한 조언과 함께 은비의 휴대폰을 들어 건넸다.
“어머니께 연락해. 오시면 그때 갈게.”
“됐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얼른 가.”
“그래. 그럼 연락하는 것만 보고 갈게.”
은비는 정오를 힘있게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정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방금 전 은비의 상태를 확인했다. 은비는 임신을 한 것이 맞았다. 그래서 더욱 혼자 둘 수 없었다. 자신이 떠나면 나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아니면 친한 친구 연락처라도 말해줘. 연락해줄게.”
“…….”
“채은비, 고집부릴 때가 아니야.”
“착한 척하지 말고 꺼지라고! 내가 너네 때문에 무슨 짓을 했는지나……”
은비는 말을 하려다 말고 당황한 듯 입을 꾹 닫았다. 정오의 눈이 커졌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은비가 무언가 비밀을 손에 쥐고 있는 것 같았다.
“……뭐?”
“됐어. 가.”
“무슨 짓을 했는데?”
“…….”
“대체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거니?”
정오는 은비의 입술이 순식간에 바싹 말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채은비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세련그룹의 온라인테러와 관계된 걸까. 아니면 채은엽?
아니면 우리 예나?
“얘기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줄 테니까.”
“약점 한번 잡았다고 친한 척하지 마. 역겨워.”
은비는 기운을 회복한 듯 피식 비릿한 비웃음까지 지으며 비아냥조의 질문을 건넸다.
“내 배 속에 있는 애가 정지헌 애라도 네가 이럴까?”
“그럴 리가 없지. 차라리 네가 상상임신을 했다고 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겠지.”
그러나 이정오가 그런 도발에 넘어갈 리 없었다.
“다시 물을게. 채은비, 네가 알고 있는 게 뭐야.”
정오는 더욱 진중해진 목소리로 거듭 물었다.
은비의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