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외전] 일하는 아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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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외전] 일하는 아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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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외전] 일하는 아빠 (3)
2022.12.17.
아내는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지만 지헌은 포기할 수 없었다. 머리를 굴린 그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백화점이 회사 근처라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기다렸어요?”
“아, 이사님.”
회의실에서 편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인턴 두 명은 지헌이 돌아오자 허리를 바로 세웠다. 실은 이들도 본부장 앞에서는 긴장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눈치까지 보며 열심히 일할 필요는 없는데. 크리스마스이브에.
지헌은 얼른 이들을 퇴근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테이블 위에 백화점에서 사 온 것을 올려놓았다.
“케이크예요. 매장에서 제일 비싼 걸로 샀어요. 두 사람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 크리스마스 기분이라도 내라고.”
“헉……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역시 인턴들은 감격했다. 지헌의 예상대로였다.
“아,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내가 케이크를 잘못 골랐네요.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샀네.”
“…….”
“녹기 전에 얼른 집 냉동실에 넣어야겠네요.”
“그럼 여기서 먹고, 더 일하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인턴들의 열정은 무너뜨리기 쉽지 않았다. 인턴들의 난감한 열의에 지헌이 잠시 움찔했다가 대답했다.
“집에 가져가서 가족들이랑 먹어요. 회사에서 선물 받았다고 하면 부모님이 얼마나 대견해하시겠나.”
“그래도, 일을 해야 하는데…….”
“두 사람의 열정은 이해하지만 크리스마스 연휴는 가족과 함께 보내야지. 가족들이 기다릴 거예요. 어서 퇴근해요.”
젊은이들아. 형 말 좀 들어라.
너희들이 퇴근해야 나도 집에 간다고.
“마무리는 내가 하면 되니까. 아직 1차 기획서니까 이후에도 얼마든지 시간이 있어요. 나중에 확인하고 더 보완해봅시다.”
지헌의 이어지는 설득에도 인턴들은 마음이 무거운 듯 머뭇거렸다. 지헌은 인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앞자리를 정리해주며 손수 케이크 상자를 손에 쥐여 주었다.
“두 사람 다 수고했어요. 오늘 피드백 정말 고맙고.”
“……아닙니다. 저희가 감사합니다, 이사님.”
“인턴들까지 이렇게 생각해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인턴들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거듭 지헌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움을 표했다.
인턴들을 퇴근시킨 후, 지헌은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이브라 그런지 길이 막혔다. 초조한 마음에 차를 버리고 뛰어가고 싶기도 했다.
가까스로 50분 만에 아파트 주차장에 이른 지헌은 한 층에 멈추어 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하고 다급히 계단을 올랐다. 7층 정도는 만만하단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호흡이 가빠지고 땀이 나긴 했다.
어쨌든 무사히 집에 도착.
“예나야!”
지헌은 현관문을 열며 크게 외쳤다.
“왔어?”
그런데 그런 지헌을 반기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어머니, 장영미였다. 지헌은 멍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빠아!”
예나가 뒤늦게 지헌을 불렀다. 산타 모자를 쓴 예나가 루돌프 빨간코가 된 재광에게 사슴 머리띠까지 씌우며 까르르 웃고 있었다.
“왔냐?”
재광도 고개를 들어 물었다. 재광의 루돌프 코가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처럼 반짝거렸다. 회장님의 위엄과는 거리가 먼 그 우스운 모습에 지헌은 얼떨떨했다.
“언제 오셨어요?”
“단축근무 하고 바로 왔지. 넌 오늘 같은 날 기획서 다듬고 있었다며?”
“…….”
“꼬옥 일 못하는 애들이 남들 놀 때 일한다고 소란이지.”
“그러니까요.”
어느덧 옆으로 다가온 정오가 재광의 핀잔을 거들어 지헌을 놀렸다. 지헌은 눈물이 맺혀 반들반들해진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그래서 예나가 그렇게 까르르 웃었구나.
그래서 정오가 괜찮다고 한 거였구나. 믿는 구석이 있어서.
지헌은 고개를 돌려 영미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뭐 하세요?”
“목도리 만들잖아.”
영미가 뜨개바늘을 서툴게 움직이며 대답했다.
국순은 요리를 잘하고, 재광은 아이와 놀아주는 재주가 있는데 영미는 뭐든 어정쩡해서 급하게 뜨개질을 배우게 된 것이다. 영미는 손녀의 잔소리를 들어가며 인형들의 목도리를 뜨고 있었다.
“할머니. 코알라는 노란색이라고 했잖아요.”
“아, 참 그렇지. 그렇지. 그럼 이걸 어째? 이미 다 만들어가는데.”
