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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꽃비가 내리고 있나요? (150/183)


150. 꽃비가 내리고 있나요?
2022.10.05.


채은엽 게이트, 그리고 채은엽의 살인교사혐의와 살인미수혐의. 뉴스로 꽤 크게 다루었기에 영미 또한 그 소식을 들었다.

살인미수혐의는 아들 지헌에 대한 이야기였다. 채은엽이 지헌을 죽이려다가 다른 차를 들이받았다고 들었다.

아들이 죽을 뻔했는데, 아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데,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아들에게 연락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남편이 아들의 소식을 간간이 전해주었다. 아들은 아무 부상도 입지 않았고, 건강하게 회사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헌이의 사고를 막아준 아이가 많이 다쳤어. 권배일이라고, 지헌이의 어릴 적 친구인 모양이야.”

“……이름이…… 뭐라고?”

“권배일. 초등학교 때 친구라지 아마? 왜. 아는 이름인가?”

재광의 되물음에 영미의 심장이 급하게 뛰었다.

영미는 옛날 자료를 뒤졌다. 수첩 어딘가에 메모를 했던 것 같은데…….


‘아아…….’

오래된 수첩, 그 속에서 영미는 유수일, 그리고 권배일이란 이름을 발견했다.

유수일. 아홉 살이었던 지헌이 바둑영재반 수업을 들을 때 어울려 다니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탐탁지 않아 아이의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그 집 아들과 우리 아들이 어울리지 않게 해달라고.

아이의 엄마는 그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아들 수일에게 전했고 수일은 지헌에게 전했다. 지헌은 크게 성을 냈다. 영미 역시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영미는 유수일의 엄마가 일하는 식당으로 찾아가 괴롭혔다. 식당 주인과 작당을 하고 내쫓았다. 이후 유수일의 엄마는 근처 식당에 취직했으나 오래 있지 못했고 얼마 안 있어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아들과 유수일을 잘 떨어뜨려놓았단 생각에 다행스러웠으나 찜찜하기도 했다. 마지막에 보았던 아이 엄마의 안색이 좋지 않아 오래 마음에 남았다. 1년쯤 지난 후에 영미는 유수일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사이에 유수일에게는 큰일이 있었다. 아이의 엄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이는 이모의 집으로 입양되어 이름을 바꾸었다.

그 이름이 권배일.

수첩을 쥔 영미의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권배일은 왜, 나서서 지헌이를 구해주려 했을까.

머리가 지끈거린다 싶었는데, 권배일이라는 이름 위로 핏방울이 뚝 떨어졌다. 영미는 휴지로 급하게 코를 막았다.

하루에 한 번은 꼭 코피가 쏟아졌다. 코피는 잘 지혈되지도 않았다.

내가 죽으려나 보다…….

그 와중에도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게 되는 엄마였다.

지헌이는 괜찮을까?

*

병실에 들어온 지헌이, 배일에게 바짝 다가가 있는 정오를 뚱하게 바라보았다.


“뭐해?”

지헌의 가늘어진 눈매에 정오는 기가 막혔다.

아니, 교통사고 난 친구 얼굴 보러 와서 말이지, 왜 바람 난 부인 잡으러 온 것 같은 투냐고.


“아니…… 말씀을 안 하시잖아. 목소리가 안 나오나 해서…….”

“배일아. 괜찮아?”

정오의 대꾸에 다가간 지헌이 배일에게 물었다.


“응. 괜찮아.”

배일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배일의 반응에 기가 막혀 정오의 입이 벌어졌다.


“말하는데?”

“아니, 아까는 한마디도 안 했었다고.”

“네가 겁을 줬나 보지.”

“허, 참. 허어어 참. 허어어…….”

배일과 지헌이 짜고서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아 약이 올랐지만 다친 사람에게 더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정오는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었다.

정오가 떠난 후, 한참 뒤에야 지헌이 입을 열었다.


“수술은 잘됐다고 하던데…… 기분은 어때?”

“나쁘지 않아.”

“그래. 그럼 됐어.”

지헌은 정오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눈을 맞추니 배일은 무안한 듯 고개를 돌렸다.


“네가 잘못한 거야.”

“…….”

“너는 너를 좀 더 소중하게 여겨야 했어.”

너도 일단 나무라고서 시작하는구나.

지헌의 화법은 정오와 같았다. 배일은 결국 다시 웃어버렸다. 배일이 웃는 줄 모르는 지헌이 계속 말을 이었다.


“네가 잘못됐다면 7년 전보다 훨씬 고통스러웠을 거야. 이번엔 모두 기억하니까.”

그렇구나.

내가 세상을 떠났다면 네가 더 아프겠구나.

친구는 그가 잘못되었을 때를 가정하여 타박하는데, 배일은 왠지 그 말이 듣기 좋았다. 자신의 안위에 대해 힘들어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신이 살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어쩐지 고마웠다.


