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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기적의 아이 (157/183)


157. 기적의 아이
2022.10.29.


6년 전, 5월 27일 아침.

아직 출산 예정일까지는 3주가 더 남았는데 양수가 터져버렸다. 정오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슨 정신으로 병원을 갔는지 모르겠다. 옆에 국순이 없었다면 아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엄마만 의지해서 병원에 갔다. 국순이 미리 짐을 싸 두어 우왕좌왕하는 일은 없었다.

병원에 가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소변 검사를 하고, 항생제 검사를 하고, 내진을 하고…….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흘러 어느새 정오는 분만 대기실에 누워 있었다.

자궁의 진행이 더디다고 했다. 양수가 터졌는데 아기는 내려오지 않았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촉진제가 투여된 후 조금씩 배가 아파왔다. 점점 강도가 세지니 정오는 더럭 겁이 났다.


“엄마, 나 어떻게 해…….”

“괜찮아. 괜찮아. 할 수 있어. 괜찮아.”

국순이 단단하게 말했다.


“어떡해. 어떡해…….”

“아직 진통 시작도 안 했어.”

“그러니까 어떡해.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아픈 것 같아고오…….”

“그냥 몸에서 수박 하나 빼낸다고 생각해.”

“……엄마 그게 할 소리야? 무서워 죽겠는데에…….”

“수박을 빼낸다고 생각하면 조금 덜 힘들 수도 있다고.”

국순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일어났다. 사실은 국순 또한 걱정이 컸지만 겁을 잔뜩 집어먹은 딸을 위해 계속 괜찮은 척했다.

바짝 마른 입술로 덜덜 떨고 있는 아이가 안쓰러워 물을 떠다가 입술이라도 축여주려는데 정오가 덥석 붙잡았다.


“엄마아, 가지 마. 가지 마아.”

“좀 있어 봐.”

“어딜 가려고오.”

“물 뜨러 가는 거야.”

“싫어. 그냥 내 옆에 있어. 애기 나올 것 같단 말이야아.”

국순은 정오의 호들갑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한 자리를 지켜야 했다.

진통은 있지만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시간이 좀 지나니 엄마를 닦달하는 것도 지쳤는지 정오가 조용해졌다. 그사이에 국순은 정오의 손을 꼭 붙들고 중요한 결정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제대혈 보관이라는 게 있다더라. 내가 제일 먼저 손주 본다고, 친구들이 돈을 막 몇십만 원씩 주더라고. 그래서 그걸 했네. 엄마가 네 이름으로 서명했어. 괜찮지?”

“몰라아. 엄마가 알아서 해애…….”

정오는 간헐적인 진통과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국순은 설명을 이어갔다. 딸에게 백만 원의 투자가 헛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싶었다.


“애기 탯줄을 옛날에는 그냥 버렸는데, 거기 대단한 게 있다더라. 거기 있는 피로 난치병도 치료할 수 있대. 백혈병 같은 것도 옛날에는 그게 뭐냐, 골수이식으로 했는데 이제 탯줄로 할 수가 있다더라. 엄청나지?”

“엄마아, 나는 엄청 아프다구우…….”

“아무 병 없이 건강하게 자라주면 좋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우리 손녀딸은 형제도 없는데 나중에 큰일이라도 생기면 뒤늦게 후회할 거 아니야. 그래서 15년만 보관하기로 했어. 15년 뒤에 연장신청도 할 수 있다고 그러네. 엄마가 잘했지?”

“그래. 잘했어, 잘했어…….”

정오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충 대답했다. 국순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금세 진통의 강도가 세졌다.

두 모녀의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일곱 시간.

정오는 산고 끝에 천사를 만나게 되었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정오의 품에 안겼다. 국순은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이마에 붉은 반점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 정말 천사가 키스를 해준 듯 어여쁜 아기.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아기짓을 하던 딸이 그새 어른이 된 듯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고, 대견했고, 애틋했고, 자랑스러웠다.


 

***

제대혈 은행에서는 매년 예나의 생일마다 안내 문자를 보내줬다. 여태 국순이 정오에게 알리지 않고 문자메시지를 관리하고 있었던 건 여전히 백만 원은 큰돈이기 때문이었다.

보관된 제대혈은 쓰이는 경우보다 쓰이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기 때문에. 혹여나 딸에게 한 소리를 듣지는 않을까 해서.

물론 평생 쓰이지 않고 건강하게 산다면야 좋겠지만, 이렇게 가족에게 도움이 된다면 뿌듯하고 다행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제대혈 이용은 본인과 부모, 조부모, 형제까지 모두 가능해서 조직적합성항원형만 맞는다면 영미 또한 공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너는 기억도 안 나지?”

국순이 6년 전의 이야기를 꺼내며 픽 웃었다.


“엄마아!”

눈물이 글썽글썽 맺힌 정오가 국순의 목을 끌어안았다.


“우리 이국순 여사님은 어쩌면 이렇게 현명하실까? 세상에서 제일 현명해, 우리 엄마!”

쪽쪽쪽쪽.


“언제는 나보고 고구마라며.”

“엄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고구마잖아. 고구마로는 뭘 해도 맛있다고.”

쪽쪽쪽쪽쪽.


“아유! 징그러워. 저리 가!”

“정 서방 불러올게!”

국순의 뺨에 뽀뽀를 열 번쯤 한 정오가 국순에게 밀려나 두 팔을 팔랑거리며 침실로 갔다.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지헌의 모습이 보였다. 침실 한편에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지헌이 조금 애처로워 보였다.


“오빠.”

