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내 딸이야! 내 딸이에요!
(166/183)
166. 내 딸이야! 내 딸이에요!
(166/183)
166. 내 딸이야! 내 딸이에요!
2022.11.30.
경기장 관객석 외부 통로.
재인은 징징 울기만 했다.
아들이 우승을 거머쥘 줄 알았건만, 뜻밖의 패배.
새 바둑학원 저학년부에서 가장 실력이 좋았던 재인이 세 번째 시합에서 패배하여 재인의 엄마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충격보다 더 큰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학원의 학부모들에게 많이 으스댔는데. 이따금 자신의 아들 자랑이 꼴 보기 싫은 듯 빈정거리던 애엄마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려고 했는데.
이토록 창피할 수가 없었다.
“가자.”
재인의 엄마는 울고 있는 재인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재인은 발밑에 껌이 눌어붙은 듯이 움직이질 못했다.
“빨리 가자고! 여기서 울어서 뭐 할 거야!”
엉엉엉.
“너, 여기서 계속 엄마 망신 줄 거야? 어디 집에 가서 봐.”
싸늘해진 목소리로 독하게 말하니 그제야 재인은 훌쩍이며 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계속 앙탈을 부렸다.
“정예나 때문이야! 걔만 아니었어도 내가 1등 했다고!”
“일곱 살짜리한테도 못 이기면서 무슨 1등이야!”
당연히 재인의 엄마는 그런 불평을 들어주지 않았다.
“빨리 가! 창피한 줄이나 알아!”
올림픽 핸드볼 경기장에 막 들어선 지헌은 엉뚱한 데에서 들려온 ‘정예나’라는 이름에 바삐 옮기던 걸음을 멈추었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 울먹거리는 홍재인과 왠지 성이 난 홍재인의 엄마가 작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예나와 홍재인이 또 맞붙은 모양이었다. 홍재인은 자만하고 있다가 예나의 진짜 실력에 보기 좋게 당했을 것이고.
지헌은 미소를 머금고 재인에게 다가갔다.
“너도 왔구나?”
훌쩍거리다가 지헌의 얼굴을 알아본 재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지헌이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예나한테 네가 진 거야?”
상냥하게 아이 골리기.
“속상하겠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알았지?”
인성 공부도 좀 하고.
마찬가지로 지헌을 알아본 재인의 엄마가 재인과 지헌의 사이를 몸으로 막아 아이를 등 뒤로 감추었다. 지헌을 알아보고서 긴장한 것 같았다.
“얼른 가자!”
재인의 엄마는 아들의 손을 다시 잡아끌었다. 하지만 재인은 너무 분해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재인이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지헌에게 물었다.
“아저씨 술집에서 일하죠?”
“……뭐?”
재인의 엉뚱하고 당돌한 질문에 지헌의 한쪽 눈썹이 들려 올라갔다.
“아저씨 술집에서 일한다고 우리 엄마가…….”
“그만하라고!”
짜악!
결국 재인의 엄마는 아들에게 손찌검을 하고 말았다. 어찌나 세게 후려갈겼는지 아이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지난 7월, 아이들의 바둑학원을 옮기며, 재인의 엄마는 재인이 보는 앞에서 헛소리를 했다. 예나의 아빠가 곱상하게 생긴 걸 보니 술집에서 일하는 모양이라고. 아이는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가 지헌에게 따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 재인의 엄마는 진실을 알게 됐다. 정예나의 아빠 정지헌은 술집에서 일하는 남자가 아니라 대기업 회장의 차남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까지는 재인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할 기회가 없었다. 결국 진실이 업데이트되지 않아 재인은 막말을 하려다가, 흥분한 제 엄마에게 뺨을 맞은 것이다.
경기장 복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바둑 시합을 끝내고 밖을 나서는 아이와 학부모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게 되었다. 두어 명은 이 일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경찰서죠? 아동학대 신고 좀 하려고 하는데요.”
“아니 무슨 상관이에요! 내 아들 내가 훈육한다는데!”
재인의 엄마가 신고자에게로 다가가 휴대폰을 빼앗으려 하자 신고자가 냉정하게 따졌다.
“친엄마는 맞아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그랬어요. 어떻게 애한테 손을 대요!”
“듣자 하니 시합에서 졌다고 애를 잡는 것 같던데.”
“내가 언제요!”
몇몇이 몰아붙이자 재인의 엄마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때 경기장 건물 밖에서 순찰하고 있던 경찰이 신고를 받고 안으로 들어왔다.
