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외전] 일하는 아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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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외전] 일하는 아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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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외전] 일하는 아빠 (2)
2022.12.14.
정오는 차분한 목소리로 조근조근 따졌다.
“그동안의 업보를 좀 생각해봐. 오빠는 직원들이랑 얘기할 때 미간이 0.5cm야. 무서워서 어떤 직원이 오빠한테 편하게 얘기하겠어.”
하지만 이내 울컥하게 되었다.
“내가 오빠 부인이니까 직원들이 나한테 와서 오빠에 대한 좋은 말만 해줄 것 같지? 아니야. 이사님한테 말 좀 전해달라고 나한테 부탁한다고. 직원들 옆에 앉혀놓고 기획서 수정하게 하지 말라고 해달라, 알 수 없는 그림 그려놓고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고 툭 던지지 말라고 해달라. 회의실에서 이정오 옆에 남자가 앉는다고 살기 띠고 노려보지 않게 해달라.”
정오는 어느새 회사의 신문고가 되어 있었다. 직원들의 하소연을 귀담아듣고, 달래야 할 사람은 달래고…… 당연히 정오에게도 편하지는 않은 날들이었다.
그래서 보람을 그냥 두었다. 단 이틀이었지만 남편에 대한 좋은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지헌은 깜짝 놀랐다. 정오가 그간 내색하지 않았기에 그런 노고가 있었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오죽하면 정지헌은 이정오 쫓아다니러 회사 나온단 소리가 나오겠느냐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가 맥스기획에 출근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정오를 지키기 위하여.
본 업무는 그저 거들 뿐.
속 시원히 이야기한 정오가 권고했다.
“이제 본사로 돌아가.”
“왜, 왜 얘기가 그쪽으로 튀는데.”
지헌이 당황하여 버벅거렸다.
“오빠의 미래를 위해서 하는 얘기야. 이제 본사로 돌아가.”
“그게 왜 내 미래를 위해서 하는 얘기야. 내 미래는 내가 제일 잘 안다고.”
“그럼 일을 열심히 해. 나 따라다니는 데 시간 쓰지 말고.”
지헌은 억울했다. 아내의 눈에는 그의 바쁨이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일을 열심히 안 한다고 생각해? 내 할 일 다 끝내고 쫓아다니는 거야.”
“리더는 할 일 다 끝냈다고 놀면 안 되지. 다른 할 일을 찾아봐야지.”
내가 놀아? 내가 노냐고!
일에는 최대 70%만 에너지를 투입하는 내가 널 만나고 나서 80%나 열정을 쏟게 되었는데.
이런 나의 노력이 보이지 않아?
하지만 정오의 반응은 냉담했다.
“나 신경 쓰느라 일을 못 하겠으면 정말로 본사로 가는 게 나아.”
정오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
리더는 너무나 외로운 자리. 심통이 나도 일은 해야 한다.
지헌은 경쟁 PT 회의를 앞두고 회의실로 갔다. 먼저 회의실에 도착한 정오가 제작팀원들과 함께 제품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지헌이 들어오자 다들 한마디씩 인사를 건넸지만 정오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어디 계속 그래봐.
지헌은 날카로워진 눈매로 정오를 흘겨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기획팀 팀장이 일어나 브리핑을 시작했다.
“유아유어스는, 튼튼한 국민 유모차로 입지를 굳힌 ‘아이품’이 3년 전 론칭한 육아용품 브랜드입니다. 유아복과 기능성 의류가 큰 사랑을 받고 있고요. 올해에는 아기띠와 온도감지 욕조가 개발되어 이례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내년에는 조립식 침대와 아기 의자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합니다. 말씀드린 제품은 앞에 설치해두었으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비딩 금액은 제작비를 포함하여 60억 내외. 규모가 꽤 있어 제작팀은 두 팀이 투입되었다.
