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다른 시작도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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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다른 시작도 있었을까
2022.10.12.
「사실을 믿을 수 없다면 증명해줄 수도 있어. 요즘에는 임신부의 혈액으로 친자확인검사를 할 수 있다고 하더라.」
배일은 몇 줄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아이가 있었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장담할 수 없었다. 한 번 실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미 아이는 꽤 제 몸을 키웠을 것이다.
사직서를 내고 그간 모은 모든 자료들을 경찰에 넘기며 모든 처벌을 각오했다. 용서받지 못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다른 문제였다. 채은비는 정지헌에게는 철저한 가해자였지만 자신과의 관계에선 피해자였다.
배일은 목표를 위해 채은비를 이용했다. 채은비에게 블랙박스 녹화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를 찾아내고자 접근했다.
가까운 사이가 되어 채은비의 집을 오가게 되면서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찾아낸 배일은 이를 훔쳐서 바로 잠적했다.
처음에는 메모리카드를 없애고, 지방으로 전근을 가서 다 잊고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정말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고야 말았다.
모든 일이 다 제자리를 찾고, 모든 사람이 잘못한 만큼만 벌을 받길 바랐는데.
엉뚱한 사람에게 뜻하지 않은 상처를 주게 되었다.
숨이 꽉 죄여들었다.
그간 각오했던 어떤 징벌보다도 더욱 큰 고통이었다.
*
더위가 한 꺼풀 물러가고 어느덧 하늘이 높아진 9월.
회사 창립기념일을 맞아 오랜만에 같은 날 쉬게 된 신혼부부는 그간 미뤄왔던 일을 하게 되었다.
먼저 준비를 끝낸 지헌이 예나의 손을 잡고서 아내를 기다렸다.
잠시 후 스튜디오의 탈의실 문이 열리고 정오가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지헌은 거짓말처럼 눈이 시려서 눈을 찡긋거리게 되었다. 탈의실에서 빛을 몰고 나온 것만 같았다. 정오의 모습에 지헌은 말을 잇지 못했다.
“와아! 엄마 공주님 같다!”
예나가 먼저 감탄하며 외쳤다.
정오는 고운 곡선을 돋보이게 하는 머메이드형 드레스를 입었다. 평소의 차림과 거리가 있는 옷이라 움직임이 불편했고 어색하기도 했다. 정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지헌을 잠깐 바라보고는 예나에게 물었다.
“엄마 예뻐?”
“응! 인어공주 같아. 아빠, 엄마 예쁘지!”
“응. 예뻐.”
그제야 정오의 표정이 풀렸다.
“엄마, 진짜 진짜 예뻐!”
“고마워. 우리 예나도 공주님 같아. 원래 공주님이지만.”
예나 역시 하얀색의 어여쁜 드레스를 입었다. 공주님, 천사, 요정. 어떤 단어를 붙여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예쁜 딸이었다.
아이는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한창 공주님 드레스를 좋아할 나이였다. 아이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 정오는 웨딩 촬영을 결심했다.
지헌과 정오 두 사람만 나오는 사진은 한 컷만 찍기로 했다. 아이가 엄마 아빠를 기다리다 지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광고 회사에 다니는 두 사람. 표정을 잘 지어야 촬영이 수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사진작가의 요청에 적극 협조했다. 지헌은 입술 끝에서 경련이 이는 것 같았지만 최선을 다했다.
반나절의 촬영이라 시간은 금방 흘렀다.
야외 촬영장처럼 꾸며진 스튜디오의 벤치에서 마지막 촬영을 하게 되었다. 지헌과 예나가 먼저 가 자리를 잡았고, 정오는 머리를 손보고 이동했다.
“엄마, 빨리 와.”
제 아빠와 함께 손장난을 치며 까르르 까르르 웃던 예나가 정오를 불렀다.
멀리서 그 모습을 확인한 정오는 속으로 탄식했다.
이 장면을 꿈에서 본 적이 있었다.
