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 사랑의 약점 (140/183)


2022.08.31.


재광은 일주일 동안 딱 한 번 집에 들어왔다. 세련그룹에 대한 소식은 뉴스를 통해 모두 확인이 가능했다. 재광에게 한 번도 회사의 사정을 묻지 못했고 재광 또한 얘기해주지 않았지만, 영미도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악재들이 한 번에 찾아왔다고 속단했다. 하지만 잠깐 집에 들른 재광의 통화 내용으로 누군가의 계획적인 소행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그때 불현듯 채은엽이 스쳤다.

채은엽, 채은비. 한때 영미는 이 남매를 가장 지지하던 사람이었지만, 역시 이 두 사람이 가장 교활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나간 모든 일이 뒤늦게 후회되었다.

내가 채은비를 마음에 들어 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채은엽에게 사사건건 법률상담을 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좀 더 아들의 마음을 들어주려 노력했어도, 결혼을 밀어붙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오늘, 영미 또한 함대근의 체포 장면을 뉴스 기사로 접했다. 함대근이 자신의 아들을 입에 담으며 경찰서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영미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함대근이 지껄이는 말을 영미 또한 믿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더 억장이 무너졌다.

내 아들이 나 때문에 위기에 몰렸구나. 내 아들을 내가 몰아붙였구나…….


“사모님!”

일하는 직원이 주저앉은 영미에게 달려와 영미를 일으켜 세웠다. 영미의 두 다리엔 벌써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세상에. 멍 좀 봐요……. 괜찮으세요?”

자리에 일어선 영미는 직원의 부축을 받아 침실로 들어갔다.

세련그룹의 일이 터진 일주일 내내 영미 또한 만신창이였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한 몸살이 내내 이어졌지만 영미는 병원을 찾지도 못했다. 하늘이 자신에게 내린 벌인 것만 같았다.

*

아직 상황을 잘 모르는 맥스기획의 직원들은 제작 1팀으로 찾아와 자신이 들은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했다.


“맞죠? 그 대근물산 대표가 채은비 과장 예비남편! 채은비 과장 이제 진짜 어떡해요?”

“그 함 씨가 질투에 눈이 멀어서 세련 그룹을 테러한 거예요? 정 이사님이 채 과장한테 몹쓸 짓 했다고 생각해서?”

“아빠는 대법원장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남편 될 사람이 그 앞길을 다 망쳐놓네.”

직원들은 채은비에 대해 얘기하며 치를 떨었다. 거의 1주일 동안 세련그룹에 대한 온라인 테러가 이어졌기에 직원들의 피로도가 상당했다.

채은비와 정지헌의 관계를 바로잡는 기사가 올라오기까지 두 시간 동안 온라인 커뮤니티의 여론은 역시 좋지 않았다. 지헌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들끓었다. 정오 역시 속이 답답할 수밖에 없었지만 꾹 참고서 꿋꿋하게 업무를 이어갔다.

고은주 대리가 그런 정오를 불렀다.


“이 대리님.”

“네?”

은주는 정오를 불러놓고 빤히 쳐다볼 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아뇨. 한번 불러봤어요.”

격동의 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의 동료가 괜찮은가 해서.

하지만 그 말은 하지 못하고 은주는 푸념을 내놓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골치 아픈 일인 것 같아요. 약점이 생기는 거잖아요.”

“약점이라고 생각해요?”

“나만 생각할 수가 없다는 건 엄청난 약점이죠.”

“그러네요, 정말.”

은주의 의견에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인 정오가 싱긋 웃었다.


“그런데요, 고 대리님. 약점도 있지만 그 약점을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기도 해요.”

 

 
은주는 정오의 대답이 신기했다. 개인주의자인 고은주에게 이정오는 참으로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정말 힘든 시간을 헤쳐왔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 그녀는 지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고 늘 에너지가 넘쳤다.

그건 정말 사랑의 힘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정말 더 강해지나?

누군가에게 얽매이는 것이 싫어 연애도 귀찮게 생각했던 은주에게 이정오가 주는 자극은 언제나 신선했다.

그사이에 정오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정오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가 조금 더 커졌다.