“다시 해요. 빨리요.”
“그래. 근데 할머니가 눈이 잘 안 보여. 오래 들여다봐야 해.”
“그럼 천천히 하면 되잖아요.”
“네가 빨리하라며.”
어느덧 영미와 예나도 많이 친해져 있었다. 손녀딸에게 쩔쩔매는 어머니가 우스워 지헌은 입술에 힘을 주었다.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한자리에 모인 가족은 지헌이 가져온 케이크로 조촐한 파티를 했다. 재광과 영미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예나와 놀아주다가 밤늦게 떠났다.
이윽고 밤 10시. 예나가 눈꺼풀이 무거워진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서 지헌에게 말했다.
“아빠, 나는 오늘 안 잘 거야.”
“자야지. 왜 안 자.”
“산타 할아버지 오는 거 보고 잘 거야.”
“…….”
“바둑학원 언니랑 오빠들이 자꾸 산타 할아버지는 없대. 진짜로 있는데!”
“예나는 산타 할아버지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
“크리스마스에 선물 받았으니까.”
그동안 누가 산타 할아버지 대역을 했는지 지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잠은 자야 해. 산타 할아버지는 예나가 자야 오실 거야.”
“그럼 사진 어떻게 찍어?”
“사진을 왜 찍어?”
“산타 할아버지 사진 찍기로 했는데?”
“산타 할아버지는 엄청 빨라서 사진 찍기 힘들어.”
“왜 빨라?”
“온 세상 어린이들 집에 다 들러야 하는데 그러려면 얼마나 바쁘시겠어.”
“그래서 사진 못 찍어?”
“그래. 못 찍어.”
지헌의 대답에 예나의 두 눈이 젖어 들었다. 딸의 시무룩한 표정에 지헌의 심장이 뻐근해졌다.
“……대신 아빠가 찍어줄게. 예나는 얼른 자.”
“정말?”
“그래. 정말.”
“그럼 약속!”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다.
*
정오와 국순은 서둘러 지헌을 변장시켰다.
“산타 모자는 있고, 사진은 상체 위주로 찍으면 되니까 빨간 보자기를 대충 기워서 산타 옷처럼 만들면 돼. 사진은 급하게 찍은 것처럼 흐릿하게 찍고.”
“얼굴에 솜을 좀 붙여, 정 서방. 수염으로 얼굴을 가려야지.”
두 사람은 자못 진지했다. 왠지 이들이 신이 난 것처럼 보여서 지헌은 정오와 국순이 예나와 짜고서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했다.
어쨌든 어정쩡하게나마 산타할아버지의 외형이 갖추어졌다.
정오가 온 방 안의 불을 끄고 준비해놓은 선물을 지헌에게 건넸다.
“이걸 트리 앞에 두면 돼. 그럼 내가 사진을 찍을게.”
지헌은 정오가 시키는 대로 거실의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선물을 내려놓았다.
찰칵, 찰칵, 찰칵!
“잘했어! 수고했어!”
임무를 해낸 사진사 정오가 손뼉을 짝짝 치며 환호했다.
지헌도 한숨을 돌리며 수염을 떼어냈다.
사진은 꽤 그럴듯하게 찍혔다. 지헌의 너른 등짝과 흰 수염이 덕지덕지 붙은 옆모습만 언뜻 보여서 아무도 지헌이란 걸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았다.
비록 회사에서는 격무에 시달렸지만 마무리는 훌륭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러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드르르르. 지헌의 휴대폰이 울렸다. 뜻밖에도 승규였다.
지헌은 무슨 큰일이 있나 싶어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존경하는 산타님?]
지헌의 우려와 달리 승규의 목소리는 촐랑맞기 그지없었다. 지헌은 가늘어진 눈매로 정오를 노려보았다. 정오도 찔리는 게 있는지 지헌의 반대편으로 발을 슬금슬금 옮겼다.
“놀리려고 전화했냐?”
[아니, 우리 집에 좀 와달라고.]
“왜. 무슨 일 있어?”
[제발 우리 집에도 강림하셔서 기념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산타님…….]
“……끊는다.”
[친구야아! 내가 앞으로 존경할게!]
“끊어.”
가차 없이 전화를 끊은 지헌이 정오에게 따졌다.
“승규한테 말했어? 내가 산타 변장했다고?”
“아니, 도빈이네도 걱정하길래, 그냥 사진만 보내줬…… 미안!”
지헌은 말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서 줄행랑을 치려는 정오를 덥석 붙잡았다.
“어딜 도망가. 같이 가야지.”
“…….”
“앞장서.”
지헌의 으름장에 결국 정오도 함께 길을 나서게 되었다.
