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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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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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끈
2022.10.15.
은엽은 깊은 밤에 눈을 떴다.
머리가 지끈거려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데는 또 반나절이 걸렸다. 몸을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움직이려고 애쓰지 않았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포기하고, 사고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생각해보았다. 전속력으로 정지헌에게 다가간 은엽의 차는 그 직전에 끼어든 훼방꾼에 의해 망가졌다.
낡은 차를 빌리는 바람에 에어백을 점검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고 은엽도 덩달아 망가지게 되었다.
사고 직전에 본 사람이 권배일이었다. 그리고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정지헌이 ‘수일아’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정지헌과 권배일이 연합하여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것이다.
모든 계획은 실패했을 테고, 정지헌은 멀쩡할 테고, 권배일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고.
그렇다면 밖에 서 있는 사람은?
경찰일 터였다.
은엽은 깨어났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 다시 눈을 감았다.
그간 무슨 일들이 있었는가, 이제 병원을 벗어나면 내 운명은 어떻게 되려나, 이것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
국순과 지헌이 잔치 준비를 하는 동안 정오는 예나와 시간을 보냈다. 예나는 오늘 찍은 태아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정오에게 물었다.
“이 애기가 엄마 배 속에 있는 거야?”
“응. 엄마 배 속에 예나 동생이 있어.”
“어떻게 들어갔어? 엄마가 먹었어?”
정오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건 대답 잘해야 해.
으흠, 정오는 목을 가다듬고서 차근차근 대답했다.
“엄마랑 아빠한테는 아기를 만들 수 있는 아기 씨앗이 있는데 아빠가 엄마한테 아기 씨를 준 거야. 그래서 엄마 아기 씨랑 만나서 엄마의 배 속에서 아기를 키우는 거야.”
오늘을 위하여 외운 모범답안이 있는데도 조금은 긴장하게 되었다.
“왜 엄마 배에서 키워? 아빠가 더 힘세잖아. 아빠 배에서 키우면 안 돼?”
아이의 질문이 이어졌다. 예나의 발상에 정오는 웃고 말았다.
예나야, 엄마도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럼 안 돼. 엄마 배 속에만 따뜻하고 포근한 아기집이 있거든. 이게 아기집이야.”
정오는 다시 사진으로 돌아와 동그란 아기집을 가리켰다.
예나가 사진을 다시 유심히 보다가 물었다.
“예나도 여기서 살았어?”
“그럼. 신기하지?”
“애기는 여자야 남자야?”
“아직은 몰라. 조금 더 기다려야 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왜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
“심부름시키려고.”
동생이 빨리 태어났으면 하는 이유가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정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7년 차 애 엄마이지만 여전히 자신은 초보였다. 언제나 새로운 난관에 부딪히고 매번 진땀을 뺀다. 이토록 어렵고 흥미진진한 모험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언제나 노심초사하게 되는 모험이었다.
정오는 예나가 인형 머리를 빗겨주는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도울 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이국순 여사와 정지헌 조수의 사이에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두 사람에게는 일종의 체계가 생긴 듯했다. 국순은 주방일 못 하는 딸만 데리고 살다가 30년 만에 제대로 된 조수를 두게 된 것이 뿌듯해 보였다.
정오가 조리대 앞에 앉아 음식을 주워 먹으니 국순이 잔소리했다.
“이따가 먹어.”
“어차피 나 주려고 하는 건데 먼저 먹으면 어때.”
“손님도 오는데 좀 참지, 자꾸 주워 먹고 있어.”
“그럼 어떡해. 배가 고프면 속이 울렁거리는데.”
정오가 입술을 불쑥 내밀고 대꾸했다. 둘째는 빈속 입덧과 함께 찾아왔다. 공복 상태에 울렁거림이 심했고 뭔가를 먹으면 조금 괜찮아졌다. 지켜보는 국순의 입장에서는 걱정스러운 일이었지만 사실 정오에게는 좋은 핑곗거리였다.
정오는 눈을 굴리다가 지헌의 앞에 예쁘게 놓인 호박전을 보았다. 호박 위에 빨간 고추와 쑥갓을 얹어 부치니 호박전마다 꽃이 앉은 것 같았다.
