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나 알아, 이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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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나 알아, 이 느낌
2022.09.10.
“엄마, 오늘은 아빠 와?”
“그럼.”
예나는 10분에 한 번씩 같은 질문을 했다.
“엄마, 오늘은 아빠 오는 거야?”
“그래. 온다니까.”
“근데 왜 안 와?”
“일이 늦어지는 거야. 이제 곧 올 거야.”
정오도 그저 기다리는 입장이라 시원한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제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는 안도감에 마음이 놓였다.
정오는 인터넷 뉴스를 통해 모든 사건들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조금이라도 지헌에게, 세련그룹에 피해가 가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모든 일들은 순조로웠다.
모든 불안이 해소된 후, 정오는 배를 매만지며 국순에게로 갔다. 국순은 식탁에서 책을 펴놓고 한식 조리사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었다.
“엄마아.”
돋보기를 내린 국순이 뚱하게 물었다.
“왜. 뭘 또 먹고 싶은데.”
“치. 내가 돼지인 줄 알아? 엄마는 내가 부르기만 하면 꼭 그러더라.”
“그럼 왜 불렀는데.”
“우리 내일 아침에 뭐 먹을 거야?”
국순이 기가 막히다는 듯 픽 웃으며 정오의 엉덩이를 퉁퉁 쳤다.
“아유, 우리 집 돼지. 먹는 생각 못 하면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하고 살려나.”
“아니야. 내가 엄마 앞에서만 그러지, 남들 앞에서는 보통 사람이랑 똑같다고. 일주일 동안 남편 걱정에 식욕도 없었는데 이제야 좀 식욕이 도는 거란 말이야.”
“식욕이 없기는. 네가 끼니를 걸렀어, 뭘 했어.”
“아유 참.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았다는 뜻이잖아.”
국순도 정오의 변명에 편안히 웃었다. 지헌이 회사에 묶여 있는 일주일 동안 집안의 분위기도 무거웠는데, 이제 시름이 풀렸다.
국순은 배를 깎아 정오의 앞에 놓았다. 정오가 예쁘게 깎인 부분을 놔두고서 배 심지에 남은 과육을 발라 먹으려고 하니 국순은 곧장 잘 깎인 한 조각을 건넸다.
“그거 먹지 말고 이거 먹어.”
“아냐. 괜찮아.”
“받아. 얼른.”
국순이 입가로 들이밀어 어쩔 수 없이 정오는 들고 있던 배 심지를 내려놓았다.
“너는 예쁜 것만 먹어. 뭐든지.”
정오는 엄마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지 않는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국순이 건네는 과일을 받아먹었다. 그사이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아!”
가장 먼저 예나가 소리치며 달려나갔다. 정오와 국순도 쫓아갔다.
“와아아!”
지헌이 예나를 번쩍 들어 올린 와중에 정오도 소리를 지르며 다가가 지헌을 부둥켜안았다.
이런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어 얼떨떨했던 지헌의 얼굴이 뒤늦게 밝게 피었다.
“예나 잘 있었어?”
“응. 아빠는 바쁜 거 다 끝났어?”
“응. 다 끝났어.”
“이제 야근 안 해도 돼?”
“그래. 이제 야근 안 할 거야.”
와아아! 예나가 환호했다. 국순도 다가와 물었다.
“고생했네. 아유 고생했어. 피곤하지. 식사는 했고?”
“네.”
“뭐 먹었는데.”
“그냥, 빵…….”
“그거 먹어서 되겠나. 좀 더 먹어. 고등어 구워줄게.”
“아니, 괜찮습니다.”
“얼른 씻고 와.”
지헌이 말릴 틈도 없이 국순은 바로 주방으로 떠났다.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그 사실이 주는 안도감에 지헌은 사실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지헌은 장모님이 차려주시는 칠첩반상을 깨끗하게 비웠다.
“밥 더 줄까? 모자라진 않아?”
“아뇨. 정말 많이 먹었어요. 고맙습니다.”
“아니야. 내가 고맙지.”
지헌의 인사에 국순도 흐뭇하게 화답했다.
“어머니, 저는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어머니도 좋고, 정오는 당연히 좋고, 예나도 좋고. 그래서 집이 너무 좋네요.”
뜻밖의 고백에 정색하며 눈을 세모로 떴던 국순은 이내 웃어버렸다.