예나와 이렇게 옷을 차려입고 공원을 거닐다가 지헌을 만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때 예나는 지헌을 알아보고서 달려가 지헌에게 폭 안겼다. 지헌은 예나를 데려가 공원 벤치에 앉았고 예나는 지헌의 무릎 위에서 편안히 웃었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알기 전이라 정오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꿈속이었음에도.
그때의 주저했던 기억이 여태 정오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 꿈이 악몽도 두려움도 아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일. 자신이 이 두 사람에게 다가가 가만히 곁에 앉으면 되는 일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웨딩 촬영을 마치고 예나를 바둑학원에 데려다준 후, 정오와 지헌은 산부인과를 찾았다.
한번 와본 적이 있는데도, 지헌은 진찰실에 들어서자 또 처음처럼 긴장하게 되었다. 그간 병원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우직하게 참았던 건 정오 때문이었다. 정오가 진찰을 받는 과정이 고생스러운 것 같아서.
“6mm예요. 잘 크고 있네요. 심장 소리도 우렁차고요.”
지헌의 입술이 바짝 말라오는 가운데, 의사가 차분히 초음파를 비추어 아기의 모습을 확인시켜주었다. 큼지막한 심장 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호흡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심장 소리를 확인했다.
아기는 2주 동안 폭풍 성장을 했다. 그새 모양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동그란 반지 같은 모습이었는데 2주 사이에 오뚝이처럼 길쭉해졌다.
0.6cm밖에 안 되는 녀석이 분당 140번이나 뛰는 파워 심장을 가졌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모니터를 가만히 쳐다보던 정오는 고개를 돌려 지헌을 바라보았다. 지헌은 아기의 모습을 머릿속에 사진으로 박아넣으려는 듯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정오는 그 모습을 머릿속에 새겨두고 싶었다.
사실 정오에게도 이런 진찰은 처음이었다. 예나를 임신했을 때는 겁이 나서 오랫동안 병원을 가지 못했다. 엄마에게 사실을 알리고서야 병원을 찾았다.
그때와 달리 너무나 작은 아이가 신기했다. 아이의 우렁찬 심장 소리가 ‘엄마, 나 지금부터 사랑받아도 돼. 많이 사랑해줘.’라고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지헌과 정오는 사진과 동영상 자료를 받아 진찰실에서 나왔다. 수납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지헌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아이가 태어난다는 건 인생에 기록할 순간들이 많아진다는 뜻이었다. 7년 전의 그 또한 이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7년 전 11월 2일의 기억만 남은 것인지도.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던 정오가 말했다.
“주말에 아버님 댁에 갈까?”
“그럴까?”
“응. 연락 드려봐.”
지헌은 바로 재광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랫동안 통화연결음만 흘러 끊으려는 사이에 재광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버지의 목소리가 왠지 어둡게 들렸다.
“아버지, 별일 없으시죠?”
[응. 그래.]
“이번 주 주말에 들를게요.”
[아니야, 아니야. 주말엔 일이 있어.]
재광이 당황한 것 같았다. 집을 방문하겠다고 하면 두 팔 들어 반기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급한 통보였던 모양이다.
“그럼 언제 들를까요?”
[……계속 바빠서 말이야. 좀 여유로워지면 연락할게.]
“…….”
[예나는 잘 지내지?]
“네. 잘 있어요.”
[그래. 사부인께도 안부 전해드리고. 또 연락하자.]
아버지의 목소리는 나긋하고 차분했지만, 어쩐지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기도 했고 서둘러 통화를 끝내려는 것 같기도 했다. 전화를 끊은 후 지헌은 잠시 갸웃거렸다.
*
이민 준비는 착착 이루어졌다. 짐을 정리하는 것이 가장 큰일이었다. 아예 서울집을 처분하고 떠날 생각이었기에 아버지의 유품은 거의 버려야 했다.
은비는 아버지의 유품 하나하나에 눈물 한 바가지를 쏟는 어머니를 달래어가며 집 정리를 했다.
가끔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꽁꽁 얼어버린 것처럼 울리지 않는 휴대폰이 원망스러웠다.