“저 잠깐 전화 좀.”

“이사님 전화죠?”

“어떻게 아셨어요?”

“이 대리님 표정으로 다 알 수 있죠.”

하하. 내 표정이 어떻기에. 정오는 멋쩍게 웃으며 휴대폰을 품에 안고 자리를 떠났다. 해결할 일이 많아 외박까지 한 남편의 반가운 전화였다.


“여보세요.”

[예나는 어린이집 잘 갔어?]

정오가 정화를 받자마자 지헌은 예나에 대해 먼저 물었다.


“응. 당연히 잘 갔지.”

[아침에 정신없어서 연락을 못 했어.]

“예나도 다 이해할 거야. 괜찮아.”

정오는 지헌이 걱정하지 않도록 든든하게 말했다. 수화기 저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지헌은 많이 지친 기색이었다.


[너무 소란스럽다. 그냥 가족들끼리 소박하게 오순도순 사는 게 내 꿈인데 말이야.]

“정지헌으로 태어난 이상 소박함은 포기해야지.”

[…….]

“빨리 다 끝내고, 집에 와서 자.”

[집에 가면 부인이 재워주시나?]

“풉. 어떻게 재워줘야 하는데?”

[글쎄. 야하게?]

예나에게 하듯 동화책이라도 읽어달라고, 아니면 자장가라도 불러달라고 할 줄 알았건만 이런 막간에도 그는 흑심을 내비쳤다. 100% 짓궂은 농담일 텐데 정지헌의 목소리로 들으면 죄다 진담 같아서 정오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오는 부리나케 화제를 돌렸다.


“음음, 함대근이 기자들한테다 대고 그렇게 말했다는 건, 녹취파일이 있다는 사실까지는 모르는 거겠지?”

[그뿐 아니라 함대근은 채은비나 채은엽을 통해서 잘못된 정보를 얻었을 공산이 크지.]

“맞아! 그런 것 같아! 채은비가 자기 배 속…….”

자기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정지헌의 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더라, 그 말을 하려다가 정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은비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응?]

“아니야. 아니야.”

지헌도 정오가 입을 다문 일에 대해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간 만날 새가 없어서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아야 했다.


[채은엽이 매수한 유전자 연구소 직원이 누군지도 알아냈어. 직원이 우리 예나 혈액을 다른 사람 혈액이랑 바꿔치기한 거였어.]

“그 사람도 잡힌 거야?”

[알아본 방식이 합법적인 건 아니라서 내가 잡아넣을 수는 없어.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수는 있겠지.]

“그럼 오빠가 그 사람을 매수할 거야?”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지.]

“…….”

[탈탈 털어서 뼈도 못 추리게 해야지. 그럼 알아서 채은엽한테 보복하겠지.]

정오는 지헌의 대답을 듣는 내내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이 남자와 평생 같이 살기로 해서 다행이야. 남이었으면, 적이었으면 정말 무서울 뻔했어.

집요하게 괴롭혀서 원하는 바를 얻는 것. 그것이 정지헌의 방식이었다.

*

전날 밤.

지헌은 온라인 테러에 관한 모든 자료를 챙겨서 경찰서로 갔다.

전문해커들을 고용한 덕에 범행의 단초를 확인했고 역추적한 결과 범행 장소까지 대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범인들은 서울 시내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조직적으로 온라인 테러를 자행하고 있었다. 이제 경찰의 도움을 받아 범행현장을 잡아내면 되는 것이다.

경찰은 신중하게 작전을 짜서 아침이 밝아오자마자 현장을 덮쳤다.

그 와중에 지헌은 경찰서에서 뜻밖의 인물과 재회했다.


“지헌아.”

권배일 경사가 나타난 것이다.


“어, 수일…… 배일아.”

놀란 지헌이 멈칫했다가 이름을 불렀다. 배일이 이전에 있던 경찰서는 광진 경찰서였고,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고 했고, 지금 여기는 용산 경찰서인데 왜 여기 있는지, 의아했다.


“지방 발령 났다고 하지 않았어?”

“응. 진주로 발령 났는데 볼일이 있어서 잠깐 왔어.”