“오빠가 만든 거야?”
“응. 예쁘지?”
“전은 이렇게 예쁘게 부치는 사람이 그림은 왜 못 그려?”
타박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지헌은 정오를 흘겨보았고 옆에서 정오와 지헌의 대화를 들은 국순은 픽 웃으며 물었다.
“우리 정 서방도 그림 못 그려?”
“아닙니다, 어머니. 잘 그립니다. 제가 뭐든 잘하니까 정오가 질투하나 봐요.”
“왜 질투를 하고 그래. 유치하게.”
국순이 지헌의 편을 드니 지헌이 혀를 날름 내밀었다. 콧방귀를 뀐 정오가 팔을 아무렇게나 들어 올렸다가 팔꿈치로 국자 거치대를 건드렸다.
“아얏.”
방금 전까지 정오를 놀려먹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지헌이 표정을 바꾸고서 정오에게 잽싸게 다가왔다.
“괜찮아?”
이내 심각해진 지헌의 눈빛에 국순은 슬쩍 미소 지었다. 종알종알 옥신각신하는 모습은 오누이 같은데, 저렇게 챙기는 걸 보면 영락없는 잉꼬부부였다.
“가만히 좀 있어.”
지헌이 정오를 식탁에 가만히 앉혀놓고 조리대로 돌아왔다. 정오는 조리대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잠시 후 승규네 가족이 찾아왔다. 도빈의 우렁찬 목소리가 가장 먼저 들려왔다.
“예나야아아아!”
“도빈아아아아!”
도빈이 부르는 소리에 예나가 달려갔다. 예나는 도빈을 만나자마자 오늘의 기쁜 소식을 전했다.
“나 동생 생겼어! 내년에 태어날 거야.”
“정말? 내 동생도 내년에 태어나는데!”
“신기하지?”
“응! 동생들끼리 약속했나 봐!”
두 아이의 대화로 진서는 갑작스럽게 초대를 받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부른 거였구나! 정말 축하드려요! 우리 셋째는 이렇게 빨리 친구가 생겼네!”
승규도 진서의 말을 거들어 축하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선물이라도 사 가지고 올걸 그랬네.”
“지금도 안 늦었어. 인터넷 주문해.”
지헌이 승규에게 대꾸했다. 승규는 지헌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좋은 사람들과의 시간은 후딱 지나간다.
승규네 가족이 떠난 후 예나를 재우고 뒷정리를 하며 국순이 저녁 시간의 여운을 되새기듯 정오에게 말을 걸었다.
“덕분에 오늘 많이 웃었네.”
“응, 엄마. 재미있었지?”
가까운 이들과 함께하는, 임신 기념 가족 잔치. 이 역시 정오가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
행복한 감상 뒤에는 국순의 넋두리가 이어졌다.
“사돈어른한테도 인사를 해야 하는데 말이야.”
그릇 정리를 하던 정오의 손이 멈칫했다. 낮에 지헌이 했던 얘기가 마음에 걸렸다. 재광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했다.
뒷정리를 마치고 국순과도 인사한 후, 침실로 들어온 정오가 지헌에게 물었다.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아버님 말이야.”
정오의 의문에 지헌도 끄덕였다. 아버지의 반응은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정오가 지헌에게 넌지시 제안했다.
“오 실장님한테 여쭤보는 게 어때?”
*
다음 날 아침, 지헌과 정오는 곧장 병원을 찾았다.
재광의 수행비서인 오 실장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영미가 며칠 전에 쓰러져 입원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룹 안팎으로 사건이 많은 때라 아무에게도 알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소식을 들은 지헌은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하지만 남편이 겉으로 감정표현을 크게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정오는 그의 숨소리가 깊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정오는 지헌을 설득해 병원을 찾았다.
가족의 끈이라는 것은, 강하지 않을 때조차 너무나도 질기다. 끈을 잘라내는 유일한 가위는 마음에 있어서 마음에 칼날을 세우면 내 심장도 다치게 된다.
그래서 잘라내기 어려운 끈.