확실히, 사위는 처음 만났을 때와 인상이 달랐다. 처음엔 이렇게 곱게 자란 숙맥 같은 녀석이 내 아이의 남편 노릇, 내 손주의 아빠 노릇을 잘할 수 있으려나 싶어 걱정스러웠는데, 알고 보니 사위 노릇까지도 흠이 없는 능청꾼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여자만 태어났으면 좋겠네요.”
“아들일 것 같은데.”
“네?”
“아니야.”
국순은 자신이 사위를 따라 너무 주책을 떨었단 생각에 급히 제 입을 막고는 몰래 웃었다.
*
채은엽이 체포된 후, 회사는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제 몸을 돌볼 시간을 갖게 된 지헌도 정오와 함께 최면 상담 센터에 들렀다. 그간의 안부를 묻는 의사에게 지헌은 그동안 있었던 일과 그사이 느꼈던 감정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채은엽 또한 이야기의 말미에 등장했다.
“채은엽이라는 친구가, 아니, 친구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계속 저와 대치하던 녀석이 체포됐어요. 다른 사람에게 그 녀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채은엽은 사람들을 구워삶기 위해 최면술까지 공부하는 녀석이라 하더라고요. ‘최면술’이라는 말을 듣는데, 어쩐지 두통이 밀려오고 구역질이 날 만큼 속이 울렁거렸어요. ……저한테 최면술 자체에 대한 거부 반응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빨려 들어가듯이 지헌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정오도 왠지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정오는 가슴을 문지르며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너무 몰입했나?’
이상한 느낌이었다.
정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유리벽 너머의 지헌은 두 번째 최면치료에 도전하게 되었다.
“정말 최면술에 대한 거부반응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오늘은 다시 한번 시도해 보죠. 저는 개인적으로 지헌 님이, 과거를 떠올리려 애쓸 때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해요. 거기에 집중해서 최면을 시도해볼 생각인데 괜찮으십니까?”
“네.”
의사를 신뢰하는 지헌이 굵직하게 대답했다.
이윽고 지헌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눈을 감았다.
의사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정오의 오래전 방을 묘사했다. 이번에는 정오에게 방의 바깥 풍경과 실제 살았던 원룸 사진을 받아 이전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이전과는 달리 지헌의 호흡이 꽤 안정되어 있었다.
“방의 풍경이 잘 그려지나요?”
긴 기다림 끝에 대답이 흘러나왔다.
“……네.”
의사는 지헌이 거부감 없이 머릿속으로 방의 풍경을 그려냈다는 데에 조용히 안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혼합된 기억일 가능성도 있었다. 지헌은 이전에 살던 집을 정오의 원룸처럼 꾸며놓기도 했으니.
“그 방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죠. 그 모습은 그려지나요?”
“…….”
“조금이라도 힘들면 얘기하세요.”
의사의 염려에도 지헌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간혹 그의 손끝과 미간이 꿈틀 움직여 정오는 조마조마했다.
한참 후에 지헌이 목소리를 냈다.
“음식을…… 만들어 먹었어요.”
정오의 눈이 맑게 젖어갔다.
“어떤 음식을 만들었나요?”
거기까지는 떠오르지 않는 듯, 의사의 질문에 지헌은 다시 입을 닫았다.
7년 전. 아무 사고가 없었던 보통의 사람들도 특별한 사건이 아니고서야 기억하기 힘들 만큼 오래전이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럼 다른 시간으로 이동해볼까요? 그 방에서 여자친구의 임신테스트기를 발견했죠.”
이전에 기억을 되짚어보려 시도했다가 멈춘 지점이었다. 반응이 나왔던 지점이라 의사는 포기할 수 없었다. 지헌의 미간이 세게 구겨졌다. 정오는 그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아.
지헌이 크게 탄식하며 눈을 떴다. 기억을 자세하게 떠올리는 데는 실패했지만 조금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었다. 지헌은 큰 거부반응 없이 최면에서 깨어났고 구역질을 하지도 않았다. 고통 또한 없었다.
하지만 그 괴로움은 모두 정오에게 옮겨간 듯했다. 정오는 메슥거림을 참지 못하고 바로 화장실로 직행했다.
“우우욱.”
변기까지 가지도 못하고 세면대를 부여잡았다. 먹은 것을 게워내지는 않았지만 구역질은 잘게 몇 번 더 이어졌다.
똑똑똑.
