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외전] 아이들은 자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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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외전] 아이들은 자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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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외전] 아이들은 자란다 (1)
2022.12.24.
뿌듯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부부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간 일이 바빠 크게 신경 쓰지 못한 와중에도 아이는 쑥쑥 자라고 있었다. 아이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새로운 표현에 웃고 신기해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예나가 말했다.
“아빠. 나 이따 열두 시에 카운트다운 할 거야.”
“카운트다운이 뭔 줄 알아?”
“응! 10, 9, 8, 7, 하는 거.”
“그건 밤늦게 하는데. 예나는 아홉 시에 자야 하잖아.”
“오늘은 안 잘 거야.”
크리스마스이브에 이어 오늘도.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은 밤샘에 어떤 로망이 있는 듯했다.
“글쎄. 엄마가 허락할까?”
“아빠가 엄마한테 말해줘.”
“여보. 우리 딸이 열두 시에 잔다는데?”
지헌이 예나의 입장을 정오에게 전했다. 정오는 예상대로 탐탁지 않은 반응이었다.
“왜?”
“카운트다운 할 거야! 새해 땡 하면 엄마 아빠한테 세배할 거야!”
예나가 세배를 한대.
딸에게 세배를 받아본 적이 없는 지헌은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지헌의 상기된 표정을 알아본 정오도 예나에게 대안을 제시했다.
“그때까지 깨어 있으려면 힘들 텐데. 그럼 일단 자. 엄마가 깨워줄게.”
“응! 그럼 열두 시 되기 1분 전에 깨워줘. 아니, 5분 전에 깨워줘. 알았지?”
“그런데 예나는 자다가 못 일어나잖아. 엄마가 예나 간지럼 태워도 돼?”
“아니. 간지럼은 안 돼.”
“그럼 어떻게 깨워?”
“귀에다가 대고 소리쳐.”
“귀에 대고 소리쳐도 안 일어나면? 꼬집어도 돼?”
“응.”
“아프다고 울지 마.”
“응.”
엄마와 원만하게 타협을 본 예나는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하여 밤 열두 시 5분 전.
예나를 깨우는 중대한 역할은 아빠가 맡게 되었다.
“예나 공주, 일어나야지. 이제 열두 시 되기 5분 전이야.”
정지헌 씨, 분명히 예나가 귀에 대고 소리치라고 했는데.
그렇게 달콤하게 속삭이면 어디 예나가 일어나겠어?
역시나 예나는 미동도 없었고, 지헌은 두 번째 단계에 돌입했다.
오므린 집게손으로 예나의 물렁살에 다가가는 정지헌 씨.
“예나야. 정예나.”
정오의 입장에서는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게 꼬집는 거야? 그렇게 깨워서 애가 어떻게 일어나겠어.”
정오는 지헌을 밀어내고 예나의 앞에 앉았다.
퉁퉁퉁퉁.
“정예나, 일어나! 카운트다운 봐야지!”
“으으으으응…….”
정오가 교관 같은 목소리로 엉덩이를 쳐대니 그제야 예나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단번에 일어나진 못했다.
도저히 잠을 밀어낼 수가 없는 듯, 엉덩이만 천장으로 바짝 쳐들고 있는 모습은 세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심장을 녹일 만큼 사랑스러웠다.
*
같은 시각.
승규네 또한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박도빈, 카운트다운이다!”
“흐어어어어.”
승규가 우렁차게 소리를 높이며 도빈을 흔들었건만 도빈은 앓는 소리만 낼 뿐 쉽게 일어나질 못했다.
“새해 되기 1분 전! 일어나라고! 네가 깨우라며!”
“엄마 아빠랑 이거 보기로 했잖아!”
“박도빈 일어나야지!”
“싫어어어어. 부르지 마아아아.”
승규와 진서가 합심하여 도빈을 깨웠지만 도빈은 잠결에 짜증만 낼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진서는 필살기를 쓰게 되었다.
“박도빈, 예나 왔다. 일어나.”
“응?”
그제야 도빈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사이에도 시간은 씩씩하게 흐르고.
십! 구! 팔! 칠! 육! 오! 사! 삼! 이! 일!
이윽고 새해가 밝았다.
“와! 새해다! 우리 아들 새해 복 많이 받아! 초등학교 입학하는 거 축하해!”
