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너밖에 모르는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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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너밖에 모르는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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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너밖에 모르는 바보
2022.08.24.
얼굴만 봐도 싫은 애들이 있다.
은비는 사실 정오를 처음 본 순간부터 싫어했다.
키도, 체구도, 입학성적까지도 비슷했던 같은 반 아이.
“우리 반에선 이정오랑 은비가 제일 예쁜 것 같아.”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 만들어놓은 프레임 속에서 은비는 정오와 자주 비교당했다.
“에이, 나보단 정오가 훨씬 더 예쁘지.”
자신과 이정오를 동급으로 평가하는 친구들에게 실망스러우면서도 은비는 웃으며 겸손을 떨었다. 그렇게 얘기하면 ‘아니야, 네가 더 예뻐’라고 말해주어야 하지 않나? 은비의 친구들은 그건 맞는 말이라는 듯 입을 꾹 닫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은비는 급식소의 한 아줌마와 정오가 사이좋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정오는 급식소 아줌마하고도 잘 지내네?”
“쟤 엄마잖아. 몰랐어?”
은비가 스치며 꺼낸 말에 친구가 대답했다. 은비는 깜짝 놀랐다.
엄마가 급식소에서 일을 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표정이 밝을 수가 있지? 창피하지도 않은 거야?
“애들이 그러는데 이정오, 엄마랑 둘이 산다더라. 아빠가 없나 봐.”
“…….”
“근데도 진짜 성격 좋다. 나는 정오도 너처럼 부잣집 딸인 줄 알았어.”
은비는 친구의 평이 거슬렸지만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뒤로 은비는 이정오를 더욱 유심히 보게 되었다.
이정오는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제 엄마와 마주쳤을 때 다른 친구들이 물어오면 정오는 밝은 얼굴로 엄마에게 친구들을 소개했다.
집이 찢어지게 가난하단 것도 아빠가 없이 태어난 아이라는 것도 엄마가 급식소 주방에서 일한다는 것도 그 어떤 사실도 그 아이를 나락에 빠뜨릴 수 없었다.
주눅 들지 않는 아이. 이 치열한 학교생활을 너무나 순탄하게 해내고 있는 아이. 은비는 힘들게 유지하는 친구 관계를, 너무나 쉽게 만들어가는 아이.
사실은 그 아이가 웃으며 돌아다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 싫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학창시절 내내 거슬렸던 이정오.
평생 또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십여 년 후 회사에서 다시 만났다. 그것도 바로 옆 팀, 같은 카피라이터로서.
이정오는 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사랑받고 자란 티를 냈고, 그래서 더 사랑을 받았다. 그사이 미혼모가 되었는데도 주눅 들지도 않았다. 그것이 은비의 신경을 긁었다. 한편으로는 조바심이 났다.
내가 널 미워하기 위해서 네가 더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서 억울했고, 그 억울함을 풀 수 없어서 괴로웠다.
그 안에서 계속 몸부림치며, 제 만족감을 채우지 못해 힘들어하고 불행해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었다.
***
“얘기해. 얘기해줘야 너를 도울 수 있어.”
정오의 강단 있는 목소리에 은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는 어째서 내 일에 이렇게도 진지할 수가 있지? 정말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듯이, 어떻게 이토록 심각할 수가 있지?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너는 내가 밉지도 않니?
진심으로 물어보고 싶었지만 은비는 마음을 숨기며 코웃음 쳤다.
“미쳤어? 내가 너의 뭘 믿고 내 얘길 털어놔.”
결국 정오도 더 추궁하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은비는 멀어지는 정오에게로 손을 뻗었다가 내려놓았다. 정오가 자신을 떠나려는 게 아니라 화장실에 가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응급실에서 일반병실로 자리를 옮긴 은비는 살아갈 방법을 궁리했다.
다들 은비가 수술을 잘 끝마쳤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대근의 압박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함대근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가는 아빠에게까지 불똥이 튈 수 있다.
아빠가 무사히 대법원장이 되기까지는 말썽을 만들지 말아야 했다. 집안에는 함대근이 필요했다. 하지만 함대근과 결혼을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며칠만 버티자. 아빠의 인사청문회가 끝날 때까지만.
이것저것 생각해보고 있을 때 병실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어? 엄마, 왜 왔어, 여기까지.”
“아니, 걱정돼서 왔지.”
은비는 정오와 대화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금방 유추해냈다. 정오의 엄마, 이국순 여사까지 병원을 찾아온 것이다.
“다 큰 딸 걱정할 게 뭐 있어.”
“친구는 괜찮대?”
“응. 괜찮은 것 같아.”
“둘 다 저녁 안 먹었잖아. 이거 가지고 들어가서 먹어.”