“용산 경찰서에?”

“응. 오래전에 여기서 근무했었거든.”

아아……. 지헌은 가만히 끄덕거렸다. 반가운 마음은 크지만 소식을 모르고 살았던 세월만큼의 어색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지헌에게 배일이 먼저 말을 걸었다.


“뉴스 봤어. 너는 세련그룹 일 때문에 온 거야?”

“응.”

“그래.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 당분간은 서울에서 지낼 거라.”

이전과 달리 배일의 태도는 꽤 상냥했다. 지헌은 처음으로 배일이 든든했다.

결전의 날, 그 시작이 꽤 괜찮았다.

함대근이 경찰서에 들어선 시각. 지헌 또한 경찰서에 있었다. 함대근이 기자들 앞에다 대고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지헌 또한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지헌은 빙긋 웃었다.

이 모든 것은 정지헌 때문에 일어난 일이며, 그로 인해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 정도면 자기 죄를 스스로 실토한 수준이었다.

지헌은 개인적으로는 외부의 평가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서 함대근이 어떤 거짓말을 하든 전혀 타격이 없었다.

억울한 것도 없었고 진실을 바로잡아 명예를 회복해야겠단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그저 그 사실로 함대근을 압박할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어찌 됐든 상관없었다.

정오와 예나를 생각해서 모든 일에 조심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충고가 뒤늦게 떠올라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이마저도 금방 해결되었다.

맥스기획의 직원들이 앞다투어 기자들에게 진실을 제보했다고 한다. 직원들은 일찍이 지헌과 은비의 사이를 알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 내용이 직원들에게 모두 까발려졌기 때문이었다. 몇 시간 동안에야 대중의 비난을 받겠지만 기자들이 사실을 바로잡아줄 테니 상관없었다.

*

은엽은 인사청문회 오전 타임이 끝나고서야 함대근의 소식을 들었다.


“이 미친 새X.”

뉴스 기사를 확인하니 절로 욕이 나왔다. 함대근이 생각도 없이 기자들이 달려들 만한 미끼를 던져버린 것이다. 이런 자식과 동생을 결혼시킨다니. 집안의 수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함대근의 정신 나간 행동에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함대근이었다. 은엽 역시 함대근에게 주의를 주어야겠기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변호사님, 빨리 와주셔야겠습니다.]

그런데 은엽이 당부하기 전에 함대근이 선수를 쳤다. 은엽은 시치미를 떼고서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기사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 제가 궁지에 몰려서요. 당장 와주시죠.]

“지금은 곤란합니다. 오늘 인사청문회 있다는 거 아시잖아요.”

[아버님이야 잘하시겠죠. 이건 위급상황이라니까?]

“함 대표님. 흥분하면 지는 겁니다.”

당장 오라며 생떼를 부리는 함대근을, 은엽은 좋게좋게 타일렀다.


“조금만 참아주시면 좋은 소식 들고 가겠습니다. 지금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입니다. 몇 시간만 더 버티면 아버지가 절대 권력을 가지게 돼요.”

[…….]

“일단 회사 변호사 부르시고요. 흔들리지 말고, 묵비권을 행사하셔야 합니다. 여기 일을 무사히 끝내고, 저녁때 가겠습니다. 그때 모든 걸 수습할 겁니다. 아셨죠.”

은엽은 필요한 것들을 당부하고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지금 중요한 건 아버지. 아버지의 인사청문회가 무사히 끝나고 나서 신경 써도 늦지 않는다. 함대근에게 잡힌 약점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은엽은 매순간 치밀하게 행동했다.

돈은 현금으로 받았다. 그리고 문자메시지 기록도, 문서도 파일도 남은 것이 없다.

비자금 조성에 대해선 수사가 어렵다. 혐의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압수수색도 불가능할 것이다.

만에 하나 함대근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고 해도 그들은 어찌할 수 없다. 돈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 두었으니 은엽의 집을 수색한다 한들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급할 거 없다. 그러니 떳떳하게 행동하자.

은엽은 아버지와 함께 짧게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며 차분하게 질의를 준비했다.

오후 1시. 예정대로 순탄하게 인사청문회 오후 타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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