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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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세 사람
2022.09.24.
그 어떤 외상도 입지 않은 채, 최악으로 치닫는 날이 있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난 날. 그들이 여전히 잘 살고 있으며, 자신을 기억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날.
7년 전 그날.
쓰레기 같은 짓을 하고 경찰서에 잡혀들어왔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김진구와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11월 2일이 어머니의 기일만 아니었더라면.
그날 정지헌을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일이 늦게 끝난 배일은 밤늦게야 꽃집에 들렀다. 바쁜 와중에 김진구까지 스치듯 마주쳐 속이 아릴 때였다. 심신이 많이 지쳐 있었지만 배일은 지헌의 얼굴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지헌은 프러포즈를 준비하려는 것 같았다.
자신이 주문한 조화가 먼저인데, 꽃집 주인은 프러포즈 꽃 주문을 받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꽃집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배일은 지헌을 오래 쳐다보았다. 자신을 알아봐 주었으면 했다.
“내일 세 시 약속이니까, 한 시간 전에 찾으러 오면 되겠죠?”
“네. 그때 오시면 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하지만 지헌은 끝까지 배일을 알아보지 못했다. 지헌은 머릿속이 꽃밭인 것 같았다.
왜 날 기억하지 못해. 나는 너를 잊지 못해서, 용서하지 못해서 너무나 힘들었는데. 내 인생은 전부 지옥이었는데.
배일은 오래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은 어머니의 생신이었다.
전학 간 학교에서도 금방 두각을 보일 만큼 영재였던 배일은 어린이 과학경시대회에서 받은 상장을 들고, 친구에게서 꾼 돈으로 작은 꽃다발을 사가지고 어머니의 병실을 찾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상장도 꽃도 확인하지도 못하고 눈을 감았다.
세상에서 가장 기뻐야 하는 날이, 가장 슬픈 날이 되었을 때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꾹꾹 눌러놓고 살았던 미움이 금방 되살아났다.
배일은 지헌이 맡기고 간 프러포즈카드를 내려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생신에 조화를 사 들고 봉안당에 가야 하는 애통함이 이성을 짓눌렀다.
정지헌, 너를 증오해.
내 인생 전부를 바쳐 너를 여전히 증오해.
***
권배일은 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총이 발사될 리는 없을 거라고 여기면서도, 그의 속을 알 수 없는 만큼 정오는 무섭고 두려웠다.
더군다나 집에는 자신뿐 아니라 엄마까지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엄마도, 권배일도 크게 자극해서는 안 된다.
정오를 빤히 쳐다보던 배일이 허리의 총집을 풀어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정오가 두려워하는 기색을 눈치챈 것이다.
그 와중에 우습게도 배일 몰래 가까이에 놓인 칼 쪽으로 팔을 뻗었던 국순 또한 안심하며 손을 내렸다. 딸은 엄마를, 엄마는 딸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정오는 배일이 자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이해했다. 하지만 좋은 말로 물을 수는 없었다.
“……내 아이한테 왜 그랬어요.”
왜 내 아이를 납치하려고 했지?
왜 그런 쪽지를 숨겨놔서 협박 아닌 협박을 했어. 왜!
“왜 그런 짓을 했어요.”
“그냥 그대로 살았으면 했으니까.”
“…….”
“그대로도 행복했잖아요, 당신은.”
“…….”
“정지헌이 없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배일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물론 당시의 배일은 조금 오해를 하고 있었다. 채은비가 정지헌의 결혼 상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정오가 상처받지 않길 바랐다.
정지헌에 대해 알아본 시간보다 이정오를 지켜본 시간이 더 길었다. 그대로도 이정오는 아이와 엄마와 셋이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 정지헌을 스스로 포기하길 바랐다.
정오가 원망스럽게 따졌다.
“하지만 예나는 내내 아빠를 보고 싶어 했어요. 나는 내내 예나한테 미안했다고요.”
서러웠던 감정은 눈물 한 줄기로 흘러내렸다.
잠시 배일을 노려본 정오는 눈물을 쓰윽 닦았다.
엄마가 지켜보고 있다. 두려움 속에서도 정오와 배일을 믿으며, 그저 지켜보고 있는 엄마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했다. 가족을 지킬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다 지난 일이니까.”
정오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열 받긴 하지만, 용서할 수 있어요.”
“…….”
“당신도 길을 잃었던 것 같으니까.”
당신도 당신 스스로를 용서했으면 하니까.
