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다시 바둑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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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다시 바둑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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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다시 바둑대회
2022.11.23.
검사가 자리에 앉은 후 판사가 말했다.
“변호인 측 최후변론하세요.”
잠깐 떠올랐던 은엽의 표정은 이내 사라졌다.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은엽은 다시 선한 눈에 어쩔 줄 모르겠단 표정으로 인상을 싹 바꿨다. 정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표정에 다시 한번 소름이 쫙 끼쳤다.
“피고인은 대한민국의 법을 수호하는 데 평생을 바친 대법관 아버지와, 법과대학 교수인 어머니의 교육 아래 성장하여 법의 지엄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변호사가 된 후에는 수 회 국선 변호사로 활동하며 죄 없고 힘없는 이들의 편에 서 이들을 대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인권 변호사인 피고인이 치밀하게 증거가 조작된 사건들에 휘말려 말도 안 되는 모함을 당하고 있습니다.”
정오는 고개를 돌려 은비 쪽을 바라보았다. 선글라스를 벗은 은비의 눈빛에서는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거듭 주장하였듯이 피고인은 철왕파와 관련이 없으며, 김진구의 휴대폰이 왜 피고인의 집에서 발견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저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심신미약 상태에서 우연히 권배일과 만나 거친 말을 몇 마디 한 것이 전부입니다. 다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은 것에 대해서는 피고인도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며 죗값을 달게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권배일과의 접촉사고에 대해서는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피고인은 친구 정지헌을 찾아갔다가 뜻밖의 봉변을 당한 입장입니다. 또한 정지헌의 모친 장영미의 병실을 침입한 일에 대해서도 피고인이 심신미약 상태였던 점을 참작해주시기 바랍니다.”
변호사가 말을 마친 후에는 채은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은 일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제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저로 인해 크든 작든 고통을 받으신 분들이 피해를 당하시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니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진심 어린 사죄뿐입니다. 고의는 절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저로 인해 상처받으신 분들이 어서 회복되셨으면 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오는 채은엽의 가식에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지헌이 그런 정오의 손을 꼭 잡았다.
‘아, 우리 심쿵이 생각해서 흥분하지 말아야지.’
정오도 제 안의 아기를 떠올려 마음을 가라앉혔다.
은엽의 최후변론을 마지막으로 재판이 끝났다. 지헌과 함께 재판소를 떠나는 정오에게 은비가 달려왔다. 정오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지헌은 몇 걸음 옆으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정오와 같은 아기 엄마야 알아볼 수 있겠지만 다른 이들은 임신한 사실도 모를 만큼 은비는 마른 몸이었다. 그럼에도 은비는 습관인 듯 배를 소중하게 감싸고 있었다.
“우리가 오빠의 변호를 돕는 건 아니야.”
재판 후 다시 꼈던 선글라스를 벗은 은비가 정오에게 말했다. 자신을 채은엽과 똑같은 철면피로 보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운 모양이었다.
“엄마도 이제는 나를 위해 살기로 했어. 내 인생에는 오빠가 걸림돌이라…… 잘못을 깨우치지 못한 오빠는 필요 없거든.”
은비의 덤덤한 목소리는 정오의 작은 동정도 바라지 않는다는 투였다.
“내 기분 모를 거야. 너는 좋은 가족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덤덤하면서도 침울하게 느껴지는 은비의 눈빛에 정오는 왠지 측은하여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어쨌든 엄마는 오빠가 사형선고만 받지 않으면 된다는 입장인 것 같아. 나도 비슷해.”
“…….”
“오빠가 선고받는 거까지는 못 보고 미국으로 떠날 것 같아. 준비는 이미 다 됐거든. 엄마가 마지막으로 오빠 얼굴 한 번만 보고 가자고 해서 왔어.”
“…….”
“미안했어.”
별로 궁금하지 않은 정보가 유유히 흘러간 후에 돌연 사과의 말이 이어졌다. 많은 말들 속에 암호로 숨겨놓은 듯한 사과였다. 높낮이도 없는 말투였는데 감정 하나가 투명하게 보였다.