은비는 지난 월요일, 정오에게 부탁했다. 권배일한테 쪽지라도 전해달라고. 쪽지에는 짧은 메모와 함께 연락처를 남겨놓았다.
그날 밤, 정오에게서 쪽지를 제대로 전했다는 연락이 오긴 했지만 쪽지를 받은 당사자에게서는 여태 문자 한 통 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니 신세를 체념하게 되었다. 자신을 이용해먹기 위해 접근했던 남자의 연락을 마냥 기다리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울컥 화가 올라온 은비는 휴대폰을 엎어놓았다.
그런데, 휴대폰을 엎어놓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진동이 울렸다. 은비는 냉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기다려온 전화일 거란 걸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은비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떨려왔다. 저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은비는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권배일 씨?”
[……네.]
한참 만에 건조한 대답이 들려왔다. 은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울음을 삼켜냈다.
“몸은 괜찮아?”
[……미안합니다.]
“아니, 몸은 괜찮으냐고 물었잖아! 사과하라고 한 게 아니란 말이야!”
담을 쌓는 듯한 그의 점잖은 사과에 은비는 버럭 화를 내고야 말았다.
그 사과 한마디로 모든 것을 확인했다. 그를 다시 만날 수는 없을 터였다. 어쩌면 이미 체념했던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내 아이는 내가 낳아서 키울 거야. 걱정 마. 당신 보고 책임지라고 안 해.”
사랑도 아닌 것을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다음 말도 술술 나왔다.
자존심만은 지키고 싶었다. 그에게 울고불고 매달리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지금은 벌을 받는 기분이지만, 언젠가는 상이 될 수도 있다고 해. 이정오가 그랬어. 그러니까 나는 걱정하지 마.”
평생 친구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원수 같은 아이. 그 아이가 준 위로를 어느새 인생의 끈처럼 붙들게 되었다. 이 순간만큼은 정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의연하게 말할 거리를 만들어주어서.
“그냥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언젠가 당신 아이가 태어날 거고, 언젠가 그 애가 아빠를 보고 싶어 할 수도 있다고.”
[…….]
“종종 연락처라도 남겨달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됐어. 그것도 부담스럽다면 하지 마. 그냥 나는 혼자 잘살 거야.”
또다시 한참 후에 대답이 들려왔다.
[……연락처 계속 남길게.]
“…….”
[미안해.]
‘미안해요’로 시작했던 통화는 ‘미안해’로 끝났다. 희망이려나? 높다란 벽을 한 줌 정도 허물었으려나? 하지만 그런 낱알 같은 희망을 붙들고 살 수는 없었다. 이 관계는 이제 자신이 잘라내야 했다.
“그래. 끊어.”
은비는 냉랭하게 말했다.
전화를 끊으라고 했음에도, 저편의 전화는 오랫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은비는 이를 악물고서 먼저 통화 종료 버튼을 꾹 눌렀다.
휴대폰을 내려놓자마자 다리에 힘이 쭉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아아아.
안간힘을 다해 참고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잘했어. 잘했어.’
눈물을 닦으며 되뇌었다.
모두 다 잘된 일이다. 비참하게 그를 붙잡지 않았으니, 담담하게 통화를 마쳤으니.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이 결국 바닥을 적셨다.
후회하지 않으려 독하게 버텨왔건만 결국은 모든 것이 떠나고 텅 빈 손만 남았다.
흐으으으으윽.
우리가 지금과 달리 만났었더라면 다른 시작도 있었을까?
아니, 그렇다면 시작조차 없었으려나?
그래도, 당신과 함께했었던 시간을 지워버리고 싶지는 않은데.
미워도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결핍을 이해해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진심이든 아니든, 은비는 매번 분명히 위로받았다.
그와 함께했던 어떤 밤의 짧은 대화가 떠올랐다.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가슴에 각인된 기억이었다.
“자기는 참 신기해. 내가 정지헌한테 갈 거라는 걸 알면서 왜 날 도와줘?”
“나도 알고 있으니까. 사랑받고 싶은 사람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마음이 어떤 건지.”
“…….”
“사랑받지 못해서 외로운 게 어떤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