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 하찮은 이에게 베푸는 친절 (165/183)


165. 하찮은 이에게 베푸는 친절
2022.11.26.


야무지게 입술 끝에 힘을 주고 있던 예나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예나는 ‘망신이 뭐야?’ 하고 물어보려다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언뜻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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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랑은 세 번째에서 만날 거야.”

번호와 순서를 따져본 예나가 홍재인에게 말했다. 두 번의 대국을 이긴다면 세 번째에서는 재인을 만나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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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까지 올 수는 있겠냐?”

재인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재인은 오늘 우승을 목표로 이 자리에 왔다. 저학년으로서 마지막으로 참가하는 대회였다. 이제 해가 바뀌면 고학년부가 되어 6학년까지의 형, 누나들과 겨루어야 한다.

저학년 마지막 대회에서 으스댈 만한 성과를 만들지 않으면 고학년들이 자신을 깔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새 학원 선생님은 재인이 순위권에 들 거라고 장담했다. 지난 8월의 바둑대회에서 우승을 한 아이가 꽤 잘하긴 하지만 특별과외를 받아 그 아이의 대국을 분석하여 약점을 파악했으니 이제 재인은 천하무적이었다.

금메달은 재인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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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곱 살짜리까지 대회에 나올 수 있는지 모르겠어. 떼쓰고 울기나 하는데.”

재인은 앞자리의 친구와 키득거렸다.

별로 웃기지 않은 얘기를 하고서 웃는 재인을 보며 예나는 갸웃거렸다.

왜 실력을 제대로 알기도 전에 비웃을까?

하지만 재인의 태도를 딱히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았다. 그저 나는 저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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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서부지방법원.

엄숙한 가운데 판사는 차근차근 채은엽의 범죄사실을 언급하며 서두를 열었다. 보통의 절차였지만 은엽은 듣기 거북한 듯 몇 번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 빨리 판결이 나 짐을 벗어던지고 싶은 듯했다.

20여 분이 흘러 따분해진 채은엽이 하품이 나오는 듯 코를 벌름거린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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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은 60여 건에 달하는 반성문을 제출하였으나 범죄사실 은폐 및 축소와 더불어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재판에 임하였고 검사가 구형한 후에는 형량에 대한 불안함으로 담당 재판연구원들과 판사들을 매수하려는 시도로 사법부의 가치를 훼손시키려 하였습니다.”

판사가 새로운 사실을 언급하였다.

채은엽은 눈살을 찌푸렸고 방청석은 소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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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까지 매수하려고 했구나.”

지헌이 조용히 중얼거리자 그 옆의 배일이 기가 막힌 듯 옅게 한숨을 지었다.

어떤 의미로는 참으로 대단한 자였다. 본인의 존엄과 자유를 위하여 이토록 고군분투하는 자는 드물 터였다. 세상 사람들이 본인처럼 교활하고 사악하다고 철석같이 믿는 자도 드물 것이다.

판사 매수 사건을 시작으로 판결문은 점점 흥미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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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와 증언이 추가될 때마다 진술을 번복하는 점, 심신미약을 주장하며 변명으로 일관하는 점, 진지하게 반성하지 않는 점 등 여전히 피고인이 범죄사실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바, 재판부에서는 피고인에게 이 모든 혐의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와중에 지헌은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얼른 예나와 정오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과 채은엽의 최후를 똑똑히 지켜보아야 한다는 의무감 사이에서 시름이 깊어졌다.

이미 저지른 범죄가 차고 넘치게 많은데 거기 하나를 더 보태었으니 판결문은 더 길어질 것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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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증거와 증언은 일관적이며 확인 가능한 사실이었고, 피고인의 음해 주장에 대한 그 어떤 논리도 납득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피고인의 김진구 살인교사혐의, 정지헌 살인미수혐의, 장영미 살인미수혐의와 더불어 뇌물 공여, 수수 혐의 및 공무집행 방해 혐의 모두 유죄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래도 끝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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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선고합니다, 검사의 구형과 같이 피고인 채은엽을 무기징역에 처합니다.”

