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 외전 일하는 아빠 (1) (169/183)


169. [외전] 일하는 아빠 (1)
2022.12.10.


연말의 밤은 알록달록 반짝반짝 찬란하건만 직장인들에게는 이를 즐길 만한 여유가 없었다.

정오와 지헌도 신혼여행 이후 꼼짝 없이 일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나마 활력이 되는 건 파릇파릇한 인턴사원들이 들어왔다는 것.

맥스기획의 인턴사원제도는 2개월 후 임원진과 실무진들의 심사를 거쳐 정규직으로 입사할 수 있도록 마련된 제도라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매일 정신없는 제작 2팀에도 인턴사원이 들어왔다. 카피라이터가 되길 희망하는 스물세 살의 여학생이었다.


“사실 나는 남자 인턴을 데려오고 싶었는데 정지헌 이사님이 특별히 직접 골라주셨어.”

성미란 팀장이 인턴을 데리러 가는 길에 정오에게 넌지시 말했다.

어련하시겠어요. 정지헌 이사님이.

같은 팀의 송기훈 사원도 다른 팀으로 보내버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분인데.

정오는 흐린 눈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결혼을 하고, 회사에 두 사람이 부부라는 사실을 알린 후에도 지헌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하루 1시간 이상 정오의 곁을 어슬렁거리며 누가 정오에게 집적거리는가, 누가 정오를 괴롭히는가를 직접 살폈고 되도록 같이 있을 만한 핑곗거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것으로 아직까지는 큰 말썽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충분히 누군가 불만을 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지헌이나 정오가 무엇 하나 책잡힐 일이라도 저지른다면 그것이 발단이 되어 문제를 키울 수도 있을 터였다. 그래서 정오는 매사에 더욱 조심하게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인턴사원 김보람이라고 합니다.”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에 성미란 팀장이 인턴사원을 데려왔다. 인턴사원은 미소를 부르는 앳된 얼굴의 학생이었다.


“김보람 씨, 이쪽은 디자이너 고은주 대리, 송기훈 씨, 이쪽은 PD 박영광 차장, 그리고 이쪽은 카피라이터 이정오 대리예요.”

“아, 카피라이터님이시구나!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미란의 소개를 들은 보람이 밝은 표정으로 정오에게 꾸벅 인사했다. 정오도 보람을 반겨주었다.


“나도 반가워요. 우리 잘 지내요.”

“김보람 씨는 카피라이터 지망이니까 이정오 대리가 챙겨주는 게 좋겠네요.”

미란이 자리를 정리해 주었다. 정오도 오랜만에 몸에 좋은 기운이 붙는 느낌이었다.

보람은 시종일관 표정이 밝았고 시키는 일도 야무지게 잘해냈다. 보람을 데리고 다니게 된 정오의 입가에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김보람 씨는 표정이 너무 좋네요. 그런 얘기 많이 듣죠?”

“아니 꼭 그렇진 않은데요. 지금 팀 분위기 너무 좋고요, 훈훈하고.”

“…….”

“그리고 우리 본부 이사님 너무 멋지신 거 같아요!”

생뚱맞은 고백에 정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정지헌 이사님이요?”

“네! 모델인 줄 알았어요. 왜 그렇게 잘생기셨어요?”

“…….”

“이사님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많아야 30대 초반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완전 능력자인가 봐요!”

아무것도 들은 게 없구나.

정오는 보람이 흥분하여 꺼내놓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입술을 오므렸다.


“잠깐 저도 이사님이랑 얘기 나눴는데요. 제작 2팀이 정말 일도 많지만 잘하는 팀이니까 배울 게 많을 거라고 격려해주시는데 눈물 날 것 같았어요. 진짜 스위트하고 젠틀하세요.”

스위트하고 젠틀하다?

같은 회사의 동료에게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인데.

우리 이사님께서 이미지 관리를 하시나?

이미지 관리를 하는 거라면 굳이 일찍 사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정오는 잠깐만 더 남편 칭찬을 들어주기로 했다. 뜻밖의 이야기에 새삼 즐겁기도 했다.


 

*

하루가 지나고, 이사님을 향한 보람의 마음은 조금 더 커졌다.

점심시간. 먼저 자리 잡은 은주의 앞에 식판을 내려놓으며 보람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정지헌 이사님이랑 AE님이랑 대화하시는 거 살짝 들었는데요. 말씀도 엄청 잘하시고 카리스마도 대박이에요!”

정오의 앞이라면 그 찬사가 잘 먹혔을 텐데, 보람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은주가 무표정으로 보람을 바라보았으나 보람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미간을 이렇게 구기고 말씀하셨는데요 목소리까지 좋아서 그런지 그냥 연예인 같더라고요. 이사님이 화를 내도 기분이 안 나쁠 것 같았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고은주 대리의 얼굴이 못 먹을 걸 먹은 것처럼 험악해졌다.

