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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기억이 돌아왔어? (161/183)


161. 기억이 돌아왔어?
2022.11.12.


7년 전. 지헌의 생일.

연애를 시작한 후 처음 맞이하는 생일이었다.

정오가 지헌을 집으로 초대했다. 지헌이 집 앞으로 찾아가니 정오가 뛰어나와 지헌을 반겼다.


“얼른 올라가자.”

정오의 재촉에 지헌은 가슴 안쪽이 간지러웠다. 생일에 무언가를 기대하는 건 아주 어릴 때나 품어본 마음이었는데, 새삼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뼛속까지 어린애 감정일 수는 없었다. 건강하게 장성한 남자라.

지헌은 앞서 계단을 오르는 여자친구의 들뜬 발걸음에 자신의 새까만 마음이 조금 미안해지기도 했다.

이윽고 정오가 현관문을 열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짠! 생일 축하해, 오빠!”

현관문 안쪽 작은 상에 한 끼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작은 상 위가 반찬 그릇들로 꽉 차 있었다. 음식은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정오에게 많은 요리를 해주었지만 정작 얻어 먹어본 적은 없는 지헌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은 화를 부르는 요리치라서 엄마가 밥도 못 짓게 한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정오가 하루아침에 요리 천재가 됐을 리는 없었다.


“네가 만든 거야?”

“엄마가 보내주셨지.”

“미역국까지 전부?”

“내가 만든 미역국 먹으면 생일을 물리고 싶을걸.”

“내 생일이라고 말씀드렸어?”

“아니. 엄마는 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다 해줘.”

“……그럼 어머님은 다 네가 먹을 거라고 생각하고 보내주신 거야?”

“오빠가 남긴 건 내가 다 먹을 건데 뭐.”

정오가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 지헌은 어질어질했다. 한 번도 뵌 적 없는 여자친구의 어머니께서 정성 들여 만들어주신 음식을 넙죽 받아먹는 처지가 되었다.


“오빠가 맛있게 먹어주면 엄마도 기뻐할 거야.”

“내가 먹을 거라고 말씀 안 드렸다며.”

“엄마는 내 기분이 좋으면 좋다고 하시거든. 오빠가 맛있게 먹어주면 내 기분이 좋으니까 엄마도 좋아하시겠지.”

뵙지 못한 어머님에 대한 송구함에 더불어 부러운 마음이 싹텄다. 정오와 정오의 어머니 사이에는 지헌이 넘볼 수 없는 진한 사랑이 있었다. 정오는 언제나 사랑을 가득 받는 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빠는 어머니 아버지 축하 많이 받았어?”

지헌이 제 집안의 분위기를 생각하는 걸 어찌 알았는지, 정오가 부모님에 대해 물었다. 지헌은 정오처럼 사랑 넘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가 없었다. 지헌의 가족에게는 그런 애틋함이 없었다.


“어머니가 아침에 전화하셨어. 생일 축하한다고.”

지헌의 단조로운 대답에 정오가 끄덕였다. 더 이어지는 질문은 없었다. 지헌이 가족에 대해 말하기를 꺼린다는 사실을 정오도 차츰 알아가고 있는 듯했다.


“오빠, 얼른 먹어. 그래도 플레이팅은 내가 한 거야.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그릇들로.”

으쓱거리는 여자친구가 귀여워서 지헌은 웃고 말았다. 음식들은 정말로 전부 다 맛있었다.

특히 미역국은 최고의 맛이었다. 멀리 있는 딸을 향한 사랑이 온전히 느껴지는 맛이라고 해야 할까. 지헌은 한 번도 뵌 적 없는 정오의 어머니께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었다.

그득한 점심상을 비워갈 즈음, 정오가 침대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오빠, 내가 선물도 준비했지.”

선물이 또 있었다.


“짠!”

정오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지헌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을 확인하자마자 푸흡,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책 두 권. 이정오다운 선물이었다.


“돈이 없어서 좋은 걸 못 샀어. 다음 주에 알바 월급 타면 다른 것도 사줄게. 그래도 특별한 책이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

“그럼 네가 읽던 걸 주는 거야?”

“아니. 새로 샀지.”

“네가 읽던 걸 줘야지. 이건 네가 좋아하는 책의 복제품이잖아.”

“아니야. 거기 박혀 있는 활자를 좋아하는 거란 말이야.”