지헌은 승규의 요청대로 산타 변장을 하고서, 잠든 도빈과 도윤의 머리맡에 선물을 놓았다.
찰칵. 기가 막히게 실감 나는 사진 한 장이 나왔다. 승규와 진서는 흡족해했다.
임무를 완수한 지헌은 뒤늦게 툴툴거렸다.
“내년에는 산타 할아버지 같은 거 없다고 애들한테 꼭 말해. 왜 고생은 내가 했는데 공치사는 그분이 받냐.”
“에이. 그래도 동심을 지켜줘야지.”
승규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내년에는 내가 할게. 너무너무 고맙다 친구야.”
“정말 고마워요. 지헌 씨.”
그래도 친구 부부에게 고맙다는 말을 잔뜩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제 정말로, 메리 크리스마스!
모두에게 행복한 크리스마스였다.
승규네 부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정오가 하늘의 별을 발견하고서 외쳤다.
“오! 오늘은 별이 보이네!”
그 말에 응답해주기 전에 또 지헌의 휴대폰 진동이 드르르 울렸다. 지헌이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고서 무표정으로 넘기니 정오가 물었다.
“이 밤에 누구야?”
“궁금해?”
“궁금하니까 묻지.”
그 말에 그간 꽁했던 지헌의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
지헌은 지헌대로 아내의 냉담함에 서운했었다.
어머님한테는, 아니, 고은주 대리한테도 잘 웃어주고 귀에 간질간질한 말도 잘해주면서, 왜 내 아내는 나한테만 이렇게 매정한가.
왜 이정오는 내게 관심이 없는가. 나는 그저 이정오밖에 없는데.
자신과 달리 독점욕이 없는 아내를 보며 마음이 자꾸 삐뚤어졌고 질투심도 생겼었다.
나는 이렇게 쉬운 남자인데. 너의 말 한마디에 금방 마음이 풀리는데.
“인턴이 고맙대. 자기 의견을 잘 들어줘서.”
“오. 인턴이 문자도 보내줘?”
“내가 이래 봬도 존경받는 사람이야.”
지헌이 턱을 반짝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무심코 응시한 남쪽의 하늘에는 정오의 말대로 별이 몇 개 보였다. 지헌은 그중에서 제일 밝은 별을 가리켰다.
“저게 시리우스야. 여기서 제일 밝게 볼 수 있는 별.”
예나가 별에 대해 궁금해할 때 언제든 대답해주기 위해 틈틈이 별을 공부해온 지헌이 설명했다.
“시리우스는 지구에서 8광년 정도 떨어져 있어.”
시리우스에서 출발한 빛이 지구에 도달하려면 8년 정도가 걸린다는 뜻이었다.
정오는 곧장 질문했다.
“그럼 지금 우리가 보는 저 별은 8년 전쯤의 모습이라는 거야?”
“맞아.”
“그럼 저 별에서도 지금, 8년 전쯤의 지구를 볼 수 있겠네?”
“그렇겠지.”
대답하는 지헌의 눈이 반짝거렸다. 하늘의 별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8년 전이면 우리가 만나기 직전이다. 그럼 저 별에서는 우리의 역사를 관람할 수도 있겠네?”
“그렇지. 우리 예나가 커가는 것도 처음부터 다 지켜볼 수 있을 거야.”
아…….
덤덤하게 이어진 그의 목소리가 왠지 먹먹했다.
소중한 것을 놓친 기억은 그의 삶을 애틋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평생 저 별을 가슴에 박아넣고 살게 될 것 같았다.
정오가 가라앉은 기운을 띄우듯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우리 남편이 얼렁뚱땅 일하던 시절도 볼 수 있겠다!”
“얼렁뚱땅 일하는 걸 봐서 뭐 해.”
지헌은 자신의 과거는 조금도 볼 게 없다는 투로 말했지만, 정오는 생각이 달랐다.
당신만 나와 예나를 놓친 게 아니잖아.
나도 당신을 놓쳤던 건데. 나도 그때의 당신을 볼 수 없어 안타까운데.
나도 미안해. 사랑하는 만큼 미안해.
정오는 지헌의 마음을 어루만지듯 그의 손을 잡았다.
지헌이 그 손을 제 주머니 안에 넣으려는데 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승규가 방금 전에 찍은 사진을 전송해준 것이다. 지헌이 사진을 보고서 눈을 번뜩이며 부들거렸다.
사진을 알아본 정오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언젠가 우리 예나는 이 사진에 찍힌 게 아빠라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리고 더 행복한 사람이 되겠지.”
사랑하는 정지헌 씨.
시간이 흐르는 건 언제나 아쉽지만, 시간이 흘러 좋은 일도 분명히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