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외전] 일하는 아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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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외전] 일하는 아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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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외전] 일하는 아빠 (4)
2022.12.21.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낸 후엔 다시 주말 근무였다. 소중한 연말이었지만 다들 경쟁 프레젠테이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특히 지헌은 결산보고 준비까지 겹쳐 몸이 둘이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경쟁 프레젠테이션 날짜가 앞당겨졌다.
“이사님, 방금 아이품 담당자와 통화했는데, 부득이하게 경쟁 피티 날짜를 31일로 변경하겠다고 합니다.”
기획팀 팀장의 보고를 받은 지헌의 미간이 0.5cm로 좁아졌다.
“12월 31일이요?”
“네.”
12월 31일이면 이번 주 금요일이었다.
“이유가 뭐라고 하던가요?”
“대표님의 일정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헌은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쾌할 순 없었지만 사실 크게 놀란 건 아니었다. 재작년에도 이런 일이 있었기에 지헌은 만약의 사태를 가정해본 적이 있긴 했다.
지헌은 바로 경쟁 프레젠테이션 담당팀을 소집했다.
“아이품의 유아유어스 경쟁 피티가 일주일 앞당겨졌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 오후입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회의실에 모인 직원들의 입이 일제히 벌어졌다. 정오가 가장 크게 놀란 것 같았다.
지헌은 정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상황을 정리해주길 기다리는 수많은 눈들을 앞에 두고 정오에게 달려갈 수는 없었다.
“조사해보니 아이품에서는 재작년에도 경쟁 피티 날짜를 일주일 앞당겼습니다. 대행사에서 비상상황에 얼마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시험해보려는 것 같기도 하네요.”
설명을 덧붙이며, 지헌 또한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날짜가 앞당겨졌으니 일주일 덜 고생하게 되는 것이었다. 또한 일정은 우리에게만 빠듯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경쟁사들에게도 똑같이 빠듯할 것이다. 경쟁사들이 버거워한다면 우리에겐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정신을 차리고, 침착하게 진행해도 된다.
어차피 기획안 발표는 내가 하는 것이니 그만큼 다른 팀원들의 부담도 적을 것이고.
“이런 상황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작팀은 어떻습니까?”
지헌의 긍정적인 의견에 성미란 팀장도 곧장 대답했다.
“러프하지만, 1차 크리에이티브 제안서는 완성이 되었습니다. 내일 보고드리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저녁때 보기로 하죠. 제작물 시안은 스케치로 준비하셔도 됩니다. 김 팀장님은 새로 스케줄 짜서 공유해주시고요.”
일이 정리된 후, 지헌은 곧장 정오에게 물었다.
“이정오 대리, 괜찮습니까?”
“네. 해봐야죠.”
여전히 얼굴색은 창백했지만 그래도 아내에게는 이겨내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듯했다. 안심한 지헌은 정오의 옆에 앉은 은주에게도 말을 걸었다.
“고은주 대리는요?”
뜻밖의 물음에 은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이 여우 같은 이사님아.
이정오 대리한테나 괜찮으냐고 물어보면 될 일이지, 왜 나한테까지 이래. 내가 이정오 대리 옆에 앉은 게 무슨 죄라고.
은주는 당황하여 대답이 늦었다.
“네, 뭐…… 괜찮습니다. 언제 광고주가 대행사 사정 봐서 날짜 잡은 적이 있나요.”
은주의 담담한 표현에 지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오의 대답을 들을 때와는 확실히 비교되는 반응이었다.
은주는 지헌이 같잖았고 속이 떫기도 했지만 쓴웃음은 안으로 감추었다.
그래. 저건 일하는 이사님의 탈을 쓰고 있지만 알맹이는 그냥 그대로 이정오 껌딱지다. 그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야.
“그렇죠. 생각할 시간은 많이 부족하지만, 직관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기획안은 제작물에 전적으로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 같이 힘내죠.”