“제작 1팀은 기혼자 분들이 있으시고, 제작 2팀은 아무래도 이정오 대리가 육아 중이고 또 출산을 준비하고 계시니 가장 현실적으로 접근해보실 수 있겠다는 판단입니다. 가능하시다면 이 대리님이 제작 프레젠테이션까지 직접 하시면…… 광고주의 신뢰도가 올라갈 것 같기도 하고요. 아니, 부담 갖지는 마시고요.”
기획팀 팀장은, 정오를 지키기 위해 출근을 하는 지헌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정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제가 하는 게, 적어도 제가 피티 자리에 참석이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성공하면 애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효도를 하는 셈이 되겠네요.”
정오의 긍정적인 대답에 다들 편히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유연하게 의견이 오갔다. 지헌도 입을 열었다.
“정말 제작 프레젠테이션은 이정오 대리가 하는 게 좋겠네요.”
모두 이견이 없는 눈빛이었다. 지헌이 결정해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정오도 오랜만에 의욕을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 그러나 지헌의 다음 말에 다들 당황하고 말았다.
“그렇게 된다면 기획 프레젠테이션은 제가 하겠습니다.”
하관이 사라지는 느낌. 모두의 턱에 힘이 풀리며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지헌만이 지그시 미소 지었다. 정오를 노려보듯 응시하며.
보여주면 되잖아.
네 옆에 있기 위해 내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걸.
회의가 끝난 후 정오가 씩씩대며 지헌을 쫓아왔다.
“오빠가 발표를 왜 해?”
“경쟁 피티에서 본부장이 프레젠테이션하는 거 못 봤어?”
물론 정오도 많이 보았다. 이전의 회사에서는 임원급이 직접 기획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만큼 클라이언트의 광고 캠페인에 열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건, 숙련자들의 얘기고.
“자신은 있는 거지?”
정오가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다.
“날 못 믿어?”
“믿음이 아니라 확신이 필요하니까 그러지.”
지헌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그나마 가장 정지헌을 믿고 지지할 수 있는 사람이 정오였다. 정오는 현재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당부를 단단히 덧붙였다.
“직원들 부려먹고 자료 받아서 날름 발표만 할 생각하지 마. 오빠가 프레젠테이션을 할 거라면 기획서도 오빠가 준비해. 다들 그렇게 하니까.”
“…….”
“그리고 오빠가 프레젠테이션하는 걸 본 적 없는 실무진들 불안하지 않게 경과를 보여줘. 중간발표도 하고 리허설도 하고. 다들 그렇게 하니까.”
지헌은 잠시 눈썹을 구겼지만 정오의 당부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혹시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여 걱정한 정오가 사족을 덧붙였다.
“내가 중요한 사실 말해줄까?”
“…….”
“나는 승률 100%야. 이제껏 내가 발표한 피티에서 진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열 번 해서 열 번 다 이겼다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오만하게 턱을 쳐들고 있던 지헌의 표정이 움찔하며 슬쩍 변했다.
“이번 피티 못 따내면 다 오빠 탓이라는 얘기야.”
그리하여 누가누가 더 잘하나 경쟁이 시작되었다.
*
부부의 경쟁은 나날이 열기가 더해졌다. 지헌도 1차 기획서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시간마다 정오의 주변을 힐끔거리던 습관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사이에 시간은 유유히 흘렀다.
“아빠아! 내일모레가 무슨 날인지 알아?”
“글쎄. 무슨 날이지?”
예나의 물음에 지헌은 알면서도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크리스마스잖아!”
어느덧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내일은 크리스마스이브, 모레는 크리스마스.
결혼 이전에 정오가 말해둔 것이 있었다.
“예나한테 제일 중요한 날은 예나 생일, 어린이날, 그리고 크리스마스야. 애들은 기다리는 재미로 사니까 이날은 절대 잊지 마. 알았지?”
지헌도 그 말을 뼈에 새겼다.
즐거운 크리스마스이브,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서는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았다.
24일까지 1차 기획서를 마무리 지어놓아야 일정에 차질이 없었다. 하지만 의견 취합이라는 게 쉽지는 않았다. 실무진들은 실무진 나름대로 할 일이 많아 정규 퇴근시간 이후에야 회의가 가능했다.