부끄러움.
“그럼 갈게.”
정말로 부끄러워 못 견디겠는지, 은비는 그 건조한 사과를 끝으로 곧장 돌아섰다.
은비가 떠난 후 지헌은 다시 정오의 곁으로 돌아왔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정오는 몇 걸음 더 내디딘 후에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멍하니 눈을 뜨고 있던 정오가 입술 끝을 슬그머니 올렸다.
“오빠.”
“응.”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건 안 듣는 것보다 백 배는 좋은 것 같아.”
“…….”
“어찌어찌해서 미안하다, 뭐가 미안하다, 딱히 그런 말도 없었는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으로 엄청 후련하네.”
정오의 감상에 지헌은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만족했어?”
“응. 엄청.”
채은비, 우리 정오가 이렇게 쉬운 사람이다.
너의 별 사과 같지도 않은 말을 얘는 이렇게 예쁘게 넘긴다.
지헌은 채은비가 오빠 운은 없지만 다른 운은 상당히 좋다는 걸 부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꼭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같은 날. 영미는 한 카페에 앉아 배일을 기다렸다.
지헌에게 배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 배일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전해 들은 영미는 배일을 찾아가겠노라 말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지헌이 알려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배일이 받았다. 영미는 배일에게 집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반드시 만나러 와 달라고 강요하지는 못했다. 그저 기다리다가 카페 문을 닫으면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배일은 늦지 않게 영미를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배일은 다소 딱딱하게 인사했다. 그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을 수십 년 원망하며 살았다. 그녀가 원망스러워 친구였던 지헌까지도 미워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행복한 일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불우한 성장기를 보내며, 키가 크는 만큼 미움을 키웠다. 미워할 사람이 필요해서 장영미와 정지헌을 마구 미워했었다.
이유는 하나가 아니었을 텐데, 많은 선택이 만든 결과였을 텐데, 정지헌과 장영미만이 이유라고 생각하며 마음껏 미워했다.
초보의 바둑판 위와 같은 인생을 살았다.
수세에 몰리자 희망을 먼저 놓아버렸다. 모두 바둑돌을 쥔 선수의 의지로 놓인 돌. 모든 돌이 저마다 역할을 하며 인과관계를 만들었을 텐데, 몰아붙인 상대만을 탓했다.
쓰임이 좋았던 다른 돌들마저 자충수로, 패착으로 만들어버렸다. 판을 되살리려 노력하지 않고,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
“이제야 찾아와서 미안해요.”
영미가 공손히 말했다.
그동안 상처를 주어서,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잊고 살아서 미안하다고 마음에서 우러난 사과를 했다. 몇 번이나.
배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또한 잘못이 많았으므로 사과를 받는 것이 무안하기도 했다.
“내 도움이 필요한 건 뭐든 말해요. 일손이든 돈이든.”
“괜찮습니다.”
배일이 내놓은 대답은 그게 다였다. 살가운 말은 하지 못했다.
“그럼 이만 가도 될까요?”
배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서며 실금 같은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장영미 여사는 아들의 부탁을 받고 사과를 하러 왔을 것이다. 그 마음이, 그 사랑이 부러웠다. 자신은 이제 절대로 갖지 못할 마음이었다. 자신에게는 그런 엄마가 없으니.
그러니 지헌아. 나 조금만 심술을 부릴게.
용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쨌든 사과를 받았으니 이제 배일 혼자 이겨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부디 이 시간을, 당신도 이해해주기를.
*
어느덧 머리 위를 물들였던 나뭇잎이 발밑으로 쌓이는 계절이 되었다.
그리고 채은엽의 선고기일.
지헌의 가족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 예나가 다시 바둑대회를 나가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정오와 지헌 둘 다 예나와 함께하기로 했으나 대회 바로 전날 정오가 지헌을 설득했다. 결국 지헌은 가족 대표로 선고 공판에 참석하게 되었다.
“예나야, 아빠는 못 가서 아쉽다. 그치.”