은주가 속으로 비웃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 채, 지헌은 멋있게 회의를 정리하고 회의실을 떠났다.
*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앞둔 이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정이 변경된 것은 의외로 팀원들에게 활력을 주었다. 날짜가 늦추어졌다면 더 오랫동안 고생할 생각에 암담했을 텐데 앞당겨졌으니 수고스러운 시간이 단축된 것이다.
사실 성공한다면 좋겠지만 실패할 수도 있기 때문에 기업의 입장에서도 노고의 시간은 짧을수록 좋다.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여 팀원들은 의견 충돌로 실랑이를 벌일 새도 없이 재빨리 의견을 모았고 결과물은 착착 쌓였다.
그리하여 12월 31일 디데이.
맥스기획의 발표 팀은 리허설 후 아이품 본사로 곧장 출발했다. 오늘의 참석자는 지헌과 기획팀 팀장, 박영광 차장, 정오 그리고 고은주 대리였다.
역시나 클라이언트는 함께 참석한 지헌에게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아이품의 대표는 바로 지헌을 알아보았다.
“정재광 회장님의 자제분 아니십니까?”
“맞습니다. 맥스기획 1본부 본부장, 정지헌입니다. ”
“맥스기획이 우리 아이품에 많이 신경 써 주시는군요. 이렇게 자리에 함께해주시니 영광입니다.”
아이품 대표의 호의에 지헌 또한 깍듯하게 응답했다.
“저 역시 오늘 프레젠테이션을 맡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헌의 대답에 참석자들은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하신다고요?”
“네. 기획 파트를 맡았습니다.”
회장 아들은 그저 자리나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지헌이 발표를 한다는 사실만으로 클라이언트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이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갈렸다. 호의적인 눈빛과 적대적인 눈빛이 동시에 지헌에게 박혔다.
“그럼 시작하시죠.”
편견 어린 시선 속에서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었다. 지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광고 캠페인 기획 파트를 발표했다.
리허설에서 그랬던 대로 지헌의 프레젠테이션에는 오점이 없었다. 캠페인 테마를 도출하기까지의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핵심이 분명했다.
특별하게 튀지는 않았지만 반듯한 발표였다. 그룹 회장님 자제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던 시선이 어느덧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이윽고 정오의 차례.
“안녕하십니까. 맥스기획 카피라이터 이정오입니다.”
바통을 넘겨받은 정오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손으로는 배를 감싸며.
이를 유심히 본 클라이언트의 임원이 목소리를 냈다.
“혹시, 실례지만 지금…….”
“네. 임신 5개월 차입니다.”
정오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며 배를 한껏 앞으로 내밀었다.
출산을 앞두고 있는 임신부라는 사실로 친근감을 이끌어내고자 꾀를 쓴 것이었다.
정오의 지략을 읽은 지헌은 본분을 잊고 웃음 지었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귀여워. 귀여워 죽겠다.
당장 손을 뻗어 아내의 뺨을 어루만지고 싶어서 손끝이 꼼지락댔다.
정오는 자연스럽게 발표를 시작했다.
“한 아이의 엄마로,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이번 유아유어스 캠페인 준비는 무엇보다도 제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핵심 타깃층의 입장에서 제품과 브랜드에 대해 깊이 연구해볼 수 있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접근으로 시작된 프레젠테이션은 정오의 차분한 목소리로 점점 범위가 확장되며 제품 홍보와 더불어 클라이언트의 자부심을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었다.
‘잘했어.’
자리에 앉는 정오에게 지헌이 눈빛으로 메시지를 건넸다. 준비과정에서는 누가 누가 잘하나 하며 티격태격했지만 역시 이 둘은 같은 편이었다.
매체 전략 발표까지 마친 후, 광고주의 질문이 이어졌다.
