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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재판 기일 (163/183)


163. 재판 기일
2022.11.19.


지헌의 본가를 방문하기 전에 정오는 오늘 일어날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예전에 영미가 병실에서 대뜸 사과한 적이 있었고, 그때 지헌이 정오 대신 나섰다. 지헌은 영미에게, 건강해진 후에 다시 사과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제대로 된 영미의 사과를 받게 될 터였다.

사실 정오는 이제 영미를 원망하지 않았다. 병실에서 영미를 다시 만난 그 순간부터 마음은 서서히 녹아갔다. 그때 단번에 사과를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이제는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영미가 무안해지는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영미의 사과가 너무 빨랐다. 정오가 영미를 원망하는 마음보다 영미가 스스로를 원망하는 마음이 훨씬 큰 것 같아 정오도 놀랐다.

정오는 지헌의 다리를 쿡 찔렀다. 흠칫 쳐다본 지헌에게 예나 쪽을 향해 턱짓했다.

눈치 빠른 지헌은 금방 정오의 뜻을 알아챘다. 정황이 어쨌든, 손녀딸이 할머니가 무릎을 꿇은 모습을 볼 필요는 없었다.

곧장 뛰어간 지헌은 재광이 안고 있던 예나를 낚아채듯 안아 들어 재광의 작업실로 향했다.

이윽고 자리에는 정오와 영미, 국순과 재광만 남게 되었다.

정오의 무릎도 아래로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


“어머니, 저는 괜찮아요. 일어나세요.”

정오는 이번엔, 손녀를 빼앗기고서 우두커니 서 있는 재광에게 눈짓했다.

재광 또한 곧장 며느리의 뜻을 알아차리고 다가왔다. 정오가 영미의 팔을 붙잡아 일으키니 재광도 이를 거들었다. 영미는 이제 병원 신세를 벗어났으나 그래도 여전히 무리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영미는 정오와 재광의 손을 뿌리치지는 못하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서도 민망한 표정이었다. 정오가 그런 영미를 달래야 했다.


“어머니, 저는 이제 정말로 괜찮아요. 이제 어머니도 괜찮아지셨으면 좋겠어요. 짐이 있다면 내려놓으시고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요.”

모든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시차가 있다. 처음부터 그렇다.

8개월 만에 태어난 아기, 10개월을 다 채우고도 엄마 배 속에서 버티는 아기, 10개월 만에 걸음마를 하는 아기, 돌이 지나서도 겨우겨우 기어 다닐 줄만 아는 아기.

그리고 고등학생도 되기 전에 어른이 되는 아이, 직장을 갖고 아이를 낳도록 어른이 되지 못하는 사람…….

보통은 있을 테지만 정답은 없다. 8개월 만에 태어난 아기가 가장 건강할 수도 있고, 돌이 지나서도 기어 다닌 아기가 운동선수가 될 수도 있고 뒤늦게 어른이 된 사람이 모두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영미 또한 그럴 것이다. 이제 사랑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되었다면 이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그것을 뒤늦게 깨달았느냐 하는 원망은 이제 필요 없다. 걸어온 길에 대한 푸념보다는 걸어갈 길이 중요했다. 정오의 가족은 이제 시작이니까.


“병원에서, 편찮으신 와중에도 예나 구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아니, 그건 아니야…….”

영미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내가 미안하다. 예나의 공여를 받아선 안 되는 거였는데…….”

“할아버지이!”

영미의 목소리가 더듬더듬 이어지고 있을 때 복도에서 예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지헌과 함께 저편으로 떠났던 예나는 할아버지가 쫓아오지 않아 돌아온 것이었다.


“할아버지, 왜 안 와요?”

예나가 다가오자 정오의 입가에 미소가 생겨났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겸손해져도 자식 얘기에는 한없이 자랑스러운 보통의 엄마였다. 오늘은 예나에게도 뿌듯한 추억이 될 것 같았다.


“어머니, 제대혈 얘기는 예나한테 직접 말씀하시면 어떨까요? 예나가 많이 자랑스러워할 텐데.”

정오가 목소리를 바꾸어 영미에게 제안했다. 그제야 눈물을 닦아낸 영미가 예나에게 다가왔다.