진서가 도빈을 끌어안으며 기쁘게 새해 인사를 전했건만, 아들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예나는?”
“……자라.”
새해를 패배로 시작한 기분.
한편으로는 걱정이 밀려왔다.
이 녀석도 나이가 찼으니 학교를 보내긴 해야 할 텐데, 과연 학교생활은 잘할 수 있을지…….
진서는 시름과 함께 새해를 맞이했다.
***
세상은 춥지만 집 안은 따뜻한, 짧은 겨울 끝에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졸업했다.
어린이집과 거리가 있는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어 몇 년간 사귄 친구들과 헤어지게 된 예나는 졸업식을 마치고서도 폭폭 눈물을 쏟았다. 도빈이 그런 예나를 위로해주었다.
“예나야. 울지 마.”
“너는 초등학교 가서도 친구들 계속 만날 수 있잖아.”
“아니야. 나 친구 없어. 나 걔네들하고 안 친해.”
“…….”
“나는 너하고 제일 친해.”
“그래도 너랑 다른 반 될 수도 있잖아.”
예나와 도빈이 입학하는 학교는 매년 100명 정도의 아이들이 입학한다. 네 반 정도가 새로 생겨나니 예나와 도빈이 같은 반이 될 확률은 25%였다.
그때부터 도빈 또한 몸이 달기 시작했다.
“엄마, 발표 났어?”
도빈은 하루가 멀다 하고 진서를 들볶았다.
1학년 반 편성은 2월 마지막 주, 학교 홈페이지에 공지가 뜬다. 도빈만큼이나 진서 또한 반 편성이 궁금하기에 아들이 물어올 때마다 매번 학교 홈페이지를 방문했다.
임신 9개월 차에 이른 진서는 어느덧 몸이 무거워졌다. 둘째를 가졌을 때도 배가 빨리 불러온다 싶었는데 셋째는 더욱 빨리 배가 커져서 이제는 출산 예정일을 훌쩍 넘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거동도 불편했다. 도빈이 닦달을 할 때마다 컴퓨터 앞에 앉는 그 간단한 일이 조금 버거웠다.
“엄마, 발표 났어?”
“박도빈. 30분 전에도 확인했잖아.”
“그사이에 발표 났을 수도 있잖아.”
후우우.
한숨은 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진서는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 발표 났다!”
정말로 30분 사이에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공지가 떴다. 진서는 반 편성 공지를 세 번째로 확인하는 학부모가 되었다. 공지에 붙은 첨부문서를 다운받아 열어보니 몇 페이지에 달하여 아이들의 이름이 정리되어 있었다.
“이게 뭐야?”
도빈은 문서를 확인하고는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아이들의 이름은 가운데 자가 개인 정보처리되어 있어서 도빈의 이름은 박○빈이라고 나와 있었다.
“도빈이는 1반.”
진서는 친절하게 도빈의 이름을 짚어주며 말했다.
“우와! 나 1이야? 이게 박도빈이라는 뜻이야?”
“그래.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확인한 진서는 바로 눈동자를 옮겼다. 예나의 이름도 가까이서 보였다.
“우리 도빈이 좋겠네.”
“왜?”
“예나랑 둘 다 1반이야.”
“어디? 어디 나와 있어?”
모니터 앞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고개를 움직이는 아들에게 진서는 예나의 이름을 짚어 보여주었다.
- 정○나, 보호자 정○헌
가운데 글자를 가린 예나와 지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진서는 잠시 지헌을 생각했다. 예나 아빠, 가슴이 뭉클하겠네.
“이게 예나야?”
“그래. 가운데 글자를 가린 거야. 그 옆에 예나 아빠 이름도 있으니까 예나도 1반이 확실해.”
“예나도 1, 나도 1?”
“그래.”
“와아아아아! 1등이다아아아!”
도빈은 두 팔을 번쩍 들고서 우렁차게 외치며 마구 뛰었다.
아니아니, 아들아. 1등이 아니라 1반이라고…….
어쨌든 긍정적인 아이라 다행이긴 한데, 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것을 초등학교에 풀어놓을 생각을 하니 진서는 자꾸만 시름이 깊어졌다.
*
오후가 되어 학원에 갈 시간이 되었다.
작년부터 미술학원도 다니기 시작한 예나는 추상화를 더 잘 그리게 되었다. 인물화를 그리는 시간에도 어쩐지 예나만 추상화를 그리는 것 같았지만 정오는 길게 내다보기로 했다.