“튼튼하고 안전한 브랜드라는 콘셉트는 좋습니다. 하지만 10년을 써도 괜찮은 제품이라는 인식이 박히면 신상품 판매율은 점점 떨어지지 않을까요? 서로 물려주지, 새 걸 사려고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우리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 신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해야 할 텐데요.”
따끔한 질문 뒤에 클라이언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지헌을 바라보았다. 대회의실이 고요해졌다.
지헌이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유아유어스에서 매년 업그레이드 버전을 개발하고 효과적으로 광고전략을 짠다면 고객은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수많은 기업들이 브랜드 광고를 지속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내 아이에게 새것, 가장 좋은 것을 사주고 싶어 하는 부모의 마음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이 심리를 파고들면 10년 후에도 또 다른 10년을 기약하는 유아유어스의 광고는 소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리라 확신합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에 덧붙여 맥스기획의 캠페인 전략을 더욱 공고히 지지하는 지헌의 대답에 아이품의 임직원들은 다들 뜻밖이란 반응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정지헌의 활약에 놀란 것이다.
그냥 생색을 내기 위해 발표 준비만 한 줄 알았는데, 정말로 진지하게 준비했구나.
이 사실을 확인한 대표는 크게 흡족해했다.
“10년 후의 또 다른 10년…… 좋네요. 우리 브랜드가 10년 이상 지속된다면 또 다른 10년을 바라보는 광고를 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맥스기획과 함께하시죠.”
지헌의 농담과 같은 소망에 대표는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고맙습니다. 정지헌 본부장님.”
프레젠테이션은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두 시간 후, 이들의 노력은 감동의 결실을 볼 수 있었다.
“성공했습니다!”
클라이언트에게 연락을 받자마자 기획팀 팀장은 제작팀으로 달려와 크게 외쳤다.
와아아아!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했다. 인턴은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12월 31일. 한 해의 문을 닫는 가장 완벽한 마무리였다. 팀원들은 서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은주가 정오에게 말했다.
“이 대리님, 고생하셨어요.”
“고 대리님도요.”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이번 피티는 부부 콤비가 다 했죠.”
눈물을 닦은 보람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지헌에 대해 물었다.
“어떠셨어요? 이사님 발표 잘하셨어요?”
“잘했으니까 땄겠죠?”
은주가 담담하게 인정하며 웃어 보였다.
“솔직히 이사님이 그렇게 프레젠테이션을 잘하실 줄은 몰랐어요. 그 방대한 내용을 머릿속에 다 담아오셨을 줄도 몰랐고.”
은주의 소감에 정오는 숨을 죽이고 귀를 쫑긋 세웠다.
“생각해보니까 우리 이사님, 맡은 일은 항상 퍼펙트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대리님, 열람실에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좀 이따가 가려고요.”
더 해! 더 해주세요, 제발요.
남편 칭찬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요.
은주가 풀어놓는 이야기에 할 일을 잠시 미룬 정오의 눈동자가 영롱하게 빛났다.
“결혼도 성공하셨으니 본사로 발령나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본사로 가셨으면 엄청 능력자라는 걸 모를 뻔했네요. 우리 이사님. 그걸 왜 숨기셨대.”
우리 이사님. 후후후훗.
남편 칭찬을 은주의 목소리로 들으니 과장이 조금도 없는 사실 같았다.
남편아, 인정받았다, 인정!
정오의 어깨가 미묘하게 들썩거렸다.
맞아요. 내 남편은 시키면 잘해요. 생각보다 정말로 괜찮은 사람이라고요.
남편 칭찬을 배불리 들은 정오는 열람실에 가는 길에 지헌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 고은주 대리한테 오빠 칭찬 들었다. 기분 좋다♥
지헌에게도 금방 답문이 왔다.
- 나 일 잘한대?
- 응!
- 그럼 나 여기 계속 있어도 되지?
그 답신에 입가에 머금고 있던 상쾌한 미소가 씻겨나갔다.
‘그것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일했니?’
정지헌은 너무나 목표가 분명한 남자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