지헌은 정오를 놀리는 것이 재미나 장난스럽게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 시무룩해진 정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바꿔줄게.”

“아니야. 괜찮아.”

“왜.”

“여기 뭘 써놨네.”

책의 맨 앞장에 정오의 손글씨가 있었다. 책 내용보다는 정오가 쓴 몇 줄의 글이 마음에 들었다.


“고마워. 다른 건 안 사줘도 돼.”

잠시 울상이 될락 말락 했던 정오의 얼굴에 다시 만족의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지헌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제 뺨을 감싼 커다란 손이 턱을 느릿하게 간질이자 정오의 눈동자가 꽉 긴장했다.


“……으응? 왜?”

“선물에 대한 보답.”

“…….”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걸 줬으니 나도 보답을 해야지.”

“아니, 정지헌 씨. 왜 그렇게 밝히세요.”

정오의 옅은 지적은 곧 지헌의 입술에 파묻혔다.

대낮부터. 마치 선물에 대한 보답을 하기 위해 일부러 선물을 받은 것처럼.

지헌에게 생일이란 노골적으로 마음을 드러내기 좋은 날이었다. 여자친구가 생긴 후로 여자친구만 옆에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그렇고 그런 마음을 갖게 되는 지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이 앞서더라도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데 정오야.”

뜨거워진 입술을 잠시 거둔 지헌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간 손을 꼼지락거리며, 정오를 불렀다.


“속옷 새로 샀어?”

“……그걸 어떻게 알아?”

“만져보니 딱 알겠는데.”

지헌의 대답에 정오의 드러난 피부가 전부 발긋해졌다. 그 변화 역시 지헌은 금방 알아보았다.


“고마워.”

“아니 뭐가 고맙다는 거야아.”

당황한 정오의 목소리는 이번에도 지헌에게 잡아먹혔다. 그녀의 단 숨이 꼼지락꼼지락 풀려 그의 숨결에 얽혀들었다.

지헌에게는 가장 행복한 생일이었다.


 

***

새벽 4시. 지헌은 잠에서 깨어났다.

어머니도 깊이 잠이 든 상태라 지헌은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세상은 아직 어두웠다. 하지만 지헌의 머릿속은 오래된 안개가 걷힌 것처럼 맑고 상쾌했다. 심장이 몹시 두근거려서 곧장 운전대를 잡을 수는 없었다.

지헌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한참 뒤에 차를 몰았다. 지헌이 향한 곳은 재광과 영미의 집, 그의 본가였다.

지헌의 갑작스런 방문에 관리인도 깜짝 놀랐다. 지헌은 집안의 다른 이들이 깨지 않게 조심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찾은 곳은 자신의 오래된 물건을 두는 창고였다. 언젠가 7년 전에 쓰던 휴대폰을 찾으려 이곳을 뒤진 적이 있었다. 그때 무심코 책 두 권을 지나쳤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찾았다.’

지나쳤던 책을 다시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헌은 설레는 마음으로 책 표지를 열었다.

「오빠, 생일 축하해!

마음은 별도 달도 따주고 싶은데 책 두 권뿐이라 미안해.

대신 책 속에서 별도 달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나중에 내가 돈 많이 벌어서 더 많은 책을 사줄게.

정말정말 생일 축하해!」

정오의 담백한 손글씨에 지헌의 눈동자가 젖어갔다.

이정오는 돈 많이 벌어서 더 많은 책을 사주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켰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사람.

혹여 그가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이 고통스러울까 염려하는 듯, 그녀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힌트를 꾸준히 던지면서도 과거의 이야기를 일부러 꺼내지는 않았다. 그를 자극하지 않았다.

기억은 반짝하고 섬광이 터지듯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그의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고 7년 전과 똑같은 사랑으로 그를 지켜봐준 정오의 인내심 덕분이었다. 그녀가 내내 선물한 마음의 안정, 그 편안함 덕분이었다.

*

이른 새벽.

지헌은 집으로 돌아와 조심스럽게 중문을 열었다.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센서등이 켜졌다. 그 기척에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오가 뛰어나왔다.


“깨어 있었어?”

“아니. 거실에서 잠들었어.”

정오가 별일 아닌 듯이 대답했다. 침대에서 편히 쉬지 못하고 거실 소파에서 지헌을 기다리다가 잠이 든 것이다. 지헌이 되레 속이 상했다. 간밤에 전화했는데, 늦을 거라고.


