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 업보 (151/183)


151. 업보
2022.10.08.


일찍 퇴근하여 집에 들어온 승규를 세 명의 아이들이 반겼다.


“아빠아!”

“아빠아!”

“아저씨이!”

도빈, 도윤에 이어 예나까지.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들의 환호에 반가운 마음의 한편에는 어찔함이 있었다.

한명 한명 아이들에게 인사를 해준 승규는 주방으로 갔다.


“나 왔어.”

“일찍 왔네.”

저녁식사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는 진서가 슬쩍 보고서 대답했다. 승규가 팔을 걷어붙이고 진서에게 다가갔다.


“내가 할 일 없어?”

“가서 애들이랑 놀아줘.”

“그건 조금 무서운데.”

“책이라도 좀 읽어줘.”

아내의 분부에 승규는 하는 수 없이 긴장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책을 읽어 주겠다 하니 아이들은 신난다며 참새처럼 짹짹거렸다.

매번 힘들어하긴 해도 승규는 좋은 아빠였다. 진서처럼 사사건건 아이에게 가르침을 주려 노력하지 않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놀아줄 줄 알았다.

책을 읽는 기술도 엄마보다 좋았다. 여러 목소리를 만들어내서 실감 나게 읽어주니 아이들도 좋아했다.


“1820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어요.”

참새처럼 짹짹거리던 아이들이 승규의 목소리에 흡수되며 잠잠해졌다. 진서는 흐뭇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렇게 흐뭇했던 몇 분이 꿈이었던 것처럼, 진서가 식사 준비를 이어가느라 남편의 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 사이에 거실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으아아아아앙!”

“왜 울어! 왜!”

 

 
진서가 도빈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듣고서 거실로 쫓아갔다. 도빈, 도윤, 예나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나라를 잃은 것처럼 서럽게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승규가 가장 작은 도윤을 안아 들고 다독이며 진땀을 빼고 있었다. 진서가 호통쳤다.


“왜 애들을 울려!”

“내가 울린 게 아니야! 나이팅게일이 울린 거지.”

승규가 대꾸하자마자 도빈이 진서의 다리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엄마아. 나이팅게일이 죽었어어.”

승규가 위인전을 읽어주었던 모양이다. 진서가 도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맞아. 옛날에 돌아가셨지.”

“으어어어엉. 왜 돌아가셨어어, 흐어어어엉…….”

“사람은 다 죽어. 엄마도 죽고 아빠도 죽고, 우리 도빈이도 언젠가는 죽어.”

으어어어어엉!

진서의 이성적인 대답에 도빈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죽기 싫어어어!”

“그래. 그렇지. 누구나 사는 게 좋지. 죽기는 싫어.”

도빈과 진서의 대화에 예나도 옆에서 통곡했다. 진서는 예나를 꼬옥 안아주며 고개를 들어 도빈을 훈육했다.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야. 알았지? 이도 열심히 닦고.”

“이 열심히 닦으면 안 죽어?”

“이를 안 닦는 것보다 오래 살겠지?”

“응. 닦을게.”

깨알 훈육에 걸려든 도빈이 고개를 씩씩하게 끄덕이며 눈물을 닦았다.


“예나야, 너도 이 열심히 닦아. 우리 같이 오래 살자.”

“응. 약속.”

아이들 모두 울음 끝이 길지 않아 다행이었다. 승규와 진서 모두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자, 다 울었으면 얼른 밥 먹자.”

진서가 요령 좋게 아이들을 주방으로 이끌었다.

*

정오와 지헌은 오랜만에 최면치료센터에 방문했다.

지헌은 의사에게 배일이 건넨 7년 전의 녹화 파일에 대해 털어놓았다.


“최면에 대한 거부감은 이때의 경험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사연을 모두 들은 의사가 소견을 밝혔다.


“원인을 안다고 해서 기억이 돌아오는 건 아니었어요. 여전히 군대 시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연애 시절도 떠오르는 게 없어요.”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자연적으로 사라진 것일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다 기억해내고 싶긴 하지만, 기대대로 되지 않을 때의 무력감이 커요.”

