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완벽하지 않은 날
(168/183)
168. 완벽하지 않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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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완벽하지 않은 날
2022.12.07.
12월. 날이 춥지는 않아 마음을 푹 놓고 있었건만, 오늘은 웬일로 꼭두새벽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눈이었다.
창밖을 바라본 정오의 얼굴에 시름이 생겨났다.
이 계절의 첫눈이었지만 정오는 마냥 반길 수가 없었다. 눈이 오면 길도 미끄러울 테고, 차도 밀릴 테고, 사람들의 불평도 생길 텐데.
정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망했구나, 망했어…….”
“엄마, 우리 망했어?”
어느새 잠에서 깬 예나가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예나 또한 선잠을 자고 일어난 것이다. 흠칫 놀란 정오가 버벅거렸다.
“어, 그게…….”
“눈이 와서?”
“응.”
“나는 눈이 와서 좋은데!”
예나가 들뜬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래. 내 딸이 좋다면 좋은 거겠지.
어느새 정오 또한 국순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
눈발이 날리는 것이 심상치 않아 일찍 집을 나선 성미란 팀장은 예식장에 꽤 일찍 도착했다.
언제나 예뻤지만 오늘은 더욱 예뻐서 하늘로 승천할 것만 같은 정오와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기훈과 만났다. 기훈도 일찍 온 것이다.
“팀장님. 일찍 오셨네요?”
“응. 호텔 결혼식은 일찍 와서 자리를 맡아야 해.”
미란의 지론에 기훈이 말없이 끄덕였다. 평소 같았으면 하하, 하고 웃었을 기훈이 묵묵히 끄덕이는 모습에 미란은 마음이 쓰였다.
“기훈 씨, 울지 마.”
“네? 제가 왜 울어요?”
“그냥. 울지 마.”
“아, 팀장님 놀리지 마세요.”
기훈이 얼굴이 슬쩍 붉어져서는 손을 휘휘 저었다. 그 사이에 은주도 예식장에 도착하여 뛰어왔다.
은주 또한 기훈을 보자마자 한마디 했다.
“기훈 씨 괜찮아? 안 와도 될 텐데.”
“제가 왜 안 와요, 당연히 와야죠.”
“자. 기훈 씨를 위해 준비했어. 손수건.”
“아아. 대리님.”
“깨끗하게 빨아서 돌려줘.”
기훈은 쓰게 한숨을 쉬며 손수건을 받았다. 계속 거부하고 강하게 부정하면 이 사람들은 더 놀릴 것이 뻔했다.
“고 대리님이야말로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오셨네요.”
“내가 왜?”
“이사님 안 좋아하시잖아요.”
“안 좋아하지만 어쩔 수 없지.”
“…….”
“자본주의 사회는 어쩔 수가 없어.”
은주가 기운 없이 풀어놓은 푸념에 씩 웃어 보인 기훈의 표정이 굳었다. 기훈이 얼어버린 것도 모르고서, 은주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벌 결혼식치고는 사람이 적다. 역시 이사님은 친구가 없나 봐.”
“맞아요.”
헉.
뒤에서 들려오는 어둠의 목소리에 은주가 흠칫 고개를 돌렸다. 지헌이 서 있었다. 지헌을 좋아하지 않는 은주의 눈에도 오늘의 지헌은 꽤 멋져 보였다. 이만하면 이정오 대리랑도 좀 어울리겠네, 생각이 들 정도로.
“저 친구 별로 없습니다.”
“…….”
“그러니까 친한 척 사진 많이 찍어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지헌이 건네는 농담에는 영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은주가 자본주의의 미소를 지으며 지헌에게서 빠져나가려 했으나 지헌이 다시 말을 걸었다.
“정오 보셨어요?”
“지금 신부 대기실에 계시잖아요. 못 보셨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
“정오가 예쁘니까 못 보셨으면 가서 얼른 보시라고.”
……이 기쁜 날 욕을 할 수도 없고!
은주는 꽥 소리를 질러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마 탈출구를 금방 발견했다.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았던 예나 공주님을 알아본 것이다.
“네가 예나 공주구나!”
“네. 누구세요?”
하얀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티아라를 쓴 예나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니 정말로 공주님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눈앞에서 보는 느낌이었다.
은주의 목소리가 은쟁반 옥구슬 저리 가라 할 만큼 곱게 높아졌다. 지헌 때문에 슬쩍 굳어 있던 기훈이 코를 벌름거렸다.
“엄마 회사 동료야. 이름은 고은주.”
“아! 공주 대리!”
예나가 반가운 반응을 보이자 은주도 더욱 신이 났다.
“그래 맞아! 언니도 공주야. 반가워 예나 공주!”