길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고생스럽게 도착한 곳은 애초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랬던 날들이 더 좋을 때가 있었다. 많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날들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지만 항상 행복도 거기 있었다. 오래 계획했던 날보다,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던 그런 날보다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일어난 그런 일들이 더 좋을 때가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문득 떠올리면 그때가 너무 좋았다.
당신도 그런 뜻밖의 인생을 알았으면. 어디서 어떤 상처를 받았더라도 누군가는 가엾은 당신을 위로해주고 싶어 할 테니, 행복을 포기하지 말았으면 한다.
무서웠고, 가슴이 벌렁거렸고, 그러면서도 배일이 더 이상은 나쁜 생각을 하지 말았으면 하는 진심 어린 마음. 그 마음으로 청했다.
“그러니까 다시 시작하죠. 다시 시작하면 돼요.”
“그럴 수 없죠. 이미 많은 일들이 과거가 되어버렸는데.”
그러나 배일은 정오의 설득을 거부했다.
“지헌이가 그 얘긴 안 하던가요?”
“…….”
“7년 전에 정지헌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였는지.”
다시 한번 근육들이 꽉 긴장했다. 이건 다른 문제였다. 남편은 7년 전의 사고로 기억을 잃고 지금까지 정신적 외상을 앓고 있다. 복근의 상처 또한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모든 걸 일으킨 사람이 권배일이라고?
“악연을 짚어보자면 2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정지헌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에게 압력을 넣어 식당일을 못 하게 만들었던 그때로.”
배일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본인의 아들과 제가 어울리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다며 아예 서울에서 일을 못 하게 하셨죠. 그래서 전학을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 후에 어머니는 새 일터에서 고생을 하시다 돌아가셨고 저는 이름을 잃었습니다.”
“…….”
“지헌이만은 나를 기억해주길 바랐어요. 그 애의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를 그렇게도 집요하게 찾아가 괴롭혔듯이, 지헌이도 나를 잊지 않고 추적해주길. 내 이전의 이름도, 지금의 이름도 알아봐 주길.”
위로받지 못한 마음은 증오가 되었다.
척박한 산에서 자란 잡초는 스스로 억세져 찾아오는 사람들의 피부를 베어 나갔다.
“하지만 7년 전의 정지헌은 나를 기억도 못 했죠. 그런 별것도 아닌 이유로 그렇게 된 겁니다.”
정지헌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죄책감이 남아 있길 바랐지만 정지헌은 자신을 기억조차 하지 못해서, 상처를 주게 되었다.
복수는 성공했다.
성공적인 복수 이후엔 모두 잊으려고 했다.
죄를 지은 김에 끝까지 나쁜 사람으로 남으려고 했다. 그러나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지헌의 청혼 상대였던 여자에게는 아이가 있었다. 새로 빚어진 생명이었다. 아이는 배일이 일으킨 사고 때문에 아버지를 잃게 되었다. 아주 오래된 증오가 한 여자의 인생을, 한 아이의 인생을 망쳐버린 것이다.
그 죄책감에 오랫동안 이정오를 지켜보았다. 그녀가 차츰 행복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배일은 안도했다.
간간이 정지헌도 들여다보았다. 정지헌은 기억을 잃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심성이 고약해졌다고도 들었다.
그의 악독한 어머니도 그대로였다. 또한 정지헌은 채은엽, 채은비라는 사기꾼들과도 친밀하게 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배일은 혼자 판단을 내렸다. 이정오에겐 정지헌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정지헌은 이정오의 옆에 있어봤자 독이 될 거라고. 어쩌면 채은엽과 채은비의 교활함에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지금의 이정오는 행복하니까 모두 다 잘된 거라고.
하지만 운명은 막을 수가 없었다.
정지헌은 결국 이정오를 찾아냈고, 이정오는 정지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정오를 만난 정지헌이 변했다.
7년 전, 자신을 그냥 지나쳐버렸던 정지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와 인사를 하고 24년 전의 일을 사과했다.
그 순간, 배일은 자신의 미움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자신이 바라는 건 사과 한마디, 위로 한마디였다는 것도.
겨우 이 사과 한마디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짓을 벌였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 예의상의 말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배일은 차분하게 말했다. 몇 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싶었지만 표정은 왠지 의지대로 되질 않았다.
“미안합니다.”
정지헌에게는 미안함과 원망, 양가적인 감정이었지만, 정오에게는 그저 미안했다. 정오에게 미안해서 지헌에게도 너무나 미안해졌다.
