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늦은 상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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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늦은 상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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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늦은 상견례
2022.11.16.
몇 달 전, 지헌은 최면치료를 앞두고서 정오에게 물었었다. 7년 전의 정지헌에게 궁금한 것이 있느냐고.
그때 정오는 곧장 몇 가지를 말했다. 7년 전 왜 자신에게 친구 한 명 소개해주지 않았는지, 왜 자신이 술 마시는 걸 싫어했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고.
그때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던 지헌이 진실을 들려주었다.
연애가 처음이었던 지헌은 정오가 예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정오가 너무나 귀한 사람이라 연애 초반에는 손잡는 것도 주저했었다. 자신이 품은 흑심의 정도를 잘 알고 있었다.
손을 잡으면 안고 싶을 테고 안으면 키스하고 싶어질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을 갈구하게 될 거란 것을.
그래서 그녀가 술을 마시는 것도 막았었다. 멜버른에서의 일이 계기였다.
멜버른에서 정오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처음 마시는 술 종류라 정오는 금방 취했고 지헌의 눈에는 그 모습이 몹시도 귀여워 보였다. 처음 느끼는 두려움이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실수를 할까 봐 긴장하게 되었다.
그렇게 멜버른에서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아쉽게 헤어졌다. 지헌은 헤어지며 연락처를 남겼다. 귀국하면 연락 달라고 몇 번을 강조하며 인사했다.
그 후에는 기다림과 후회뿐이었다. 왜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을까. 왜 나는 그녀와 약속을 분명히 하지 않았을까.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밤에도 놓지 못했다.
그녀가 귀국할 즈음이 되어서는 더욱 예민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의 연락 한 번에 눈 녹듯 스르르 풀려버릴 신경질이었다.
긴 기다림 끝에 서울에서 정오와 재회했다. 그때 지헌은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이제 그녀를 놓치지 않을 거라고.
다행히 정오는 그의 진심을 알아차렸고 그를 남자친구로 받아주었다.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한 건 그 이후였다. 그녀가 너무 예뻐서. 자신이 실수를 할까 봐, 그리고 다른 흑심 품은 놈들이 접근할까 봐.
친구를 소개시켜주지 못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남자라면 다들 정오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섣불리 누군가를 소개시켜줄 수가 없었다. 승규와도 가까워진 지 얼마 안 되었고 제대를 한 후에는 자주 만나지 못했기에 소개해주지 못했다.
또한 누군가와 함께 만나는 것보다 정오와 둘이 있는 시간이 좋았다. 지헌은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정오에게 푹 빠져 있었다.
7년 전의 이정오는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정오는 행동과 말에서 언제나 사랑이 넘쳐 흘렀다.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도 했다. 그 밝은 에너지가 무척 부러웠고 사랑스러웠다.
물론 지금도 눈물 나게 사랑스럽다.
정오는 꺄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지헌의 목을 끌어안았다. 세상이 잠든 새벽이라는 건 잊어버리고서.
“나한테 어떻게 고백했는지도 기억나? 오빠가 뭐라고 말했는지도?”
“……그 얘긴 하지 마.”
부끄러워하는 거 보니 진짜야. 정말로 다 기억하고 있어!
와아아아!
“근데 정오야, 지금 새벽인데…….”
“꼭두새벽부터 뭐해. 복권 당첨됐어?”
결국 정오의 난리법석이 국순을 깨웠다. 국순이 방에서 나와 뚱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게 아니라 어머님.”
지헌은 정오의 팔을 풀어내려 했지만 정오는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 오빠 기억이 돌아왔대!”
정오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반쯤 뜨여 있던 국순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나도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엄마아…….”
평소에도 일찍 일어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조금 더 잘 시간인데 시끄러워 일어난 예나가 칭얼거렸다. 그런 예나에게도 정오는 크게 말했다.
“예나야! 아빠 기억이 돌아왔어!”
“어? 정말?”
기억을 잃었다는 것. 그 절절한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기에 기억이 돌아왔다는 말의 무게 또한 가늠하지 못하면서도, 예나는 엄마의 기뻐하는 모습에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와아아! 기억이 돌아왔다아아!”
엄마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
예나는 아끼는 장난감을 며칠 동안 찾아 헤매다가 발견한 듯이 기뻐했다. 엄마를 따라서.
“만세! 돌아왔다아아!”
엄마의 두 손을 잡고 뱅글뱅글 돌던 예나가 두 팔을 높이 들고서 지헌을 끌어안았다.
“아빠! 만세에!”