지헌의 고백에 정오 또한 먹먹해졌다. 7년 전 은엽이 저지른 짓을 알게 된 후, 지헌은 이따금 악몽을 꾸는 듯했다. 지켜보는 정오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의사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무의식 속에 압박감이 있어서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지헌 님은 본인이 느낀 무력감을 인정했죠. 마음은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의사의 긍정적인 해석에 정오도 마음이 덩달아 안정되었다.

남편은 지금 온 힘을 다해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기운 내어 믿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정오는 일이 많은 지헌과 헤어져 도빈의 집으로 갔다. 정오가 예나를 데리러 갔을 때는 아이들이 식사를 마친 직후였다.

예나가 집에 갈 채비를 하는 동안 진서가 정오에게 속닥였다.


“저기, 예나가 엉뚱한 얘기를 할 수도 있어요.”

진서는 저녁 식사 전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려버린 일에 대해 모두 털어놓았다.


“너무 심각한 얘기를 해버렸네요.”

“아니에요. 예나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주셔서 고마워요, 언니.”

심각한 주제였지만 시간이 지난 후 정황을 듣는 정오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의 반응이 재미있고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도빈의 집에서 나와 예나와 둘이서 손잡고 집으로 향하며, 정오가 예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예나 오늘 위인전 읽어서 슬펐어?”

“응. 나이팅게일이 죽어서 슬펐어.”

“이제 괜찮아?”

“응. 괜찮아.”

“…….”

“엄마, 우리는 다 죽어.”

“……그렇지. 맞아.”

“그러니까 엄마. 엄마랑 나랑 이렇게 살아서 있는 건 행복하고 고마운 거야. 그치?”

아이의 기특한 감상에 정오의 눈망울이 젖었다.


“그래. 맞아.”

죽음이 순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사는 건 기적처럼 여겨진다.


“특히 엄마는 예나를 만나서 정말 행복하고 고마워. 우리 예나가 엄마 딸이라서.”

아이를 잡은 손에 더욱 따뜻한 힘이 들어갔다.

가까이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들이 참 많다.

*

아이를 집에 데려다 놓은 정오는 곧장 다시 집을 나섰다. 경찰서에서 몇 번 연락이 왔는데 일이 바빠 방문하지 못했다. 정오는 서류들을 챙겨 경찰서를 찾았다.

경찰서 입구에 이른 정오의 두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입구 가까이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 사람을 알아보았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정오는 은비가 고개를 홱 돌리자 호들갑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엄마야, 깜짝이야!”

은비는 아무 말 없이 정오를 노려보았다. 네가 왜 여기 왔느냐는 듯이.


“고소 취하하러 온 거야.”

정오는 어쩔 수 없이 용건을 털어놓았다.

정오와 지헌은 고소를 취하하기로 했다. 7년 전 사고의 허위 진술에 대해서도 눈감아주기로 했다. 채은비가 이를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할 리 없겠지만 그런 결정을 한 건 채은비의 딱한 사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채은비는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아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몸이 굳은 것 같았다. 정오는 조심스럽게 다시 다가갔다. 미움을 한 꺼풀 벗겨내고 바라본 채은비는 너무나 가냘팠고 안타까웠다. 권배일처럼.


“……몸은 괜찮아?”

자연스레 안부를 묻게 되었다.

그 아무것도 아닌 물음에 은비가 굵은 눈물을 뚝 떨구었다.

울리려던 의도는 아니었는데. 은비의 반응에 정오는 더욱 당황스러워졌다. 휴지라도 건네야겠단 생각에 급하게 가방을 살폈으나 휴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 어수룩한 행동을 보며 은비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부러워.”

가방을 뒤지던 정오의 손이 멈추었다.

웃음기 없는 냉랭한 어투에는 더욱 진심이 잘 보이는 것 같았다. 원수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마음은 배짱이며 여유다. 그런 배포를 가질 수 있는 정오의 상황을 부러워하는 것이었다.


“나도 네가 부러웠어.”

“…….”

“그렇다고 네가 되고 싶은 건 아니야. 13년 전에도 그렇지는 않았어.”