대회장으로 가는 길. 본인이 못 가게 하고서, 정오는 마치 지헌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것처럼 얘기했다.
“응.”
“아빠도 갈 거야.”
슬쩍 골이 난 지헌은 얼른 선고 공판을 지켜보고 합류할 생각으로 고집스럽게 말했다.
“예나야. 아빠한테 나 대회 잘 다녀올게요, 해.”
“아빠, 예나 1등하고 올게! 아빠는 얼른 일하러 가!”
“아빠도 간다니까?”
정오와 예나, 두 사람만 정다워 보여서 괜한 질투심이 생겼다. 두 사람을 대회장에 내려주고 법원으로 향한 지헌은 선고 공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마음이 급해졌다.
채은엽 이 자식은 뭐 그렇게 죄를 많이 지어서.
5분 만에 뚝딱 끝나면 참 좋겠건만, 사건을 아는 변호사들은 판사가 판결문을 읽는 데만도 족히 한 시간은 걸릴 거라고 입을 모았다. 현장을 생생히 경험하고 와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아내의 분부만 없었다면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다.
“지헌아.”
그런데 뜻밖에도 이 외로운 길에 동지가 생겼다. 배일이 나타난 것이다.
“배일아.”
오랜만에 만난 배일은 꽤 표정이 좋아 보였다. 수년간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마음이 많이 편해진 것 같았다.
“혼자 왔어?”
“응. 정오는 예나랑 바둑대회 갔어.”
“아아.”
“나도 후딱 보고 우리 딸한테 가고 싶다.”
“내가 대신 봐줄게. 너는 얼른 가.”
“아니야. 채은엽이 선고를 받는 순간은 내 눈으로 봐야지.”
배일이 꽤나 진지한 지헌의 대답에 픽 웃었다. 그리고 머뭇거리다가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나 얼마 전에 너희 어머니 만났어.”
“아. 그래?”
지헌은 영미에게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한 척하고서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배일은 살며시 웃었지만 네가 어머니께 부탁을 한 게 아니냐며 캐묻지는 않았다. 지헌은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이윽고 채은엽과 판사가 법정에 들어왔다.
“지금부터 채은엽 피고인에 대한 선고 공판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판사가 알렸다. 지헌은 시각을 확인했다.
솜방망이 처벌은 안 된다. 제대로 된 판결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한 시간짜리 판결문은 아니었으면. 판사가 속사포로 판결문을 낭독해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또다시 올림픽 핸드볼 경기장.
익숙한 장소에 도착한 예나가 어깨를 움츠렸다. 이곳에서의 기억이 그다지 좋지는 않기에, 정오는 예나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오래전 바둑학원 앞에서 예나를 유인했던 여자, 표지애는 알고 보니 배일의 지인이었다.
배일을 마음에 두고 있던 여자가 배일을 도운 것이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리고 분한 마음도 들지만 정오의 가족은 모두 묻어두기로 했다.
‘어느새 나는 용서의 아이콘이 되었어…….’
지난날을 돌이켜본 정오가 헛웃음을 지었다.
잠시 상념에 빠진 사이에 예나가 말했다.
“엄마, 이제 예나 들어오래.”
“응. 그래! 잘하고 와! 엄마는 여기서 지켜보고 있을게.”
“응!”
아이는 씩씩하게 손을 흔들고는 떠났다.
한국의 바둑 꿈나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번 대회도 이전의 대회와 비슷한 토너먼트 방식이었고 저학년부와 고학년부를 나누어 진행되었다. 일곱 살 예나는 저학년부로 편입되었다.
“정예나 학생.”
“네.”
감독관의 호명에 예나가 대답했다. 감독관이 명찰의 이름과 예나의 얼굴을 확인했다.
B조 정예나. 불과 몇 개월 전의 바둑대회 때는 그토록 어색했던 이름이 이제는 귀에도 눈에도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이름이 익숙해진 만큼 자리도 편했다. 아빠한테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정말로 1등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대회 또 나왔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예나는 고개를 돌렸다.
홍수인의 오빠 홍재인이었다. 재인은 예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또 망신당하려고 나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