“정오야. 괜찮아?”
상담실에서 나온 지헌이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정오는 금방 대답하지 못하고 호흡을 정리했다.
나 알아, 이 느낌.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어본 정오의 두 눈에 또다시 눈물막이 생겼다.
그래도 오래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어쩐지, 엄청 대단한 녀석이 오고 있는 것만 같은 예감에, 팔에 잔소름이 돋았다.
*
은엽은 계속 갇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희망이 보였다.
일은 모두 보통의 수순대로 진행이 되었으나 무언가 걸리는 것이 많은지 경찰도 검찰도 조금씩 늑장을 부렸고, 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 이르기까지도 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리고 법원에서는 아직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피의자를 체포한 때로부터 48시간 이내에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못하면 경찰은 피의자를 석방해야 한다.
경찰에게서 검사에게로, 검사에게서 판사에게로, 구속영장이 발부되기까지의 48시간은 사실 그 절차만으로도 빠듯하다. 어느 한 군데가 막히기 시작하면 일을 마칠 수 없다.
은엽은 자신이 곧 풀려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제 석방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누군가는 자신을 압박하지만, 또 누군가는 자신을 보호해주는 것 같았다. 은엽은 아버지의 입김일 거라고 믿었다.
체포 당시 흥분했을 때는 꽉 막혀 있던 뇌가 재가동을 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김진구의 휴대폰을 찾은 것은 정말 미스터리였다. 집 안의 모든 것을 때려 부수지 않는 이상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휴대폰을 숨겨놓았는데. 분명히 전원까지 꺼서.
누군가가 휴대폰을 찾아 경찰에 넘긴 것 같았다.
‘정지헌 그 자식이겠지.’
범인이 지헌일 거라고 속단한 은엽은 경찰서를 나서자마자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정지헌, 꼼짝도 못 하게 만들어주리라.’
복수를 다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을 때 유치장의 문이 열렸다.
“채은엽 씨. 나오세요.”
경찰이 어쩐지 처음보다 많이 깍듯해진 듯했다. 그 태도만으로도 은엽은 제 운명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은엽의 얼굴이 은근하게 상기되었다.
은엽은 유치장에서 나와 옷 먼지를 털며 물었다.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석방입니다.”
“불구속수사군요.”
은엽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음속의 미소가 바깥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그럼 그렇지.
‘정지헌, 이것 봐라. 내 아버지의 능력이 이 정도란다.’
은엽은 짜릿한 승리감에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그런 은엽에게 경찰이 숙연하게 말했다.
“일주일 후에 영장 실질 심사를 다시 진행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채은엽 씨,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얼른 가보세요.”
*
누군가의 인생은 저물고 누군가의 인생은 서서히 피어난다.
정오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약국에 들러 임신테스트기를 구입했다.
만감이 교차하며, 자연스레 7년 전의 그날이 떠올랐다.
약국에서 임신테스트기를 처음 구입했던 날.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그날의 기억은 그때의 빨간 두 줄만큼이나 선명하다.
7년 전 그날, 정오가 구입한 네 개의 테스트기는 모두 같은 결과를 말해주었다. 정오는 이 사실을 지헌에게 섣불리 말하지 못하고 망설였지만 지헌은 정오의 방에서 테스트기를 발견했다.
그는 겁을 먹은 정오를 상냥하게 다독이며 함께 병원에 가서 산모수첩을 받아오자고 했었다.
그렇게 든든한 약속을 해놓고서 다음 날 그는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정오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정오에게도 후회의 기억이었다.
그때 내가 그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어머니와 좀 더 강하게 맞섰더라면, 3개월 후에라도, 1년 후에라도 그에게 다시 연락을 해보았더라면. 그럼 우리는 분명히 달라졌을 텐데.
먹먹한 마음으로 정오는 그녀가 놓친 시간을 멋대로 상상해보았다.
아이의 탯줄을 잘라주는 정지헌, 아이의 걸음마에 환호하는 정지헌, 아이와 돌잔치 기념사진을 찍는 정지헌, 아이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정지헌…… 경험하지 못한 예쁜 풍경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지나간 시간들이 안타까워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미소가 눈물을 막았다. 이제 또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에 설레었다. 기대되기도 했다. 그건 7년 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마음이었다.
두근두근두근…….
침실에 홀로 앉아 테스트기의 결과를 기다리는 정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