지헌은 그런 예나를 번쩍 들어 안아주었다.
기쁘고 벅찬 와중에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잃었던 것을 되찾으니 아이의 존재는 더욱 애틋했다. 한 발 떨어져서 대견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국순의 존재 또한 그랬다. 길고긴 시간을 돌아, 자신이 이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 기적 같았다.
*
시간이 흘러 지헌의 집무실.
“또 해봐. 계속해봐.”
정오는 계속 지헌에게 말해보라며 채근했다. 7년 전의 일들을 기억하는 대로 뭐든 말해보라고.
“정말 신기하다. 그게 그렇게 갑자기 뿅 하고 생각날 수가 있는 거야?”
“잠들었다 깨어나니 거짓말처럼 머리가 맑아졌어.”
지헌도 잘 닦인 유리창처럼 깨끗한 제 기억이 놀라웠다. 언젠가 정오가 얘기한 것처럼 타임캡슐 안에 기억이 들어 있었던 것만 같았다. 상처 입지 않은 온전한 기억이.
“그래도 갑자기 생각난 건 아닐 거야. 그동안 이정오가 뚝심 있게 지켜봐준 결과겠지.”
이 모든 공을 정오에게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이정오가 몰고 온 기적 덕분이었으니까.
남편의 예쁜 말에 정오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마치 아내의 환심을 사기 위한 말이었던 것처럼 지헌이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오자 멈칫했다.
나는 얘기를 들으러 온 것이지 애정행각을 벌이러 온 것이 아니라오…….
집무실까지 따라 들어온 정오의 목적은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남편의 완염함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7년 전의 어렸던 마음, 어려서 더 순수했고 순박했던 그때를 떠올리니 설렘이 다른 사고를 막았다.
깨끗하게 돌아온 기억처럼 설렘에도 때가 묻지 않았다.
정오의 입술이 슬며시 마중 나왔다.
똑똑.
벌컥.
“친구! 무슨 일이야?”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승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척 다급한 일이라도 생긴 듯 문을 벌컥 열었다.
헉.
정오는 급하게 지헌의 어깨를 확 밀어버리며 그의 곁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이미 승규에게는 모두 발각된 상태. 승규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나 이따가 다시 올까?”
“어.”
지헌은 이따가 다시 오라고 했지만.
“아니에요! 얼른 오세요!”
정오는 얼굴이 붉어진 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내가 얘랑 좋은 시간을 왜 보내!”
도망치듯 떠나는 정오의 뒤에서 지헌이 버럭 대꾸했다.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정오는 재빠르게 줄행랑을 쳐버렸다. 화살은 승규에게 돌아갔다.
부부의 좋은 시간을 방해한 승규가 눈치를 보며 웅얼거렸다.
“미안한데, 네가 불렀잖아.”
그제야 지헌은 승규가 왜 찾아왔는지 기억해냈다. 아침에 승규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회사로 출근하느냐고. 할 말이 있다고.
할 말이 있다는 얘기에는 언제나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몸이 달아버리는 승규를 자극한 것이었다. 승규는 출근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런 승규에게 지헌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기억 돌아왔어.”
정오에게 안겨주었던 달콤함과는 대비되는 무미건조한 사실 전달.
그것만으로도 승규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어?”
“7년 전 기억이 돌아왔다고.”
“……그 집 나간 기억이 돌아왔다고?”
“그래.”
“군대 다녀온 기억, 군대에서 나 만난 기억, 호주 다녀온 기억까지 다 돌아왔다고?”
“그래.”
“군대에서 내가 너한테 수통마개 빌려준 것도 기억하고?”
“그래. 네가 그걸로 한 달 동안 생색내던 거까지 다 기억난다. 아버지 군번한테 물려받아서 두 개 갖고 있었으면서.”
“너, 이, 씨이!”
승규가 된소리를 외치며 지헌을 와락 끌어안았다. 정오가 안길 때는 기분이 마냥 좋았는데 승규가 안겨 오니 조금 떨떠름하여 지헌은 코를 벌름거렸다. 승규는 감격에 겨워 지헌을 껴안고서 슬쩍 흐느꼈다.
“울어?”
“…….”
“우냐. 남자가.”
“뭐 인마. 남자는 감정도 없냐?”
승규는 지헌을 껴안았던 팔을 거두고 옆으로 돌아서서 소매로 눈을 비볐다.
“씨이, 나쁜놈…… 축하한다. 나쁜놈…….”
“…….”
“내가 너 때문에. 어?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서러웠는데.”
“…….”