판사의 주문에 지헌은 속이 시원하여 박수를 칠 뻔했다.

채은엽은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커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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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재판장님!”

그 옆에서 경찰이 붙잡지 않았다면 채은엽은 퇴장하는 판사에게 뛰어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경찰에게 결박당한 후에도 크게 몸부림쳤다. 결과를 인정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재판부에서 검찰의 구형에 따르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기껏해야 징역 몇 년일 것이고 모범수로 감형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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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내가 왜! 이거 인정 못 해!”

네가 인정 못 하면 어쩔 거야. 이미 판결이 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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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놔! 야! 정지헌! 이 지독한 새X! 다 네가 한 짓이지!”

지헌과 눈이 마주친 은엽은 괜히 지헌에게도 윽박질렀다.

지헌은 그런 은엽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내겐 네 판결에 힘을 쓸 만큼의 지독한 열정이 없다. 내 인생에서 네가 차지하는 자리는 아주 하찮거든.

지헌은 은엽이 질질 끌려나가며 발악하는 모습을 잠깐 지켜보다가 바로 법정을 나섰다.

드디어 끝났다!

여유 부릴 새는 없었다. 어서 예나에게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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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나는 두 번의 대국을 가뿐히 이기고 세 번째 시합을 맞았다.

세 번째 대국의 상대는 홍재인. 재인도 두 번의 시합을 가볍게 이기고 세 번째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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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여기까지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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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재인은 비아냥댄 것인데 예나는 기분 좋은 듯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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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좋긴 하겠네.”

이번에도 한껏 빈정거렸지만 예나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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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시합도 쉽겠네!’

재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승에 다가가기까지 걸림돌 없이 편하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미리 기운을 빼고 싶지 않았다. 그냥 8월 바둑대회 우승자의 대국을 생각하며 눈앞의 아이를 가지고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인은 움찔했다. 무언가 지난번과는 양상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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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는 엄청 못 하지 않았나?’

재인은 예나의 초반 기세에 당황하여 엉뚱한 곳에다가 돌을 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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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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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예나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어찌 된 일인지 판세는 더더욱 기울어갔다. 예나는 매번 재인이 수를 두자마자 곧장 제 돌을 올렸다. 마치 생각 없이 바둑을 두는 것처럼 반응이 재빨랐다.

하지만 진짜 생각 없이 두는 건 아니었다. 모든 수가 그럴 만한 자리에 놓였다.

왠지 재인은 맥을 추지 못했다. 예나를 쫓아가려니 호흡이 힘들 지경이었다. 압박당하는 기분이었다. 이마에 송송 땀방울이 맺혔다.

이대로 질 수는 없었다. 재인은 결승전에서 써먹으려 했던 필살기를 꺼내야 했다.

예나에게 속닥이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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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왜 정예나가 됐어?”

약점을 잡아 심리를 압박하는 것. 어린아이들을 상대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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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없었다가 생긴 거야, 아니면 아빠가 바뀐 거야?”

굴욕의 7월. 이 아이 때문에 쫓겨나듯 학원을 그만두고 다른 학원을 알아보게 되었을 때, 재인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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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아빠가 그렇게 곱상하게 생긴 걸 보면 분명히 보통 사람이 아니야. 어디 술집에서 일하다가 애 엄마랑 눈 맞은 거겠지.”

 
엄마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 재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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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네 아빠 술집에서 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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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우리 아빠 광고회사 이사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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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회사? 술집 광고회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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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그룹 맥스기획인데?”

세련그룹? 광고회사 이름은 잘 모르지만 세련그룹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재인이 먹는 과자 대부분이 세련식품의 스낵 브랜드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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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오빠 그러다가 시간 다 쓰겠어. 수인이도 바둑 말고 딴 얘기하다가 나한테 졌는데.”