공주와 공주. 세기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기훈은 세상 다정한 언니가 된 은주의 모습에 적응할 수가 없어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예식 시간이 바짝 다가왔다.
준비 종소리가 울리고, 지헌은 신부 대기실로 들어갔다.
정오는 임신 4개월 차에도 웨딩드레스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물론 드레스를 잘 선택해서 그렇겠지만, 임신을 하고 하도 잘 먹어서 살이 쪘다는 투정과는 달리 정오는 군살도 거의 없는 여신의 자태였다.
신랑이 제 결혼식이라는 것도 잊고서 넋을 잃고 쳐다볼 만큼.
지헌은 곧 예식이 시작된다는 걸 인지하고서도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7년 전에 떠올려보았던 그 풍경이었다. 임신한 여자친구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히게 되어 미안했던 마음까지 그때와 같았다.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는 느낌이었다. 오늘만은 7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준비됐어?”
“……후우우우.”
지헌의 다정한 목소리에 정오는 경직된 얼굴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심쿵이에게 무리가 없는 드레스. 예쁘고 안정적인 신발. 그리고 자신의 손을 잡고 웨딩로드를 함께 걸어갈 남편.
모든 것이 완벽한데 자꾸 몸이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애는 키워봤지만 결혼식은 처음이라.
아이 앞에서 내가 주인공이 된 행사는 처음이라.
그런 정오의 긴장감을 헤아린 지헌이 말했다.
“안고 갈까?”
풋.
얼어 있던 정오의 표정이 풀렸다. 하지만 지헌은 진심이었다. 정오가 한 걸음도 떼지 못하겠다면 정오를 안고 씩씩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별도 달도 다 따다 주고 싶은 신부한테 무엇을 못 하리.
그때 대기실 밖에서 예나가 손을 흔들었다.
“엄마 안녕! 나 먼저 갈게!”
오늘의 예식은 예나와 도빈의 입장으로 시작된다. 홀 입구에 먼저 자리를 잡은 화동을 보며 사람들이 저마다 탄성을 터트렸다.
정오도 기운을 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헌이 그런 정오의 손을 잡아 주었다. 정오와 지헌까지 입구에 도착한 후, 예식이 시작되었다.
환호와 박수와 웃음 속에서, 예쁘게 차려입은 예나와 도빈이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입장했다. 두 아이는 전날 연습한 대로 바구니 안의 꽃잎을 웨딩로드에 멋지게 뿌렸다. 그런데 다섯 걸음만에 도빈이 발을 멈추었다.
“어? 나 꽃잎 없어.”
통 큰 도빈이 세 주먹 만에 꽃잎바구니를 다 털어내버린 것이다. 전날 연습할 때는 바구니에 꽃잎은 없어서 시늉만 했었기에 꽃잎을 몇 번에 나누어 뿌려야 하는지를 가늠하지 못했다.
두 아이는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서서 바구니 속을 확인했다. 아이들이 심각하게 바구니를 들여다보는 것을 보며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단 두 사람의 얼굴만 창백하게 굳어버렸다. 승규와 진서였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진서가 아들에게 쫓아가려는 찰나에.
“내 거 나눠줄게. 아껴 써.”
예나가 당황하지 않고 도빈에게 꽃잎을 나누어주었다.
두 아이가 침착하게 문제를 해결하자 사람들이 저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박수를 쳤다. 승규와 진서도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정 같은 아이들의 입장이 무사히 끝나고, 이제 신랑 신부 입장.
홀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웨딩로드를 제외한 모든 불이 꺼지고 스포트라이트가 신랑 신부를 비추었다.
갑작스런 조명에 눈을 감았다 뜬 정오의 눈동자로 빛이 스며들었다. 자신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 잘 보였다. 저 길을 혼자서 가야 한다면 참 막막할 텐데 옆에서 손잡아주는 이가 있어 든든했다.
그리고 저 길의 끝에는 엄마, 예나, 그리고 어머님, 아버님.
자신이 걸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네 사람의 눈빛은 또 다른 등불 같았다.
걸어가는 길, 꽃잎이 뭉쳐진 곳이 있었다. 정오는 바로 직전에 홀 안에서 벌어진 일을 알지 못했기에 상상해볼 수 있었다.
어떤 아이가 바구니에 든 꽃잎을 폭 쏟아버리기라도 한 건가?
그 일로 사람들이 웃고 또 박수를 쳤던 건가?
그 장면을 상상해보며, 정오도 미소를 그릴 수 있었다.
완벽한 것이 좋겠지만, 완벽하지 않은 것들도 좋다.
우리의 기억에는 어떤 완벽한 전체보다, 일부의 완벽하지 않은 순간이 더 오래 남기도 한다.
희한하게도 완벽하지 않은 날들이 완벽한 행복을 만든다.