재광은 영미를 며칠 지켜보다가 밀린 업무를 처리하러 출근했고, 영미의 곁에는 간병인이 있었다. 지헌이 병실 밖에서 간병인과 이야기하는 동안 정오는 먼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단둘이 영미와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라도 먼저 알아보고 찾아와 다행이었다. 거의 2개월 만에 마주한 장영미 여사는 생기를 모두 잃은 얼굴이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어려운 상태로 조용히 숨을 내쉬고 있는 앙상한 몸이 안타깝게 여겨졌다.
마음은 평생 늙지 않는데 몸은 죽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아픈 일인지. 이 비통함은 가까이에서 지켜보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다. 지금 영미의 머릿속에선 살아온 날들이 흘러갈 것이다.
‘아직도 저를 원망하세요?’
정오는 영미의 곁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영미가 고개를 돌려 정오를 바라보며 뻐끔거렸다. 마른 입술이 물을 찾고 있는 듯했다. 정오는 전동침대를 올려 영미의 상체를 일으켜서 입을 축여주었다.
영미가 고통스럽게 물을 한 모금 넘겼다. 정오는 다시 전동침대를 내려 영미가 편히 눕게 해주었다.
금세 건조해진 공기, 잠시 침묵하고 있던 영미가 사막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때…….”
“…….”
“……아이가 있는 줄 몰랐어.”
“…….”
“미안하다. 고생시켜서.”
뜻밖의 사과에 정오의 눈이 커졌다.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심장이 파들파들 떨려왔다.
그토록 기다렸던 말이었는데도 가슴은 털썩하며 무너져내렸다. 영미보다 더 먼저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렵게, 힘겹게 낸 목소리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
그래도 너무하잖아.
약해진 사람의 사과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약한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은 물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동등하게 마주 서서 사과를 받고 싶었다. 정정한 얼굴로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지헌이었다. 채은엽도, 채은비도, 함대근도 지헌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 권배일에게는 사과를 받았지만, 지헌에게는 또 다른 상처가 남았다.
그럼에도 남편은 괴로운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따금 악몽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그는 앞으로 잘하면 되는 거라며 앞날을 향해 우직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사과하는 사람에게는 사과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국순에게서 그런 가르침을 받아온 정오였다.
내 마음이 준비가 안 되었을지라도, 남편을 위해서는 사과를 받아야 한다. 이분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정오 또한 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열었다.
그 순간 반쯤 열려 있던 출입문이 더 활짝 열렸다.
“어머니.”
목소리만큼이나 담담한 걸음걸이로 지헌이 다가왔다.
지헌은 이내 영미와 눈높이를 맞추어 그 앞에 바짝 앉아 영미에게 말했다.
“사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알고 있어요. 지금은 움직이기도 힘드실 테니 더 버거우시겠죠.”
밖에서 영미의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과는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지헌의 말에 정오는 흠칫 놀랐다.
이, 이래도 되나?
이봐요, 정지헌 씨, 당신 어머니 아프시잖아. 이래도 돼? 후회하지 않겠어?
정오는 지헌과 영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영미의 눈빛이 떨려오는 것이 보였다. 지헌의 냉랭한 거절에 크게 상처를 입은 표정이었다.
“말씀 몇 마디로 과거를 청산하시고 마음 편해지시겠다고요?”
지헌의 기세에 그 옆의 정오가 도리어 조마조마했다.
“잘 생각해보세요. 어머니로 인해 고통받았던 사람이 과연 정오와 저, 둘뿐이었을지.”
지헌의 목소리는 덤덤하고 냉랭했지만 작은 흔들림이 있었다.
그 나직한 원망이 조용히 이어지는 사이에, 정오는 점점 심장이 뜨끈해졌다.
아프지 않았던 어딘가가 따끔거렸다.
“편해지려고 하지 마세요.”
원망의 말인 것 같지만.
어쩌면 영미는 읽어내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정오의 눈에는 분명히, 지헌의 진심이 보였다.
“이겨내세요. 건강해지셔서 다시 사과해주세요. 계속 기다릴 테니까.”
내 어머니는 그렇게 쉽게 떠나지 않을 거라는, 아들의 믿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