“군대에서 정말로 친했는데, 내가 너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데! 채은엽 그 자식한테 사기꾼 도둑놈 취급받고, 너는 그런 자식 때문에 나 같은 훌륭한 친구를 경계하고. 내가 얼마나 서러웠겠냐! 어? 씨이…….”
승규의 푸념에 지헌의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이 정도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내내 자신을 아껴준 친구가 있었다는 걸 확인받은 느낌이었다.
“미안해.”
“그래! 넌 미안해야지.”
코가 빨개진 승규가 버럭 대답한 후에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걱정스런 목소리였다.
“정말 다 돌아왔어? 군대 기억이 그리 좋지만은 않을 텐데 괜찮아? 이제 맨날 입대하는 꿈 꾸는 거 아니야?”
“그런 꿈은 평소에도 가끔 꿨어. 상상력으로.”
“씨이…….”
무엇이 울컥했는지 승규는 또 지헌을 끌어안았다.
“다시는 나 잊지 마. 알았어?”
승규의 호소에 지헌은 정오가 생각났다. 지헌이 예나가 자신의 딸이란 사실을 알게 된 날, 정오도 그런 말을 했었다. 날 잊지 말라고.
자신의 기억상실증 때문에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은 기억에 절박한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새삼 미안해서 안타까웠다.
“알았다.”
“사람들은 알아? 네 기억 돌아온 거.”
“아니. 가족들만 알지. 굳이 시끄럽게 말할 필요도 없고.”
“…….”
“너한테만 알려주는 거야.”
“왜?”
“네가 내…… 소중한 친구니까.”
지헌은 안으로 곱아드는 손가락들을 등 뒤로 감추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어 미소가 어색하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승규는 흡족한 듯 지헌의 등을 퉁 때렸다.
“짜식! 이제야 철이 들었구나!”
승규의 넘쳐나는 애정이 얼떨떨했고, 똑같이 반응할 수 없어 미안했지만 어쨌든 지헌은 모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다시 한 주가 흘렀다.
영미는 한 달이 넘는 병원 생활을 잘 마치고 퇴원했다. 아직 몇 번 더 검사를 받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2차 항암 치료를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현재로서는 예후가 좋은 편이었다.
다시 치료를 받을 수도 있단 생각에 어찔했지만 영미에게는 삶의 소중함, 가족의 소중함, 그리고 선한 마음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주말에는 지헌의 가족이 영미와 재광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국순까지 오게 되었으니 뒤늦게 상견례를 하는 셈이었다.
지헌은 방문하기 전에 재광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당부였다.
- 정오한테 이상한 말씀 하시면 안 돼요. 장모님한테도 이상한 말씀 하시면 안 돼요. 예나한테도 이상한 말씀 하시지 마세요.
‘얘는 우리를 얼마나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장모님을 모신 자리에서 제 부모가 실례를 할까 봐 걱정스런 마음이겠지만 여태 아들이 부모의 마음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서운했다.
하긴, 한 기업의 수장으로 보낸 세월이 반평생이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직원들에게 상처를 준 때도 많았을 것이다. 국순은 같은 회사의 직원이 아니라 하늘 같은 사돈어른이니 평소처럼 행동하지 말고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지헌의 가족이 저택에 도착했다고 직원이 알렸다.
재광은 영미의 방으로 갔다.
“여보, 사돈어른 오셨다네. 가자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영미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광이 옆에서 부축해주니 영미는 됐다며 손으로 미약하게 밀어냈다.
현관문이 열리고, 지헌의 가족이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가장 먼저 소리를 낸 건 예나였다.
“할아버지이!”
“우리 공주님 왔구나!”
손녀딸이 먼저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재광은 다가온 손녀딸을 번쩍 안아 들었다.
“할아버지, 저 사탕이요!”
예나는 이 기회를 틈타 곧장 용건을 외쳤다. 할아버지를 들볶지 말라고 엄마한테 잔소리를 들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 가자. 가자.”
손녀딸에게 뭐든 해주고 싶은 재광은 마냥 기분이 좋아 들썩들썩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옆의 분위기는 점잖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머니, 안녕하셨어요.”
정오가 한발 앞서가 영미에게 꾸벅 인사했다.
긴 투병 생활로 바짝 야윈 영미의 몸이 가녀리게 떨려오고 있었다. 이대로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여 정오의 손이 자연스럽게 영미에게로 향했다.
정오가 영미를 붙잡으려는 순간.
마치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영미의 무릎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미안하다.”
“…….”
“……내가 면목이 없어.”
영미가 떨려오는, 눈물진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