“우리 어머니가 그런 일까지 한 줄은 몰랐어. 너한테 그런 일이 있었던 건 더더욱 몰랐고.”

“…….”

“미안해. 정말.”

“아니야.”

다시 한번 지헌의 사과를 듣게 되었다. 배일은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 또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너무 어렸지. 누군가를 탓해야 살 수 있었어.”

너와 내가 헤어진 후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 모든 인과관계에 너를 떠올렸다. 그래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

증오는 힘이 된다.

어쩌면 그 증오가 지금껏 그를 살아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정지헌이, 정지헌의 어머니가 그를 살려낸 것인지도.


“미워할 사람이 필요해서 너를 골랐던 거야.”

배일의 대답에 가슴이 저미어서 지헌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스스로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도 없이 제 과오를 인정하는 사람을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할지 그는 알지 못했다.


“경찰에서는 원칙대로 처리할 거라고 해. ……어쩌면 네가 경찰 일을 계속하지 못할 수도 있어.”

한참 만에 지헌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 거야. 이미 얘기는 해놨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

“다만 나뿐 아니라 김진구도 얽혀 있는 일이라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어.”

“애쓰지 않아도 돼.”

배일은 이미 각오한 일이라는 듯 대답했다. 그 모습에 지헌은 더욱 마음 아팠다.

다 포기한 듯 말하지 말라는 타박을 해보려 입을 벌리는 와중에 휴대폰이 울렸다. 배일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고용한 변호사였다. 어쩔 수 없이 지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지헌이 병실을 떠나고, 조금 뒤에 문이 빼꼼히 열리며 다시 정오가 들어왔다. 부부가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하듯이 번갈아 모습을 보이니 배일은 재미났다.


“……말을 할 줄 아십니다?”

안 그래도 우습다고 생각했는데, 정오의 핀잔에 배일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니, 웃으면 안 돼요! 실밥 풀린다고요!”

정오가 급하게 배일을 저지했다.

그녀와 마주한 단 몇 분만으로, 정지헌이 왜 그렇게 달라졌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일은 우선 바로잡아야 할 사건을 털어놓았다.


“월요일에 그 모자를 쓰고 갔던 건 아무 뜻 없었어요.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썼던 건데, 이정오 씨가 얘기하고서야 알았습니다.”

“맙소사!”

배일이 자신의 착오를 인정하니 정오가 기가 막히다는 듯 코를 벌름거렸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배일은 좀처럼 미소를 풀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에게 착오가 있을 수 있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7년 전 그 꽃집에서 지헌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 역시 지헌이 자신을 깡그리 잊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해로 빚어진 비극을 떠올리니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운명은, 악연은 내가 바꿀 수도 있는 거였는데.

그 꽃집에서 내가 먼저 정지헌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더라면.

청혼을 축하하며, 우리 언제 다시 만나서 어릴 때처럼 바둑 한 판 두자고 얘기했더라면.


“미안합니다.”

배일은 지난날의 과오를 다시 사과했다. 정오의 말이 모두 맞았다.

그는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판단했다. 제 세상이 어두워 앞을 볼 줄 몰랐다.


“내 잣대로 이정오 씨의 행복을 재단했어요.”

하지만 결국 당신은 내가 계획한 틀에서 벗어나 당신의 것을 찾아냈죠. 너무 멋지게.

그 어떤 악운에도 굴하지 않고…….


“지금 꽃…….”

배일은 한 가지를 물어보려다가 머쓱하여 곧장 입을 닫았다.


“살아가는 건 괴로움인 것 같아요. ……괴로움 위에 괴로움만 쌓이면 다 무너질 텐데 간혹 누군가의 위에는 별이 반짝이고 꽃비가 내리기도 한단 말이죠. ……그래서 포기할 수가 없어요.”

 
언젠가 정오가 그런 말을 했었다. 지헌에게 예나의 존재에 대해 털어놓을까 말까 고민하던 때였던 것 같다.

말도 못 할 괴로움 속에서도 이정오는 꽃비를 기다리며 꿋꿋이 아픔을 이겨내고 있었다.


‘지금 꽃비가 내리고 있나요? 당신이 기다리던.’

물어볼 필요는 없겠네요.

그렇게 날갯짓을 열심히 하던 당신의 나비가 결국 돌아온 걸 보니.

아니, 그녀는 마냥 꽃비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알아서 꽃밭을 일구었던 것 같다. 나비가 찾아들도록.


“네? 꽃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를 악물고서 따지던 정오가 배일이 하다 만 말을 궁금해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쿵쿵쿵.

정오가 배일에게 다시 다가선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열린 문을 지헌이 두드리는 소리였다.

저벅저벅 걸어온 지헌은 뚱하게 정오를 쳐다보고는 배일에게 말했다.