“응.”

그래도 정오가 부르니 지그시 미소 지어주었다.


“엄마가 할 말이 있대.”

“어머님께 말씀드린 거야?”

“응. 얘기는 해야지.”

후우우. 시름이 더욱 깊어진 얼굴로 지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모습은 자못 근엄하고도 강직해 보였다. 이타주의자인 국순의 어떠한 설득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어머니.”

아니나 다를까. 국순의 앞에 앉은 지헌은 국순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예나가 고집부려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마 예나도 그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몰라서 그러는 걸 거예요. 공여를 하려면 공여 나흘 전부터 조혈모세포 성장인자 주사라는 걸 맞아야 해요. 입원해서 혈액도 다량 채취해야 하고요. 예나는 아마 혈액채취를 하다가 쓰러질 겁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런 건 바라지 않으실 거예요.”

조금도 감정을 보여주지 않고 또박또박 얘기하는 남편의 모습에 정오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정오도 설득될 만한 언변이었다.


“오빠, 그런 게 아니야.”

정오가 끼어들었다.

국순도 지그시 웃으며 지헌의 앞에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지헌의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 국순이 내민 휴대폰에 문자메시지가 있었다. 오래전의 문자메시지였다.

- ○○제대혈 은행. 자녀분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맡겨주신 제대혈은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지헌은 이게 무슨 내용인가 하여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예나가 태어날 때 제대혈 보관 신청을 했어. 제대혈 은행에서 잘 보관하고 있다고 이렇게 매년 문자를 보내주더라고.”

“…….”

“이걸 쓰면 돼. 예나 할머니도 공여받을 수 있어. 예나가 고생할 필요도 없고.”

국순의 설명에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정오가 부르기 전에 지헌은 침실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겨 가슴이 따끔따끔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왜 내가 공여를 할 수는 없을까. 내 딸은 된다는데 나는 왜 안 될까.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 가슴 한 구석을 비우고 살아야 했던 어린 딸이 또다시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 힘들어지는 걸 볼 수는 없었다.

기증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나 있는 이별을 천천히 준비하는 것이 도리이리라 생각했다. 그 굳은 의사를 전달하려고 했는데.

생각도 해본 적 없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 아뇨, 아뇨…….”

지헌은 당황스러워 평소의 정지헌답지 않게 말을 더듬거렸다.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저는, 저희 어머니는…… 그럴 자격이…….”

내 어머니가 정오한테 어떻게 했는데. 또 예나에게는 어떻게 했는데.

장모님과 정오와 예나가 제 어머니를 평생 미워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국순이 팔을 뻗어 지헌의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그 자격이라는 건 예나랑 유전자형이 같다는 게 자격이야. 할머니니까 공여받을 수 있다는 게 자격이고.”

“…….”

“좋은 데 쓰일 수 있다면 다들 뿌듯할 거야. 우리 예나는 또 얼마나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겠어. 안 그래?”

지헌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기어이 굵은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지헌은 급하게 제 얼굴을 가렸다.

아빠와 절교를 선언하고 방에 틀어박혀 있던 예나가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예나는 거실에서 벌어진 상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깨금발로 조심스럽게 정오에게 다가간 예나가 정오의 귀에다 대고서 속닥였다.


“엄마, 아빠 울어?”

“그런가 봐.”

“왜?”

“모르겠다. 우리 예나가 삐쳐서 그런가?”

정오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예나가 슬그머니 그 곁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인 지헌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아빠 울지 마. 아빠랑 다시는 얘기 안 한다고 한 거 취소할게.”

지헌은 손을 들어 그 작은 팔을 고이 잡았다.

보석 같은 아이.

너에게 많은 것을 주고 싶은데, 내가 받기만 하는 것이 너무나 미안하다.

*

다음 날, 병원을 찾아간 지헌과 정오는 재광에게 예나의 제대혈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이걸 어떻게…….”

재광의 반응은 지헌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걸 어떻게…… 그 귀한 걸 어떻게 받아…….”

“귀한 거니까요. 공여받으시고 얼른 건강해지셨으면 좋겠어요.”

미안해서 받을 수가 없다는 재광을 정오가 설득해야 했다. 결국 재광이 바르르 떨면서 정오의 손을 부여잡았다.


“너한테는, 예나한테는, 그리고 우리 사돈어른한테는 어떻게 감사하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미안한데, 고마움만 쌓이는구나…….”

바르르 떨면서 정오의 손을 부여잡는 재광의 손길에 정오가 도리어 무안할 지경이었다.

제대혈 공여에 대해서는 일단 영미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 미리 알게 되면 영미가 큰 부담을 느끼리라 판단했다. 영미는 기증자가 나타난 줄로 알고 감사히 여길 것이다.

병원을 나서는 길에 정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나랑 결혼하길 잘했지?”

턱을 위로 바짝 세우고서 으스대듯 말하는 목소리가 지헌의 귀에는 사랑스럽게만 들렸다.


“그렇지? 나랑 만나길 잘했지?”

“내가 이럴 때만 그런 생각을 하는 줄 알아?”

아직도 아내는 그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늘 생각해.”

굳이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너는 나의 구원이고, 기적인데.

영원히 그럴 텐데.

지헌은 걸음을 멈추어 정오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어? 오빠, 사람들이 보겠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야?”

“…….”

“내가 이정오를 만난 걸 이렇게 자랑하라고 그러는 거 아니었어?”

입술 가까이에서 간질거리는 숨결에 정오가 싱긋 웃었다. 정말로 지헌은 세상에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깊이 입술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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