은비는 경악할 노릇이었다. 이국순 여사가 도시락까지 챙겨 온 모양이었다.
“엄마는.”
“엄마는 대충 먹었어.”
“엄마가 갖다 놔줘. 나는 물 좀 사 올게. 빨리 올게.”
“그래.”
“아참, 엄마, 엄마한테 선견지명이 있나 봐. 채은비가 쓰러지는 바람에 막 뛰게 됐는데 신발이 편한 거라 안 넘어졌어.”
“것 봐라. 그래도 뛰어다니지는 마. 항상 조심하고.”
대화가 끊어지고 문이 열렸다.
은비는 곧장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서 자는 척했다. 국순은 그런 은비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와 침대에 붙어 있는 상을 올리고 갖고 온 음식들을 줄줄이 내려놓았다. 남의 병실에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은비는 결국 눈을 떴다.
국순이 이를 알아보고서 말을 걸었다.
“일어났어요? 저녁 먹어야지.”
“제가 정오를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돼서 오셨나 봐요?”
은비는 뾰로통하게 쏘아붙였다. 은비의 빈정거림에도 국순은 인정하는 듯이 웃어 보였다. 반쯤은 핑계를 대며.
“그냥…… 밥은 챙겨 먹었나 해서 왔어요.”
“…….”
“내가 그래. 딸 하나밖에 없어서 그래요. 미안해.”
사실 국순이 이토록 딸을 따라다니게 된 것도 은비 때문이었다. 13년 전, 국순은 은비와의 일로 서울의 일자리를 잃고 군산으로 가게 되었다. 공부하는 딸을 홀로 두고 돈을 벌러 떠나는 엄마의 심경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냥 혼자서도 열심히 씩씩하게 잘해나가는 딸이 대견하다가도, 작은 일에 속이 타들어 갔다.
어느 날인가는 수행평가과제를 못 챙겨서 감점을 받았다고 시무룩해했다. 그날은 가슴이 내내 아렸다. 내가 갖다 주면 되었을 텐데, 나만 서울에 살았어도 우리 딸이 감점을 받지는 않았을 텐데, 계속 자책했다.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마다 아이가 우산을 가져갔는지, 비는 안 맞았는지 계속 걱정하고, 아이가 아프지는 않을지 초조해하고.
그렇게 걱정하는 게 버릇이 되었는지 함께 살게 된 후에도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절부절못했다. 어쩌면 이렇게 달려오는 것으로 그때 엄마로서 딸에게 충분히 해주지 못한 한을 풀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녀 사이를 이렇게 갈라놓은 은비를 언젠가는 속으로 원망했는데, 이렇게 아파 누워 있는 모습을 보게 되니 또 마냥 가여웠다.
“혼자 살 때는 먹을 걸 잘 먹어야 해. 밥 잘 챙겨 먹어요.”
국순은 도시락만 펼쳐놓고서 바로 병실을 떠났다.
은비는 분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내 속이 울렁거렸는데. 그 도시락들을 보고 있자니 황당하게도 식욕이 도는 듯했다. 은비는 절대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 위로 더욱 당황스럽게도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비통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나는 영원히 이정오를 이길 수 없겠구나.
*
진서는 오랜만에 예나까지 데리고 집으로 왔다. 도빈의 텐션이 더욱 높아진 건 말할 것도 없다.
너무 깔깔거리며 뛰어다니기만 하기에 진서는 기억을 더듬어 잔소리했다.
“박도빈, 너 예나 초대하게 해주면 같이 책 읽는다며.”
“응! 알았어!”
도빈은 높아진 목소리로 거실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책, 어린이 속담 책을 집어 들고서 몇 장을 넘기더니 정신없는 주방으로 들어왔다.
“엄마, 오늘도 콩밥이야?”
“그렇지. 왜?”
“그럼 나 여기다가 콩 하나만 주면 안 돼?”
도빈이 그릇을 하나 들어 내밀었다. 진서는 밥통을 열어 콩 몇 개를 그릇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콩은 뭐하게?”
“하나면 되는데. 이걸 반으로 나눠야 해. 콩 한 쪽도 나눠 먹어야 한다잖아.”
책에서 속담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진서는 도빈을 타일렀다.
“이걸 어떻게 나눠. 이런 거 나눌 생각 하지 마. 손 다쳐.”
“책에는 이렇게 나오는데?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
“그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고.”
“그럼 콩 한 쪽도 나눠 먹으려고 하면 손 다친다, 이게 맞는 말 아니야?”
도빈의 대꾸를 듣고서 예나가 다가와 까르르 웃었다. 예나는 도빈의 곁에 있는 책을 한 장 더 넘기고는 진서에게 물었다.
“아줌마, 백지장이 뭐예요?”
“하얀 종이 한 장을 말하는 거야.”