은주가 보람의 말을 끊어내고서 정색하며 말했다.


“보람 씨. 상대가 화를 내면 기분이 나빠야 하지 않을까요.”

“아…… 저는 정 이사님이 화를 내신다면, 이라는 가정이었어요. 정 이사님은 이사님이시니까, 제가 잘못한 일이 있어야 화를 내실 거라고 생각해서…….”

“글쎄요. 이사님이라고 다 올바른 판단력을 가졌을까요?”

은주가 호응해주지 않으니 보람은 눈치를 보며 입을 꽉 닫았다. 시무룩해진 보람은 식사 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식사를 마친 후 식당을 나서면서야 보람은 가장 편한 정오에게 속닥거렸다.


“고은주 대리님은 조금 무서우신 것 같아요.”

은주에게 어떤 따끔한 말이라도 들은 건가? 정오는 의아하게 여기다가 보람의 어깨를 다독여 주며 대답했다.


“근데 친해지면 제일 사랑스러운 분이야. 일도 잘하시고 확실하시고. 정말 배울 게 많을 거야.”

힝. 그래도 나는 무서운데.

보람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벌어졌다.


“대리님! 이정오 대리님!”

보람이 회의실에서 호들갑스럽게 정오를 불렀다.


“무슨 일이야, 보람 씨?”

회의실 앞을 지나던 정오가 물었다.


“이쪽으로 와 주시면 안 될까요? 이것 좀요.”

보람이 아기 침대를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이번에 정오네 팀은 육아용품 브랜드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브랜드 회사에서 보내온 여러 가지 제품을 회의실에 들여놓게 된 것이다.

그중 조립식 아기침대가 문제였다. 다리 쪽의 나사 두 개가 헐거워 자칫하면 옆으로 넘어질 것 같았다.

정오는 깜짝 놀라 보람과 함께 침대를 바로 세웠다. 바로 세우자마자 보람은 손을 놓았다. 손을 놓으니 다시 침대가 기울어졌다. 정오는 손을 뗄 수 없게 되었다. 손을 놓았다간 다른 쪽 침대 다리가 망가져버릴 것 같았다.


“침대 나사가 헐거워서 쓰러질 것 같아요. 잠깐만 이렇게 계셔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나사 조이는 거 빨리 구해 올게요.”

“어…… 보람 씨…….”

정오가 다른 당부를 하기 전에 보람은 떠나버렸다.

조립식 침대니 패키지에 동봉된 렌치가 있을 텐데. 그 말을 해주기도 전이었다.


‘요즘 젊은 애들은 빠르기도 하지.’

정오는 어쩔 수 없이 어정쩡한 자세로 침대를 붙들고 서 있게 되었다.

무게가 무게인지라 같은 자세로 가만히 있는 것은 점점 무리가 왔다. 금방 올 거라 생각했던 보람은 통 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기다린 지 10분쯤 되었을까.

턱.

뒤에서 누군가 성큼 다가와 정오가 붙잡고 있던 침대를 대신 받쳐 들었다.

다름 아닌 지헌이었다. 정오를 찾는 정지헌 레이더가 작동한 것이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지헌의 표정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대리님! 찾았어요. 나사 조이는 거!”

기쁘게 뛰어와 렌치를 들고 흔들던 보람이 지헌을 발견하고서 두 손을 내려 가지런히 모았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뭐 합니까. 잡아야지.”

“아, 네네!”

지헌의 성마른 목소리에 보람이 후다닥 달려와 기울어진 침대를 붙잡았다.

지헌은 보람에게서 렌치를 넘겨받아 침대 나사를 꽉 조였다.

침대의 균형을 확인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누가 이정오 대리한테 이걸 붙잡고 있으라고 한 겁니까?”

그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보람은 굳어버렸다.

보람이 혼날 것 같아 정오가 대신 대답했다.


“제가 붙잡고 있겠다고 했어요.”

“왜?”

“김보람 씨가 렌치를 찾아오는 게 빠를 것 같아서.”

“그래서 김보람 씨는 빨리 찾아왔습니까?”

“네. 빨리 찾아왔…….”

“10분 전부터 전화를 안 받던데.”

지헌의 지적에 정오는 카디건 주머니를 짚었다. 지헌이 전화를 걸었다는 건 당연히 몰랐다.

10분 동안이나 정오가 침대를 받쳐 들고 있도록 했다는 사실이 탄로 나자 보람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본인 몸 생각은 안 해요?”

정오에게 한마디 한 지헌이 고개를 돌려 보람도 나무랐다.


“김보람 씨는 임신부를 배려했어야죠.”

보람의 눈이 커다래졌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런 줄 몰라서…….”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세요.”