“아가.”

“…….”

“고마워. 고마워, 우리…… 손녀딸.”

“왜요?”

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었다. 정오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우리 예나가 할머니한테 피를 나눠줬잖아. 그래서 고맙다고 하신 거야.”

“아하!”

그제야 그 뜻을 파악한 예나가 신나게 설명했다.


“할머니, 예나 피에는 지도가 있어서요. 길을 잃어도 할머니한테 돌아올 수 있어요.”

피에 있는 지도.

결국엔 만나게 될 사람들.

결국 영미는 예나를 끌어안고서 다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국순과 재광, 영미는 뒤늦은 인사를 했다. 7년이나 늦은 만남이었기에 재광과 영미는 미안한 마음이 컸다. 제대혈 보관 신청을 해준 국순에게 한참 고마움을 전한 두 사람은 다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재광이 점잖게 인사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자리를 일찍 마련했어야 했는데 이제야 모시게 되어서 송구합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많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사돈어른께 많이 배우겠습니다.”

“아닙니다. 귀한 시간 내주시고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리죠. 우리 아이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 지헌이 잘 부탁드립니다. 같이 살면서 사돈어른께 폐를 많이 끼칠 텐데…….”

“정 서방은 말도 행동도 고와서 어디 나무랄 데가 없어요. 너무 자랑스러운 사위죠.”

고운 말들이 오고 가는 내내 재광은 이따금 지헌의 표정을 살폈다. 지헌이 문자로 남겼던 말에 괜히 눈치를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더욱 운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 저…… 늦었지만, 애들 결혼식을 치르면 어떨까요…….”

“빨리 결혼식을 치르면 좋을 텐데, 정오가 둘째를 가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어차피 늦은 거 둘째까지 태어난 후에 하면 어떨까요, 사돈어른.”

국순이 정오를 대신하여 말해주었다. 언젠가 정오가, 배가 불러 웨딩드레스를 입게 생겼다며 칭얼거리던 것이 생각났다.

조용히 대화를 듣던 영미는 다시 숙연해졌다. 모든 절차가 어긋나게 된 건 자신의 탓이었다.


“저 때문에 모든 절차가 늦어졌습니다, 사부인…….”

“아닙니다. 이건 사부인 때문이 아니라 애들 때문이죠. 둘째가 바로 들어서서.”

국순이 고개를 젓고는 눈짓으로 지헌과 정오를 가리켰다.

지헌과 정오가 슬그머니 눈길을 피하니 국순은 씨익 웃었다. 정오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배짱 좋게 재광과 영미를 상대하는 엄마가 신기했다. 정작 엄마는 딸 생각만 할 뿐인데.

같이 식사를 하고, 어른들과 함께 결정지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저택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예나의 사탕을 만들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어갔다.

처음에는 죄인처럼 아무 말 하지 못했던 영미도 차츰 어색하게나마 미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국순이 자주 말을 걸어주어 헤어질 즈음에는 말문이 트이기도 했다.


“예나야, 또 놀러와. 자주 놀러와. 할머니가 많이 놀아줄게.”

영미가 예나의 머리를 고이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할머니도 사탕 만들 수 있어요?”

양손 가득 사탕 봉지를 든 예나가 물었다. 목적 없이는 방문도 없다는 투의 칼 같은 물음에 영미에게는 다음 숙제가 생겼다.


“그래. 할머니가 연습해서, 예쁜 사탕 만들어줄게.”

“그럼, 네!”

예나가 씩씩하게 조건부 대답을 했다. 사람들이 웃는 사이에 지헌은 영미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정오는 지헌이 영미에게 속닥거리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심각한 얘기인 듯이 영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재광, 영미와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와 정오가 지헌에게 물었다.


“아까 떠나기 전에 어머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

“별 거 아니야.”

“표정이 심각해 보이던데?”

“배일이 얘기였어.”

“아.”

채은엽과 관련된 사건의 진실을 모두 밝히고 자신의 잘못까지 모두 자백한 배일은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7년 전 뺑소니 사건의 피해자였던 지헌은 선처를 바랐으나, 배일 대신 징역살이를 했던 김진구 유족과의 합의가 쉽지 않았다. 다만 그간 경찰으로서 활약했던 공을 높이 사 실형은 면할 수 있었다.