도빈도 책을 읽어보고는 물었다.
“엄마, ‘맞들면’은 무슨 뜻이야?”
“물건을 양쪽에서 마주 든다는 뜻이야.”
진서가 대답하기 무섭게 도빈과 예나가 건넛방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나온 두 아이들은 정말로 종이 한 장을 맞들고 움직이느라 뒤뚱거렸다. 결국 얄팍한 종이는 찢어지고 말았다.
“엄마 이상해. 백지장은 맞들다가 찢어지는데? 그냥 혼자 드는 게 나은데?”
……도빈이가 예나를 따라 똑똑해져야 하는데, 예나가 도빈이를 따라 바보가 되게 생겼다.
도빈이 책을 한 장 더 넘기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엄마, 그리고 이것도 이상해. 어떻게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 돌다리를 두들겨보려면 차에서 내려야 하는데 그럼 사고 나잖아.”
“…….”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다가 사고 난다. 이게 맞는 말이지?”
“…….”
“엄마. 속담은 누가 만들었어?”
“옛날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은 정말 안 똑똑하다. 그치 예나야.”
“응. 우리가 더 똑똑해.”
도빈에게 동화된 예나가 해맑게 말했다. 진서는 괜스레 예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예나야.”
“네?”
“미안해.”
“왜요?”
“그냥. 아줌마가 미안해.”
우리 도빈이가 바보라 미안해.
너밖에 모르는 바보라 미안해.
*
아침부터 시작된 사태는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만 했다. 급기야 온라인상에서는 세련식품 불매운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드높아지고 있었다.
이상한 점이 많았다. 지헌의 결혼 발표 후에 갑작스럽게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는 점, 처음 뉴스 기사를 작성한 기자들과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점이 석연치 않았다.
해외 IP의 댓글들을 통해 불매운동의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도 수상했다. 세련식품 공장의 위생상태를 고발하겠다는 글의 작성자, 세련식품 공장의 전직원까지도 정체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다수의 사람들일 수도 있겠으나, 지헌은 시간이 흐를수록 어쩌면 큰 그림을 그리는 한 사람이거나 같은 집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채은엽일까 하는 데는 확신이 없었다. 지금 채은엽 또한 중요한 시기라서 몸을 사릴 수밖에 없을 터였다.
“뭔가 흐름이 있어. 누군가가 여러 사건을 쌓아놓고서 하나씩 터트려가며 반응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지헌이 의견을 내놓자 형 지태 또한 똑같은 수상함을 느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벌 기업의 짓이거나 개인적인 원한 관계일 수도 있어. 나도 알아볼 테니까 너도 한번 알아봐. 돈도 있고 시간도 있고 사람을 부릴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는 놈. 그런 놈이 일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응. 나는 일단 집에 다녀올게. 어젯밤에도 딸 얼굴을 못 봐서.”
심각한 와중에 집엘 가겠다는 지헌의 통보에 지태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못 말리겠다는 듯 픽 웃었다.
정오와 국순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은 지헌은 예나를 데리러 도빈의 집으로 갔다.
예나가 아직 밥을 다 먹지 못해 지헌은 예나를 기다리며 도빈과 알까기를 했다. 지헌은 문득 알까기에 심혈을 기울이는 도빈이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도빈에게 물었다.
“도빈이는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
“예나의 남편이요.”
사심 없는 질문이었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도빈의 대답에 왠지 가슴이 욱신거렸다.
“도빈이의 꿈은 예나의 남편이야?”
“네.”
“또 다른, 되고 싶은 건 없어?”
“없는데요.”
“아직은 없어도 되지만, 언젠가는 다른 것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사랑이래요.”
“…….”
“그래서 도빈이 꿈은 예나의 남편이에요.”
정말이지, 세기의 사랑꾼이 아닐 수 없다.
예전에는 아주 탐탁지 않았지만, 그리고 지금도 조금은 속이 따끔따끔하지만, 정오의 말대로 자신 말고도 내 아이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사랑이라…….
도빈의 말을 되뇌어 보다가 문득 지헌의 눈이 밝게 뜨였다.
그래.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돈도 많고 그만큼의 시간도 많은 사람. 자신에게 악의를 가질 수 있는 사람.
여자 때문에 미칠 수도 있는 사람.
사랑에 빠진 자.
지헌은 며칠 전 회사 제작 1팀 직원에게 지나가듯 들은 말을 기억해냈다. 울고불고하며 회사를 그만둔 채은비가 금세 누군가와 결혼 약속을 했다고 들었다.
그게 누구더라. 흔치 않은 성씨였는데…….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이것저것을 눌러보던 지헌의 손이 한 인물 검색창에서 멈추었다.
함대근.
지헌과 지태의 예측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