“배일아, 이만 갈게. 내일 또 올게.”

“안 와도 돼.”

“또 올게.”

수상하게도 다정하면서도 조금은 냉랭한 인사였다. 정오는 지헌의 손에 붙잡혀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병실을 나섰다. 배일이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것을 보지 못했다.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지헌이 주차장으로 가는 와중에 물었다.


“권배일 인물이 그렇게 좋아?”

“뭔 소리여.”

“아까 배일이 인물이 좋아서 애들이 예쁠 것 같다고 했잖아. 뜬금없이.”

정오는 한참 동안 눈을 깜빡거리다가 기억을 떠올렸다.

아니 그런 인사치레의 말에 삐친 거야? 이 좀생이 같으니라고.


“그렇게 좋아?”

“무슨 소리를 듣고 싶어. 오빠가 더 좋아.”

“…….”

“오빠의 인물이 최고야. 나는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랑 살고 있어.”

“그래. 그걸 알면 딴 남자 인물 좋단 얘긴 하지 마.”

정오는 한숨을 푸욱 내쉬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권배일 씨는 절대 모르겠지. 오랜 친구 앞에서 의젓하게 말을 하던 이 남자가 사실은 세상에서 제일 유치한 남자라는 걸.


 

*

아버지를 봉안당에 안치한 후, 은비는 하루 만에 오빠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뜻밖의 사고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오빠가 사고를 일으킨 주범이었다. 지헌을 차로 들이받으려다가 대기하고 있던 경찰이 대신 화를 입었다고 한다.

오빠에게는 살인교사에 이어 살인미수죄가 추가되었다. 은닉한 비자금까지 발견되어 오빠는 징역을 면치 못할 터였다. 차라리 이대로 몇 년 동안 깨어나지 않는 편이 나을 것도 같았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지금, 제정신인 사람은 은비 하나였다.

은비는 실의에 빠진 엄마를 설득했다.


“엄마, 우리 미국에 가서 살자. 내가 다 알아볼게.”

“네 오빠는 저렇게 두고?”

“가끔 와서 들여다보면 돼. 오빠는 회복하면 바로 교도소로 갈 거야. 엄마 옆에 있을 수는 없어.”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하던 엄마는 점차 시간이 흐르며 현실을 깨달아갔다. 아들을 지켜주고 싶었지만 격한 여론 때문에 곁으로 갈 수도 없었다.

고개를 돌린 엄마는 비로소 자신을 돌보는 딸을 보게 되었다. 집안의 돌연변이라고 생각했던 딸은 누구보다도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딸만큼이라도 제대로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 가자. 여길 떠나야겠어.”

엄마의 결정으로 은비는 이민 준비를 시작했다.

불안해질 때마다 배를 어루만졌다. 이정오의 앞에서 쓰러진 후로 다시 병원에 간 적은 없었다. 큰일들이 한 번에 몰아쳐서 아이를 염려할 새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에게 말을 거는 게 습관이 되었다.


‘거기 잘 있니?’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왠지 건강하게 잘 크고 있을 것 같았다. 그 믿음이 어느새 은비를 지탱해주었다. 나를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존재가 있단 사실이 어떤 힘이 되었다.

한창 이민 준비를 하는 와중에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정지헌과 얽힌 사건으로 조사할 것이 있다는 연락이었다.

은비는 경찰서를 찾아갔다. 은비를 기다리던 경찰이 인사했다.


“제가 무슨 조사를 받아야 하죠?”

“보여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경찰이 노트북PC의 전원을 켜는 와중에 은비가 경찰에게 물었다.


“제 오빠랑 부딪힌 경찰은 괜찮나요?”

“그제 깨어났습니다.”

“다행이네요.”

은비는 조용히 끄덕였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빠가 사람을 더 죽이지 않아서.

그런 은비의 대답에 그 어떤 반응도 없이, 경찰이 은비에게 동영상을 내밀었다.


“동영상 확인하시죠.”

동영상을 확인한 은비의 눈이 커졌다. 7년 전, 은비의 차 블랙박스에 찍힌 동영상이었다. 지헌이 사고를 당할 당시의 기록.


“이게 어떻게…….”

아무리 찾아도 나오질 않아 없어진 줄 알았는데.

이게 어떻게 경찰의 손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누가 이걸 가지고 있었나요?”

“이 사건에 대해 기억하시죠?”

경찰은 은비의 대답을 깡그리 무시하고 사무적으로 물었다. 은비는 다시 동영상을 살폈다.

그런데, 7년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사고를 일으킨 남자. 진범의 얼굴…….


“자, 잠깐만. 이 사람…….”

흐릿한 실루엣이었지만 은비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은비의 반응을 유심히 보던 경찰이 물었다.


“권배일 경사와도 아는 사이입니까?”

권배일 경사?

내게는 회사원이라고 했었는데?


“……이 사람이 경찰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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