지헌도 그림을 엄청 못 그렸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상을 받은 적도 있다고, 시어머니 영미에게 들은 이야기를 되새기며.
“예나야, 얼른 가자. 도빈이네랑 만나기로 했어.”
“응. 근데 엄마, 새봄이 언니한테 문자 왔어.”
예나가 한 자리에 서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래? 뭐라는데?”
“새봄이 언니도 우리 아파트로 이사 왔대.”
“정말?”
예나가 휴대폰을 건넸다. 휴대폰에는 작년 바둑대회에서 만난 2학년 아이, 새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예나야 안녕! 너 ○○아파트에 산다고 했지? 나 오늘 여기로 이사 왔어!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정오는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2월 이사 철이라 이삿짐 차들이 몇 개 보였다. 오늘 이사 왔다고 하니 그중 하나는 새봄의 집일 터였다.
“이따가 가 봐야겠다!”
정오도 새삼 마음이 설렜다. 이따금 예나가 새봄의 이야기를 할 때는 입가에 함박 웃음꽃이 피었다. 새봄도, 새봄의 엄마도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인사를 나누고 싶었는데 이렇게 인연이 이어진 것이다.
정오는 들뜬 마음으로 예나와 함께 집을 나섰다.
“예나야아아!”
어느새 예나네 아파트단지까지 찾아온 도빈이 예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기쁘게 달려왔다. 진서가 몸이 무거우니 도빈네 집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도빈이네가 좀 더 일찍 나온 모양이었다.
“박도빈!”
“예나야, 우리 같은 반이야!”
아이들은 만나자마자 손을 맞잡고서 한참 강강술래를 했다. 예나도 도빈과 같은 반이 되어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아이들의 요란스러운 재회를 지켜보며, 정오가 진서에게 인사를 건넸다.
“언니, 제가 늦게 나왔네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도빈이가 반 편성 발표 나고서 들떠가지고…… 빨리 예나한테 가자고 노래노래를 해서 일찍 나왔어요. 근데 여기는 이삿짐 차가 많네요?”
“그러게요. 오늘 이사를 많이 하네요.”
정오와 진서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예나의 휴대폰이 울렸다. 새봄이었다.
“여보세요.”
예나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대답이 들려온 곳은 휴대폰 밖이었다.
“예나야!”
멀지 않은 곳에서 새봄이 달려오며 예나의 이름을 불렀다. 예나도 새봄을 보며 외쳤다.
“어? 새봄이 언니다! 언니!”
봄에 피어날 벚꽃처럼 환하게 웃음 짓고 있던 도빈의 얼굴이 멈칫 굳었다.
“나 저쪽에서 너 알아봤어!”
다가온 새봄이 언니라는 사람. 그 사람의 옆에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새봄아, 안녕. 아줌마는 예나 엄마야.”
“안녕하세요. 저는 강새봄이고요, 얘는 제 동생 강새별이에요.”
“어? 강새별!”
예나는 금방 새별을 알아보았다. 새별 또한 바둑대회에서 만난 적 있는 친구였다. 작년 8월, 예나가 처음 나간 바둑대회의 첫 상대가 새별이었다.
“안녕, 예나야.”
새별은 예나가 자신을 알아보아 기쁜 표정으로 다소곳이 인사했다.
정오가 물었다.
“예나랑 새별이도 아는 사이야?”
“응! 바둑대회에서 만났어.”
예나의 대답에 도빈의 눈동자에선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런 도빈의 불안함도 모르고서, 예나는 새별에게 물었다.
“그럼 너도 ○○초등학교 다니는 거야?”
“응. 너는 몇 반이야?”
“나 1반. 너는?”
“와아! 나도 1반인데!”
좀 전까지만 해도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던 새별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도빈의 얼굴에서 만개하고 있던 벚꽃을 빼앗아간 것 같았다.
“강새별, 이사 오자마자 친구 생겼네.”
새봄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동생을 툭 치며 말했다.
도빈은 조금도 웃을 수 없었다.
초등학생이 된다는, 예나와 같은 학교 같은 반이 되었다는 기쁨에 겨워서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초등학생이 된다는 건, 세상이 넓어진다는 것.
나뿐 아니라 예나의 세상 또한 넓어진다는 것.
그리고…… 라이벌이 생긴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