정오도 진심을 털어놓았다.

정오의 고백에 은비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너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싶진 않아.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산 것뿐이니까.”

하지만 그 목소리엔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정오는 미운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아니,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 조마조마했다. 작아져 가는 목소리처럼 채은비도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하지만 나는…….”

“…….”

“죽어야 할 것 같아.”

은비는 모두 무너져 있었다.

7년 전, 정지헌의 사고에 대한 허위 진술로 애먼 사람을 뺑소니범으로 만들고, 이로 인해 결국 친오빠가 사람을 죽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의 아빠는, 그런 친오빠를 고발한 남자였다.

대법원장이 될 줄 알았던 아버지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세상을 떠났고, 오빠는 정지헌을 죽이려다가 아이의 아빠를 들이받았다.

행복했던 순간도 분명히 있었을 텐데, 은비는 이제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았다. 손에 쥔 것은 절망뿐이었다. 사는 것이 지옥이라 죽는 것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힘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손등 위로 떨어졌다. 옆에 앉아 있던 정오가 어느새 은비의 앞으로 다가와 손등을 붙잡았다. 은비의 눈물이 정오의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채은비. 약해지지 마.”

은비를 향해 고개를 든 정오가 말했다.


“괜찮아. 사과 필요 없어. 물론 받고 싶지만 내 욕심이 널 해쳐서는 안 되지.”

정오도 이런 끝을 바란 게 아니었다. 채은비가 훌쩍훌쩍 울며 진심 어린 사과를 하길 상상해본 적이 있을 뿐, 그 고통으로 영혼이 망가지길 바란 건 아니었다.


“이것도 다 지나갈 거야. 다 이겨내고 괜찮아질 거야. 언젠가 살아 있어서 감사할 순간이 올 거야.”

나는 너를 싫어했지만, 네가 인생을 저버리길 바라진 않아. 네가 모두 이겨내길 바라고 있어!


“내가 7년 동안 미혼모로 살아봐서 알아. 힘든 만큼 뿌듯하기도 해. 스스로 자랑스럽기도 해. 막막했던 것들이 행복해지기도 해.”

집 밖의 일 때문에 너무너무 열 받는 날, 인상 팍 구기고 싶은데 아이 때문에 웃어야 하는 그런 때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입가에 그린 미소가 어느새 그날의 감정이 되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행복하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너도 그런 인생을 알게 될 거야. 언젠가는 살아 있어서 행복해질 거야.


“너도 할 수 있어. 잘할 거야.”

또렷했던 목소리에 굴곡이 졌다. 아래에서 고개를 올려 들여다본 채은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저 안아서 다독이고 싶은 연약한 여인이었다.

은비는 결국 감정을 참지 못하고 크게 울음을 터트려버렸다.

은비의 울음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정오는 은비를 안아서 다독이지는 못했지만 조용히 그 옆을 지켰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도와줄게.”

은비의 울음이 잦아들 무렵 정오가 말했다.

한참 동안 주저하던 은비가 정오에게 부탁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일 터였다.


“……사람 좀 만나게 해줄 수 있어?”

 

*

다음 날 오후. 정오는 배일의 병실을 방문했다.


“안녕하셨어요. 좀 어떠세요?”

갑작스러운 방문에 배일이 눈을 끔뻑거리다가 대답했다.


“괜찮아지고 있어요.”

“지헌 씨는 안 오고요. 오늘은 저 혼자 왔어요.”

다가간 정오가 용건을 말했다.


“사실은 누가 배일 씨를 만나고 싶어 하는데, 배일 씨 의견도 안 물어보고 일방적으로 데려올 수는 없어서요. 쪽지만 건네받았어요.”

정오가 건네는 쪽지를 내려다본 배일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누구의 부탁인지 알 것 같았다.

정오는 쪽지만 전한 후 바로 떠났다. 정오가 떠난 후 배일은 쪽지를 펴 보았다.

역시, 쪽지의 주인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권배일 씨, 나 채은비야.

아이를 가졌어. 아이가 어떻게 생긴 건지는 당신이 잘 알겠지.」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