“지헌이는 만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두 분을 만나러 온 거였어요.”
“…….”
“협탁 위에 USB를 놓아뒀습니다. 사죄의 의미라고 생각하시고, 지헌이한테 전해주시면 됩니다.”
배일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총집을 챙겼다. 배일이 타박타박 걸어오는 동안 멍하니 서 있던 정오는 배일이 바짝 다가온 후에야 흠칫 물러났다. 정오가 길을 비켜주어 배일은 유유히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모자를 집어들고 다시 주방 가까이로 간 배일이 국순에게 꾸벅 인사했다.
“여사님 음식은 멀리서도 당연히 계속 생각날 겁니다. 식사를 같이 못 해서 죄송합니다.”
국순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조리대를 붙잡고 무너지는 것을 보며, 정오가 급하게 국순에게로 달려갔다. 배일은 그런 모녀를 더는 지켜보지 않고 모자를 쓰고서 현관으로 갔다.
그런데, 밖에서 현관문이 열렸다.
“어? 경찰 아저씨다!”
예나가 크게 외쳤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예나와 도빈과 진서였다. 진서가 예나를 데리고 집에서 놀다가 찾아온 것이다.
당황한 배일은 모자를 스르륵 벗어서 뒤집어 뒤로 감추었다. 모자를 알아본 예나가 충격을 받지 않길 바라듯이.
도빈이 우렁차게 인사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하세요. 여기서 뵙네요.”
진서도 상냥한 눈길로 인사하고는 고개를 내려 도빈에게 말했다.
“도빈이, 아저씨 또 만나면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끄덕인 도빈이 배일을 불렀다.
“경찰 아저씨.”
“그래. 도빈아.”
“저는요. 아저씨를 곤경해요.”
“응?”
배일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 도빈은 더욱 또박또박 말했다.
“아저씨를 곤경해요. 곤. 경!”
도빈의 말을 들은 진서는 곤경에 빠져버렸다.
“도빈아, 그게 아니라 존경!”
“아! 존경! 존경 그거 해요! 저는 아저씨를 닮은 경찰이 되고 싶어요.”
“……그래. 목소리도 우렁차니까 좋은 경찰이 되겠다.”
배일은 도빈의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해 주었다. 그때 예나가 외쳤다.
“저도요! 그럼 저도 경찰 할래요!”
“예나도 경찰이 되고 싶어?”
진서가 물었다. 배일은 더욱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게 되었다. 도빈은 신난다는 듯 방방 뛰었다.
“와! 그럼 우리 경찰 돼서 만나면 되겠다!”
“그래! 만나자. 약속!”
도빈과 새끼손가락을 걸고 단단히 약속한 예나가 배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저씨, 제가 경찰 돼서 아저씨도 만나러 갈게요!”
아이들의 앙증맞은 손가락이 단풍잎 같았다. 금세 계절이 바뀌어 빨갛게 물이 든 단풍을 마주한 듯이 배일의 두 눈이 붉게 젖었다.
*
경찰에 신고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다. 권배일이 경찰이라.
사설 경호원에게도 연락해두었지만 지헌보다 몇 분 늦게 도착할 것 같았다. 그저 자신이 빨리 집으로 가 상황을 정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지헌은 급하게 가속페달을 밟았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정오에게 연락했다.
[여보세요.]
정오의 기운 없는 목소리가 지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 정오야. 괜찮아? 권배일은?”
[갔어.]
“갔다고?”
[응. 갔어.]
“하아. 그래. 알았어. 얼른 올라갈게.”
배일은 떠났다지만 무언가 일이 있었던 것은 확실했다. 어쩌면 배일이 정오를 인질로 잡고서 자신을 아파트로 유인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온갖 불안한 상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지헌은 차에서 나와 아파트 출입문을 향해 뛰었다. 그런데 그때.
끼이익!
가까이에서 서서히 움직이던 차 한 대가 지헌의 정면에서 전조등을 밝게 켜고 돌진해 왔다.
그 찰나의 순간 지헌의 머릿속을 헤집어놓던 온갖 상념이 쑥 들어가고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 하나만 커다랗게 떠올랐다.
‘정오야.’
나는 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충분히 했을까?
너에게, 이제 절대 떨어지지 말자고 말했는데.
콰아앙!
지헌은 강렬한 불빛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눈 깜짝할 순간에 차 두 대가 박살이 났다.
사고 현장엔 세 남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