“신고한 분 계십니까?”
“여기예요! 이 여자가 애를 때렸어요!”
“여기 이쪽에 카메라 있으니까 저 여자가 애기 폭행한 것도 녹화됐겠네!”
으아아앙! 그 와중에 재인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이 더 몰려들었다.
지헌은 가만히 소동을 지켜보다가 서서히 이들과 멀어져 관객석 출입구로 달렸다.
다행히 관객석의 정오를 찾긴 쉬웠다.
“오빠!”
코가 새빨개져서 눈물을 머금고 있던 정오가 지헌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헌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 울어, 왜!”
“우리 예나가 너무 잘해!”
“철렁했잖아!”
“아니, 우리 예나가 엄청 잘한다고. 이제 8강이야! 이게 울 일이 아니야?”
“예나가 잘하는 건 당연한 거야. 날 닮았잖아.”
감격에 겨워 말했건만, 남편이 당연한 듯 대꾸하자 정오의 감동은 짜게 식었다.
흥.
정오는 흠뻑 젖은 눈가를 쓱쓱 닦고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지헌은 경기장 밖에서 벌어졌던 일을 정오에게 이야기해줄까 하다가 꾹 참았다.
뾰로통하게 앉아있던 정오가 지헌 쪽으로 눈을 흘깃거리다가 뚱하니 물었다.
“채은엽은 어떻게 됐어?”
“무기징역.”
“오!”
다행스런 소식에 금방 마음이 풀렸다. 정오가 이런 반응일 거라고 예상했던 지헌은 몰래 미소 지었다. 아내를 놀리는 것이 재미있었다.
*
8강, 4강, 그리고 어느덧 결승전.
여섯 번의 대국에서 거뜬히 상대를 제압한 예나는 드디어 마지막 경기를 앞두게 되었다.
경기장이 시끌벅적했다. 일곱 살 아이가 결승까지 올라온 것에 대해 다들 놀란 기색이었다.
바둑학원, 또래의 학생들 앞에서 대국을 한 경험은 꽤 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게 주목하고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예나도 단단히 긴장하게 되었다.
고개를 드니 관객석의 엄마, 아빠가 보였다. 엄마, 아빠도 예나와 눈이 마주친 것을 알아보았는지 팔을 크게 흔들며 인사했다. 점잖은 아빠가 저렇게 어수선해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이윽고 상대도 대국을 끝내고 왔다.
상대는 지난 8월 대회의 우승자였다. 2학년의 언니.
“안녕, 예나야. 나는 강새봄이야.”
예나의 명찰을 확인한 상대가 먼저 인사했다. 예나가 입을 열었다.
“나 언니 대국 본 적 있어.”
“정말? 언제?”
“8월 6일에. 대회에서.”
예나는 지난 대회에서 기권을 하고 잠시 경찰서에 갔다가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와 결승전을 지켜보았다. 그때의 대국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너도 있었어?”
“응.”
“근데 왜 상 못 탔어?”
“그때는 졌어.”
“그럼 그사이에 실력이 좋아졌나 보다!”
새봄이 진지한 표정으로 예나의 말을 받아주었다. 새봄과 대화를 나누니 왠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대국이 시작되었다.
예나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결승 대국은 그 이전의 대국과 확실히 달랐다. 선생님과 시합을 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예나는 그 안에서도 계속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새봄이 의외의 자리에 수를 놓으면 너무 궁금해서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여기에 왜 놨어?”
“이거 말해주면 안 되는데. 여기 이쪽 수비하려고.”
말해주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새봄은 예나의 순수한 질문에 친절하게 응답해주었다.
잠시 후 주고받기를 하듯이 새봄도 물었다.
“너는 왜 여기 뒀어?”
“언니가 여기에 둘 거 같아서.”
새봄도 바둑이 즐거웠다. 이런 인재를 왜 이제야 만났을까 의아해졌다.
“너 몇 살 때부터 바둑 했어?”
“일곱 살.”
“그럼 1년도 안 된 거야?”
“응. 언니는?”
“나는 2년 됐어.”
두 사람의 목소리가 간간이 높아지니 감독관이 눈치를 주었다. 새봄이 조용히 예나에게 말했다.
“선생님이 말하지 말라고 그랬으니까 우리 말하지 말자.”
“응.”
두 사람은 대국에 집중했다. 수세에 몰리면 새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예나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내내 꼼지락거렸다.
두 사람의 제한시간이 사이좋게 줄어들다가 새봄이 먼저 초읽기를 쓰게 되었다.