재인의 눈동자가 굴러가는 동안 예나가 지적했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잘도 흐르고 있었다.

이번 바둑대회는 선수들에게 시합 당 각 10분의 제한시간이 주어진다. 어디에 다음 수를 둘 것인가를 주어진 10분 안에 생각하여 돌을 두어야 하며, 이 제한시간을 다 쓴 선수는 무조건 30초 안에 돌을 두어야 한다.

이것을 초읽기라고 하는데 초읽기 30초를 넘길 수 있는 기회를 세 번 소진하면 선수는 패배하게 된다.

엉뚱한 궁리만 하다가 정작 제 차례에 바둑돌을 둘 곳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어느덧 제한시간이 2분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재인은 허겁지겁 돌을 내려놓았다.

헉.

하지만 급하게 놓은 돌은 또다시 오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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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실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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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재인이 흥분하여 바락 소리치자 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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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해도 돼.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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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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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멋진 실수로 만들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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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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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하고 다음에 잘하면 돼.”

……얘는 인생 2회차쯤 되나? 무슨 애가 이렇게 할아버지 같아?

재인은 예나의 조언과 포용력을 고맙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소리를 버럭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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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뭘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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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싸우면 안 돼요.”

가까이에 서 있던 감독관이 주의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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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가 자꾸 잘난 척해요!”

재인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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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안 그랬어요.”

예나도 야무지게 항변했다.

결국 주변을 지키던 감독관이 그 옆에 눌러 앉아 있게 되었다. 재인에게 불리해졌다. 감독관이 지키고 있으니 예나의 약점을 건드려 도발할 수도 없고 속임수를 쓸 수도 없게 되었다.

예나는 처음과 똑같이, 느려지지도 빨라지지도 않는 속도로 차분하고 힘 있게 재인을 압박했다. 재인은 점점 숨이 버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도 아팠다.

결국, 다음 돌을 둘 자리도 정하지 못한 채, 주어진 시간 10분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이제 30초의 초읽기. 첫 번째.

눈물이 핑 돌았다.

재인은 아무 데나 돌을 두었다.

예나는 재인이 왜 그곳에 돌을 두었는지 통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페이스대로 시합을 이어갔다.

그리고 다시 재인의 차례. 재인은 눈물을 삼켰다. 이번엔 머리에 마비가 오는 것 같았다.

차라리 이 경기장 전체에 불이 나서 대회가 취소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재인이 망설이는 사이에 두 번째 30초 초읽기가 카운트되고, 어느덧 마지막 초읽기에 이르렀다. 초시계를 부숴버리고 싶었다.

오늘을 위해서 열심히 연습했는데. 오늘 꼭 우승해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하는데!

그러나 재인은 결국 다음 수를 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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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 오빠 울어요!”

재인은 분하고 억울하여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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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인 학생. 시간패.”

감독관은 이런 아이를 더러 보았단 듯이 냉정한 표정으로 재인에게 휴지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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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울지 마. 나는 그냥 오늘 이긴 거고, 오빠도 그냥 오늘 진 거야. 더 공부해서 다음에 잘하면 돼.”

예나가 제법 의젓하게 위로했다. 하찮은 이에게 베푸는 친절이었다.

재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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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나 학생은 저쪽으로 가야 해요.”

그사이에 감독관은 예나와 재인의 대국을 정리하고 예나에게 다음 대국 자리를 가리켰다. 예나는 감독관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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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었어. 다음에 또 만나!”

아니, 아마 만나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홍재인에게 한계이며 장벽이었고, 정예나에게는 시작이었다. 예나는 이제 겨우 세 번째 시합을 끝냈을 뿐이다.

정예나의 인생에서 홍재인은 그 어떤 의미도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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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예나의 낭랑한 목소리가 경기장 한편을 휘돌다 사뿐히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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