“내가 늦게 온다고 했잖아.”

“푹 잤어. 괜찮아. 근데 왜 늦었어? 무슨 일 있었어?”

지헌의 핀잔을 가벼이 넘긴 정오가 득달같이 물었다.


“어머님이랑 얘기는 했어?”

뭐가 어떻게 됐을까. 갈등은 좀 풀렸을까. 왜 늦어지는 걸까. 지헌이 어머니 얘기는 꺼내지 않아 정오는 괜한 걱정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정오의 순박한 눈동자에 지헌은 다시 반성하고.

그는 어깨를 기울여 정오를 꼭 끌어안았다. 감정이 넘실거리며 숨이 뜨거워졌다.

7년 전을 기억해낸 머리와 가슴은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지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영어 천지의 나라에서 들려오는 한국어에 울음을 터트려버린 7년 전의 이정오처럼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조심스럽게 그녀가 궁금해하는 이야기를 전했다.


“어머님이 미안하다고 하셨어.”

“오빠도 받아줬고?”

“응.”

“잘했어. 잘했어.”

“내가 먼저 사과를 받았네.”

“좋은 일이지.”

말끝이 떨려오는 것을 숨기며 건넨 이야기에 정오는 제 일처럼 뿌듯해하며 기뻐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피곤하겠다. 조금이라도 더 자.”

“그래. 같이 자자.”

지헌은 일단 정오를 재워야겠단 생각에 품을 무르고서 화장실로 갔다.

정오는 지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지헌이 벗어놓고 간 외투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왠지 주머니가 볼록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엥. 이게 뭐야.”

주머니 안에 귤이 들어 있었다. 다른 쪽 주머니에도 똑같이 귤이 하나 들어 있었다.

옛날 생각이 나서 정오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7년 전 정오는 지헌의 외투 주머니에 이따금 초콜릿이나 사탕을 몰래 넣어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에는 귤을 넣어두었었다.


‘기억이 조금 돌아왔을까? 아니면 그냥 우연?’

지헌은 최면 치료를 통해 7년 전 11월 2일과 11월 3일을 일부 기억해냈다. 하지만 그녀가 그의 주머니에 귤을 넣어둔 것까지는 기억해내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은 없었다. 그가 그 정도를 기억해낸 것만으로도 정오는 대견하고 뿌듯했다.

큰 욕심은 없다. 그의 기억이 돌아온다면 좋겠지만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아, 그래도 설레네. 괜히 설레.’

하지만 단단한 마음과는 달리, 그의 주머니에 든 귤을 발견하니 심장이 쿵쿵거렸다. 정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와중에 그의 외투가 놓여 있던 자리에서 서류봉투를 발견했다. 두둑한 서류봉투였다. 서류봉투의 두께와 접힌 자국으로 짐작하건대 그 안에 든 것은 책이 틀림없었다. 정오는 서류봉투를 들어 그 안을 힐끔 보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어어?’

하지만 잠시 후 다시 서류봉투를 집어 들게 되었다.

그녀가 잘 아는 책의 표지가 서류봉투 안쪽에서 설핏 보였다.

설마.

병원에서 들었던 심쿵이의 심장박동처럼 맥이 빨라졌다. 서류봉투 안으로 손을 넣어 책을 확인했다.

손톤 와일더의 「우리 읍내」. 그리고…….

그녀가 7년 전 지헌의 생일에 선물한 책들이었다.

정오는 떨려오는 손끝으로 책장을 넘겼다. 7년 전 그녀가 쓴 글이 첫 장에 그대로 있었다.

하아.

그 반가운 글씨에 목이 메었다.

어머님이 건네주신 걸까. 아니면 그가 찾아냈을까.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술을 못 마시게 했던 건 네가 예뻐서였어.”

책 첫 장의 글씨들을 매만지던 움직임이 멈췄다. 돌아온 지헌이 뒤편에서 정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어깨너머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그녀 또한 얼굴이 뜨거워졌다.


“네가 예뻐서, 내가 없을 땐 누가 널 훔쳐 갈까 봐, 내가 있을 땐 내가 충동적으로 행동할까 봐.”

정오는 천천히 몸을 돌려 지헌과 마주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기억이 돌아왔어?”

그가 대답 대신 입술을 길게 늘여 웃었다.

꺄아아아!

아직 새벽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서, 정오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지헌의 목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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