중요한 대국이라 옆에 앉은 계시원이 초를 카운트해주었다.
“마지막 10초, 하나, 둘, 셋, 넷…….”
새봄은 시간에 쫓기며 수를 두었다. 실수였다. 실수가 아까운 듯 느리게 탄성을 터트렸다.
예나가 재빨리 공격하자 새봄은 다시 앞길이 막혔다.
이윽고 마지막 초읽기.
계시원이 다시 카운트했다.
“마지막 10초, 하나, 둘…….”
“졌어요.”
새봄은 결과에 승복하며 쥐고 있던 돌을 내려 놓았다. 두 눈에는 눈물이 조그마하게 맺혀 있었다.
“우와! 너 진짜 잘한다!”
하지만 새봄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예나를 추켜주었다.
감독관이 발표했다.
“저학년부 우승은 정예나 학생. 준우승은 강새봄 학생입니다.”
새봄이 예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멀뚱하니 앉아 있던 예나의 입가에도 활짝 미소가 피어올랐다. 예나는 새봄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꿈이 뭐야?”
“경찰! 언니는?”
“나는 바둑기사 되고 싶어.”
“…….”
“남자 바둑기사들을 이기는 여자 바둑기사가 별로 없거든. 그래서 나는 해보고 싶어.”
제 꿈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언니의 목소리가 멋지게 들렸다. 예나도 덩달아 마음이 들떴다.
“근데 너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친구랑 얘기해볼게.”
“왜?”
“친구랑 경찰 돼서 만나기로 했거든.”
“와! 멋있다!”
이윽고, 경기장 문이 열리고 관객들이 들어왔다. 새봄의 엄마가 제일 먼저 들어왔다. 정오와 지헌은 우왕좌왕할 때였다.
“엄마, 나 2등 했어!”
새봄이 혀가 짧아진 목소리로 엄마에게 외쳤다. 예나에게 의젓한 언니였던 새봄은 엄마 앞에서는 남들과 똑같은 어리광쟁이 딸이었다.
“축하해! 우리 공주님!”
새봄의 엄마가 새봄을 끌어안아주며 말했다. 새봄이 엄마에게 예나를 소개했다.
“나도 잘 뒀는데 얘가 더 잘 뒀어. 근데 얘는 일곱 살이래.”
“정말? 아유! 축하한다! 바둑을 엄청 잘 두는구나!”
새봄의 엄마가 예나의 손을 잡았다. 예나는 따뜻한 온기가 기분 좋았다.
“나 너한테 전화해도 돼?”
새봄이 예나에게 물었다.
“응!”
“전화번호 알려줘.”
예나에게 바둑친구가 생겼다.
정오와 지헌도 급하게 경기장으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지는 못했다. 지헌은 임신한 아내를 안전하게 보호하며 빠른 걸음으로 경기장에 들어갔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예나가 보였다.
정오는 흥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내 딸이야! 내 딸이에요!
세상 사람들! 내 딸을 좀 보세요!
내 딸이 저렇게 대단한 아이예요!
경기장이 쩌렁쩌렁하게 외치고 싶었다.
“예나야!”
“엄마아!”
예나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달려온 아이를 번쩍 들어 안아주는 건 아빠의 몫이었다.
“예나 축하해.”
“아빠, 내가 1등할 거라고 그랬지? 나 대단하지?”
“그래. 정말 대단하다. 우리 딸.”
세 사람의 감격스런 재회에 기자 한 명이 끼어들었다.
“실례합니다. 잠깐 우승자 인터뷰 좀 해도 될까요?”
지헌은 기자가 들고 있는 카메라를 보고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사진은 안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기자가 지헌의 눈빛을 살벌하게 여기어 꾸벅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예나 어린이, 오늘 저학년부로 출전해서 우승을 했네요. 축하합니다. 바둑은 몇 살 때부터 배웠나요?”
“일곱 살이요.”
“대단하네요. 정예나 어린이는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요?”
“경찰이요! 근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죠?”
곁에서 예나의 인터뷰를 지켜 듣고 있던 정오와 지헌은 동시에 침을 삼켰다.
엄마라고 하면 어쩌지? 아빠라고 하면 어쩌지? 그럼 나도 인터뷰를 하게 될 텐데. 아이를 어떻게 이렇게 똘똘하게 키웠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그냥 유전자가 훌륭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엄마 아빠의 걱정을 알지 못하는 예나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이세돌 아저씨요!”
정오와 지헌은 아이의 해맑은 대답에 동시에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