정오는 아이들이 만들어준 꽃길을 밟으며 생각했다. 이제 꽃비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다고.
*
결혼식은 무사히 끝났으나 눈은 그치지 않았다. 결혼식 때는 잠깐 멎었던 눈이 더 펑펑 쏟아졌다.
비행기는 결항되었고 신혼여행은 하루씩 밀리게 되었다.
비행기…… 1등석…… 기대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지헌은 더 잘된 일이라며 미소 지었다. 그 이유는 다음 날 알게 되었다.
“여보. 정오야.”
지헌이 새벽 다섯 시부터 정오를 깨웠다.
“아니…… 지금이 몇 신데…….”
정오는 눈꺼풀을 무겁게 들어 올리며 투정을 부렸다. 그때 참새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일어나! 눈 보러 가자!”
예나와 지헌은 벌써 일어나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정오도 마지못해 어기적어기적 일어났다.
“이 새벽에 눈을 보러 가겠다고?”
예나가 아빠를 귀찮게 했나 생각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예나보다 지헌이 더 들뜬 표정이었다. 생각해보니 지헌과 봄, 여름, 가을까지는 함께 보냈지만, 겨울은 정오 혼자였었다. 지헌과 함께 맞이하는 첫 겨울, 첫눈이었던 것이다.
결혼식을 치르느라 첫눈의 행복을 지나칠 뻔했구나.
옷을 단단히 입고 거실로 나온 순간 국순의 방문도 열렸다.
“이 새벽에 어딜 가게?”
“눈 보러 간대. 엄마도 같이 가자!”
정오가 어린아이가 된 듯이 국순을 졸랐다. 국순도 못 말리겠다는 듯 픽 웃고는 방으로 다시 들어가 외투를 걸치고 나왔다.
아파트는 아직 한밤중.
아니, 한밤보다 더 조용한 새벽이었다.
눈이 그친 온 세상은 하얀 솜이불을 덮은 것처럼 새하얗고 고요했다.
두툼하게 쌓인 눈을 보며 아이는 크게 입을 벌렸다.
“와아아아!”
예나가 아무도 밟지 않은 길에 도장을 찍듯 발을 움직였다. 움푹움푹 들어가는 발을 보며 몇 번이나 ‘와아아’ 탄성을 지었다.
“아빠아! 이것 봐! 내 발자국 되게 커!”
“예나 발자국 맞아? 곰이 다녀간 거 아니야?”
“아니야아! 예나 발자국이잖아아!”
지헌의 농담에 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다시 걸어왔다. 발자국이 새겨진 눈길에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밤사이 쌓인 눈을 가장 처음 밟게 해줄게.
지헌은 7년 전의 소망을 이루었다.
눈 오는 날의 강아지가 된 것처럼 눈길을 누비는 예나와 지헌이 보기 좋았으나 정오는 점점 몸이 으슬으슬해졌다. 이제 집으로 들어갈 생각으로 손짓하니 예나가 깨끗한 눈밭을 가리키며 물었다.
“엄마, 예나 여기 누워 보면 안 돼?”
“안 돼.”
“왜애.”
“감기 걸려.”
“안 걸리면 되잖아.”
“감기가 너한테 허락받고 찾아오는 줄 알아?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아이들은 왜 그럴까? 왜 눈 위에 눕고 싶어 할까?
정오가 이해할 수 없어서 단칼에 잘라냈는데 국순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너랑 똑같네. 너랑 똑같아.”
“아니 내가 뭘.”
“너도 딱 저만할 때 그랬어.”
정오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는 사이에 지헌이 정오를 설득했다.
“한번 하게 해주자.”
“히힛!”
지헌이 허락의 기미를 보이자마자 예나는 눈밭에 털썩 누워버렸다. 정오는 다시 잔소리했다.
“너 얼어!”
“아빠가 녹여줄게. 해.”
“와아!”
예나는 아기 때로 돌아간 듯이 누워서 팔다리를 휘저었다. 그러고는 행복에 겨운 듯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엄마, 예나는 다 녹았어.”
그 말에 정오도 사르르 녹아버렸다.
정오는 휴대폰 촬영 버튼을 눌러 코끝이 빨개진 예나와 지헌을 한 화면에 담았다. 사진을 흘깃 본 국순이 말했다.
“둘이 똑같네.”
“그러니까. 아주 똑 닮았어.”
“너도 똑같아. 셋이 똑같네.”
“그럼 엄마도 똑같아. 엄마도 나랑 똑같으니까.”
정오의 말대꾸에 국순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사이에 지헌이 정오의 어깨에 제 외투를 걸쳐주었다. 지헌이 품고 있던 온기가 정오에게로 옮겨갔다.
정오는 바로 지금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 거라고 생각했다.
<날 닮은 아이> 본편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