“권배일 씨는 지금 어떻게 지내?”

“영어 공부하고 있어.”

“영어 공부?”

“언젠가 미국에 가서 바둑학원을 열고 싶대. 내가 투자해주겠다고 했어.”

“와아!”

“뭘 이 정도 가지고.”

지헌이 우쭐하는 모습이 우스워 정오는 배일의 마음이 멋져서 감탄했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가 미국에 가려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코끝이 찡하기도 했다. 배일의 앞날을 내내 응원해주고 싶었다.

배일의 기구한 운명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생각은 채은엽에까지 닿았다. 정오는 흘끔 달력을 확인하고는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은…….”

지헌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 날.

채은엽의 최종 재판 기일이었다.

지헌과 정오는 재판에 참석했다. 법정까지 가는 길에 지헌을 알아본 몇몇의 기자들이 접근해 왔지만 지헌은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비공개 재판이라 법정은 꽤 한산했다.


“은비도 왔어. 어머니랑 같이.”

은비는 피고인석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있었다. 까만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끼고 있었지만 정오는 은비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윽고 수의를 입은 채은엽이 법정에 들어섰다. 채은엽은 조금 야윈 것 같았지만 말짱한 모습이었다. 꽤 여유로운 표정으로 청중석을 쭈욱 훑어본 은엽의 눈빛이 지헌과 마주치자 꽤 날렵해졌다.

어디 두고 보자. 곧 자유의 몸이 되어 이 치욕을 되갚아주리라.

채은엽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여 정오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판사가 입장하니 채은엽은 곧장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정오는 기가 막혔다.


“표정 바꾸는 거 봐. 기가 막혀.”

“그동안 반성문을 마흔 번 썼다더라.”

정오의 귀엣말에 지헌이 응답했다. 마흔 번이면 거의 매일 반성문을 썼다는 말이었다. 정오는 더더욱 기가 막혔다.


“아니, 누구한테 반성문을 썼다는 거야.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오빤데 반성문은 대체 누가 받으셨대?”

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듣지 못하고 재판이 시작되었다.

채은엽은 잘못을 반성하면서도 재판 내내 무죄를 주장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범죄행위에 대해서만 반성문을 쓰고 나머지는 빠져나가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검사 측도 집요해졌다.


“검찰에서는 피고인이 은닉한 현금을 찾아냈습니다. 증인 함대근의 증언과 일치하는 금액이었고 자금의 흐름도 정확합니다. 이로써 피고인의 거짓말이 하나 더 밝혀졌습니다.”

검찰이 찾아낸 증거들이 밝혀질 때마다 변호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채은엽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증거와 증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검사 측 구형하시기 바랍니다.”

판사의 말에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고인은 아버지의 성공에 장애가 되는 일들은 빠르게 제거하며 아버지의 앞길을 다져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하여 시끄러운 사건을 만들 수 있는 김진구를 살인 교사하였으며, 아버지의 인사청문회를 앞두고서는 국회의원들을 포섭하여 신성한 국회를 모독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인사청문회가 실패하자 이 모든 일에 앙심을 품고, 정지헌을 살해해야겠단 마음으로 교통사고를 일으켰습니다. 이 교통사고마저도 실패한 후에는 정지헌의 딸과 어머니 장영미를 공격하여 장영미에게 상해를 입혔습니다.”

채은엽은 이 모든 발언이 사실이 아니라는 듯, 자리에서 눈물 글썽이는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건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본다면 채은엽이 억울하게 보일 정도로 꽤 그럴싸한 연기였다.


“모든 범죄가 일어나기 전에는 피고인의 치밀한 설계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수갑이 채워지던 순간까지 피고인은 본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할 심산으로 정신이 없는 척 연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피고인은 죄질이 불량하며 반성의 여지가 없고, 여전히 집요한 복수심에 가득 차 사회에 심각한 해악을 끼치는 존재라 판단할 수 있기에 본 검사는 피고인을 사회와 영원히 격리시킬 수 있도록 무기징역을 구형하는 바입니다.”

연극적인 선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던 채은엽의 눈이 번뜩였다. 저것이 그의 진짜 표정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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