광고인들은 설득에 집착하는 편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취합된 의견이라도 내부의 어느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하면 다시 시작이었다. 내부 사람도 설득을 못 하는데 회사 밖의 그 누구를 설득할 수 있겠나 하는 강박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헌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윗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 젊은이들, 기획 쪽의 인턴사원들이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지헌은 논리를 수정해야 했다.
인턴사원들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연말, 회사에 열정을 바치는 이들은 귀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24일. 퇴근 시간.
“이사님, 저는 이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15%의 만족도는 별로 유의미한 결과를 내지 못할 것 같아요.”
인턴들의 진지한 의견에 지헌은 기획서의 한 줄을 힘없이 지웠다.
“그래요. 다시 생각해보죠…….”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며, 지헌의 눈 흰자위가 붉어지고 있었다.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앳된 젊은이들을 남기고 나만 퇴근할 수도 없고.
“그런데 선일 씨, 세웅 씨는 퇴근 안 하나?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지헌의 심각한 염려에도 열정을 가득 품은 젊은이들은 가뿐하게 대답했다.
“여자친구도 없고 약속도 없어서요. 열정을 불태울 회사가 있어서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이따가 10시에 친구들 만나기로 해서요. 열심히 일하다가 가려고 합니다.”
……이런 이들이 있기에 회사의 미래는 밝다. 정지헌의 미래는 어둡지만.
지헌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밤 10시…… 그럼 난 밤 10시까지 이 젊은이들에게 붙잡혀 있어야 한단 말인가.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나는 가족이 있는 몸인데. 내 딸이 아빠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인턴들이 간식을 먹는 막간을 틈타 잠시 회의실을 빠져나온 지헌은 정오에게 연락했다. 7시였다.
“뭐 해?”
[예나랑 놀지. 아빠도 없어서 아무 데도 못 가고 그냥 집에서 놀고 있어. 참 안락한 크리스마스이브다.]
정오의 대답에 지헌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미약하게 눈물이 맺혔다.
“미안해.”
[아니야. 우리 일이 다 그렇지 뭐.]
“그래도 예나가 당장 오라고 하면 당장 갈 텐데.”
[에이, 무슨 소리야. 인턴들한테 일을 떠넘기려고? 그럼 안 되지.]
“인턴들한테 떠넘기는 게 아니라, 내가 집에 싸들고 가서 하면 되잖아.”
[그럼 안 되지! 직원들 의견을 계속 반영해야 하는데. 인턴들이 오빠를 위해 귀한 시간을 내주는 거잖아.]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오의 목소리는 조금도 안타까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헌의 야근을 장려하는 듯한 느낌.
“내가 없어서 예나가 많이 슬퍼하지 않아?”
[아니. 전혀. 계속 웃으면서 놀고 있어.]
까르르. 예나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정말 아이는 웃으면서 놀고 있었다.
왜, 왜, 왜. 대체 왜 내가 없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거야.
[여긴 내가 있으니까 오빠는 하던 거 다 끝내고 와. 오빠가 일을 끝내야 다른 사람들이 후작업을 하지.]
“…….”
[괜찮아. 예나 생일도 몰랐었던 아빤데 이 정도야 뭐.]
심장을 찌르는 팩폭에 지헌은 까마득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5월 27일. 예나 생일의 이야기…….
그날. 괜한 오해와 질투심에 사로잡힌 지헌은 예나의 생일이란 것도 모르고 정오를 제 옆에 두려고 일부러 회사 일을 키웠다. 일을 집에 싸들고 가서 하겠다는 정오의 간청도 완강하게 거부하고 밤 9시가 다 되어가도록 그녀를 붙잡아두었다.
그건 지헌의 흑역사인데.
그는 이제야 그 벌을 받고 있었다.
정오가 놀리듯이 말했다.
[크리스마스야 뭐 예나 생일도 아니고 예수님 생일인데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다 이해할 거야. 우리 착한 예나는.]
흐아아아. 미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