회의실 기온을 얼음장같이 차갑게 만든 지헌이 쌩하니 떠났다. 그래도 이 정도로 끝이 났으니 다행이었다.

지헌이 떠난 후 보람은 금세 혈색이 돌아왔다.


“대리님, 말씀하셨어야죠. 너무 날씬하셔서 임신하신 줄 몰랐어요. 그럼 결혼도 하셨던 거예요? 대박!”

기가 죽어 침울해할 줄 알았는데, 긍정적인 아이라 다행이었다.


“정지헌 이사님도 대박이네요! 제 이름도 기억하실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임신부 배려하시는 것도 너무 감동이에요.”

아니, 다행인가?

이번에도 정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보람에게는 콩깍지가 제대로 씐 것 같았다.

보람은 지헌을 다시 만날 기회를 엿보았다. 지헌이 지적했던 대로, 자신이 큰 실수를 한 것만 같았다.

심사기간 동안 상관에게 흠이 잡히면 안 되는데 제대로 찍힌 것 같았다. 보람은 기훈에게서 넘겨받은 제작 2팀의 실비 내역서를 지헌에게 직접 보고하기로 했다.

똑똑,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고 지헌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헌은 문을 열고 들어온 보람을 슬쩍 보고는 다시 업무를 이어갔다.


“이사님, 아까는 제가 실수했습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보람이 다소곳이 인사하고는 결재서류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거 제작 2팀 실비 내역서입니다.”

“네.”

지헌은 그대로 받아서 옆으로 던져 놓았다.

보람의 두 뺨은 붉게 상기되었다. 이대로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워서인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나 싶어 눈동자를 굴리는데, 언뜻 사진액자가 하나 보였다.

이국적인 식당. 지금보다 앳된 지헌과 어떤 여자가 마주 앉아 카메라 쪽을 보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런데 지헌의 옆에 있는 긴 머리의 여자가 이정오 대리를 닮은 것 같았다.

무심코 불쑥 질문이 나왔다.


“이사님 가족사진이에요?”

7년 전 멜버른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무표정의 지헌이 대충 대답했다.


“네.”

“동생분이 이정오 대리님이랑 많이 닮으셨어요.”

“같은 사람이에요.”

“어……? 이정오 대리님이랑 남매셨어요?”

정지헌 이사님은 정 씨고, 이정오 대리님은 이 씨인데 어떻게 된 일이지?

남매가 아니라 사촌인가?

아니면…… 출생의 비밀 같은 게 있는 건가?

눈을 깜빡깜빡거리는 보람에게 지헌이 말했다.


“남매가 아니라 부부.”

“…….”

“이정오 대리한테 얘기 못 들었습니까?”

눈치 없는 자신을 경멸하는 듯한 지헌의 표정에 보람은 얼어붙었다. 이제는 귀까지 새빨개졌다.

힘없이 지헌의 집무실에서 나온 보람은 자리로 돌아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멍청하게 앉아 있다가 정오에게 다가갔다.


“대리님 제가요. 정지헌 이사님한테 다녀왔는데요.”

“아, 그랬어?”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보람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그 속뜻을 파악한 정오가 쓰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 사람이 또 그런 걸로 타박해? 여태 그걸 몰랐느냐고?”

“아뇨. 아뇨.”

“…….”

“그냥 사실을 얘기해주기만 하셨어요. 근데…….”

보람이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이사님 인상이 좀 변하신 거 같아요. 오늘은 조금…… 무서웠어요.”

“그게 진짜야, 보람 씨.”

“네……?”

“원래 그런 사람이야.”

상냥하게 진실을 말해준 정오는 보람을 좀더 달래고 지헌을 찾아갔다. 집무실에서 어떤 일이 있었기에 보람의 기가 다 죽어버린 건지 들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지헌은 찾아온 정오가 입을 열기도 전에 대뜸 따졌다.


“왜 내 얘기 안 했어?”

“무슨 얘기?”

“내가 네 남편이란 얘기.”

“아 그거.”

정오는 머쓱하게 코를 긁적였다.

당신에 대해 좋은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어. 진실은 그런 것이었지만.


“해서 뭐 해.”

“해서 뭐하냐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런 얘기 하면 괜히 인턴사원 마음만 불편해진다고. 그리고 어차피 금방 알게 될 일인데 뭐. 보람 씨가 오빠 잘생겼다고 좋아했단 말이야. 오빠도 외모 칭찬이라도 받으면 좋지 뭘 그래.”

“외모 칭찬이라도? 내가 외모밖에 없어?”

웃음기는 조금도 없는 지헌의 진지한 대꾸에 정오의 마음에는 번뇌가 찾아왔다.

김보람 씨. 보람 씨가 잠시 동경했던 이 남자의 실체는 이렇답니다. 유치하기 짝이 없죠. 이걸 내 입으로 다 알려줄 수 없으니 통탄스러울 따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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