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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외전] 아이들은 자란다 (2) (174/183)


174. [외전] 아이들은 자란다 (2)
2022.12.28.


도빈은 굴러온 돌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을 위로 치뜨게 되었다.

맙소사. 강새별인지 헌별인지 하는 녀석이 자신보다 손가락 두 마디는 더 큰 것 같았다.

얘는 뭘 먹어서 이렇게 크지?

어두워진 도빈의 안색에는 누구 하나 주목하지 않았다.

새봄이 예나에게 물었다.


“너 지금 어디 가?”

“학원 가.”

“아, 너 바둑학원 다니지! 우리도 너 다니는 학원으로 옮기면 되겠다!”

“바둑학원 옮겨야 하는구나! 그래! 다 같이 다니면 좋겠다!”

두 아이의 대화를 들은 정오가 반갑게 말했다.

도빈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둘 다 바둑 배우는 거야? 잘됐다. 우리 도빈이도 같은 바둑학원 다니는데 다 같이 친하게 지낼 수 있겠네.”

믿었던 엄마마저!

엄마 진서마저 굴러온 돌들을 환영하자 도빈은 심장이 죄여드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더니!


 

*

제각각의 걱정과 근심 속에서 시간은 흘러가고, 어느덧 아이들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도빈은 이제 입학식이 그다지 설레지 않았다.

굴러온 돌 강새봄 강새별 남매는 어제 기어이 바둑학원에 등록했다. 새별은 예나를 따라 미술학원에도 등록하고 싶다고 제 엄마를 졸랐다. 도빈이 눈에 무섭게 힘을 주고서 새별을 노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예나야, 괜찮겠어? 내 동생 그림 진짜 못 그려.”

새봄의 걱정에 예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나도 못 그려. 괜찮아.”

그림을 못 그리기까지!

바둑을 좋아하고, 그림을 못 그리고. 정예나와 강새별은 비슷한 점이 너무 많았다. 그에 비해 나는 예나를 좋아하고, 예나를 좋아하고, 예나를 좋아하고…….

가슴에 정예나 하나밖에 없는 여덟 살 인생엔 시름이 가득했다. 언젠가 새별이 미술학원까지 침입할 거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진서는 다른 걱정에 도빈의 마음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애가 언제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지.”

아직 예정일까지는 꽤 남았지만 배가 큰 편이었다. 마른 체형에 배만 불쑥 나와 더욱 위태롭게 보였다. 담당 의사의 스케줄에 따라 금요일에 유도분만을 잡아놓았지만 그전에 나온다 해도 놀랍지는 않을 터였다.


“나오더라도 제발 내일은 지나고 나와줬으면 좋겠네. 입학식은 무사히 지나갔으면.”

승규가 걱정하는 아내를 다독였다.


“입학식 안 가도 돼. 예나 엄마도 있잖아.”

하지만 승규의 권유는 진서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안 돼. 도빈이 첫 등교인데 학교 갔다 오는 건 제대로 지켜봐야지. 이 말썽쟁이를 어떻게 예나 엄마한테 맡겨. 예나 엄마도 몸이 무거운데.”

“너무 부담 갖지는 말라는 거야. 지켜보지 않으면 뭐 어때.”

“내가 지켜보지 못하는 사이에 일 저지를 수도 있잖아.”

“에이. 설마.”

“설마라고 할 게 아니라니까?”

그사이에 냉장고 문을 연 도빈은 우유를 컵에 따라 한 모금 마시고는 그대로 내려놓았다.


“손 가는 데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애 하나 사람 만드는 건 쉬운 게 아니라고. 아직 가르칠 게 얼마나 많은데.”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서가 쓰게 한숨을 내쉬며 도빈이 내려놓은 컵을 들어 올렸다. 우유컵이 놓여 있던 곳의 동그란 우유 자국을 행주로 닦는 손길이 매서웠다.


“컵에 우유 따르는 것까지, 우유컵 내려놓는 것까지 몇 번을 가르쳐야 한다고. 한 번으로는 못 알아먹으니까! 박도빈! 우유 먹고 나서 어떻게 하라고 그랬어!”

진서는 멀어지는 도빈을 향해 소리를 높였다.


“너는 한 살을 더 먹은 지가 언젠데 바뀌는 게 없어. 내일이면 초등학교 들어가는 애가!”

“엄마도 바뀌는 거 없잖아! 한 살 더 먹은 지가 언젠데!”

몇 번을 말해도 고치지 못하는 습관에 목소리가 높아졌을 뿐인데. 아이는 배우라는 건 안 배우고 덩달아 소리 높이는 것만 배웠다. 게다가 머리가 커지니 말대꾸는 얼마나 잘하는지. 엄마 몰래 말대꾸 학원이라도 다니는 것 같았다.

풉.

그사이에 남편은 몰래 웃고 있고.


“당신 지금 웃었어?”

“어……? 아니.”

“내가 화를 내는데 웃었어?”

“아니야. 아니야.”

승규는 노련하게 도빈의 방으로 슬금슬금 몸을 옮겼다.


“아들.”

승규는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는 아들 옆으로 가 나란히 누웠다. 오늘따라 어쩐지 도빈도 신경이 날카로운 것 같았다.

인생의 무대가 달라지니 싱숭생숭한 마음인 건가 싶어 가만히 아들을 다독이는 승규에게 도빈이 넌지시 푸념했다.


“아빠, 세월은 참 빨리 간다.”

“응?”

“도빈이 키는 안 크는데 세월은 빨리 간다.”

“…….”

“세월이 부러워.”

……우리 아들은 벌써 사춘긴가?

갑작스럽게 센티해진 아들의 넋두리에 승규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

다음 날. 아이들의 초등학교 입학일이 되었다.

정오, 진서, 국순과 더불어, 첫 아이를 학교에 보내게 된 아빠들, 지헌과 승규도 등굣길을 함께 했다.


“박도빈!”

침울하게 집에서 나온 도빈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예나의 목소리에 금방 표정이 밝아졌다. 두 아이는 손을 잡고 사이좋게 학교로 향했다.

강당은 1학년 아이들과 학부모들로 시끌벅적했다. 이윽고 반별로 앉으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이들은 마련된 의자에 줄지어 앉았다.

예나와 도빈도 1반 팻말 앞에 나란히 앉았다.


“예나야. 도빈아.”

같은 1반이 된 새별이 뒤에서 말을 걸었다.


“새별아, 안녕!”

예나가 활짝 웃으며 인사하는 것을 보고 도빈은 또 침울해졌다.

아이의 세상이 넓어졌다.

오늘은 정오에게도 벅찬 감격의 날이었다.

품에 안아 내내 어르고 달래도 도통 울음을 그치질 않던 아기가 어느새 커서 뛰어다니고 말을 하고 친구를 사귀더니, 어느덧 학생이 되었다. 아이 덕에 엄마와 아빠 또한 학부모가 되었다.

이제 아이는 점점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엄마는, 언젠가 환호하고 축하했던 모든 것들로 인해 외로워질 때가 올 것이다.

‘우리 예나가 혼자서 이런 것도 했네!’ 하며 대견해하다가도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는 먼 곳까지 가버린 아이를 보며 어딘가 모르게 서운해질 것이다. 벌써부터 그런 감정을 느낄 필요는 없는데, 자꾸 그날을 상상해보게 되는 정오였다.

정오는 눈물이 핑 도는 눈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지헌 또한 코끝이 붉어져 있었다. 남편에게도 가슴 뭉클한 감격의 순간일 것이다. 아이의 모든 날들을 지켜보지 못했으니 더욱 애틋하겠지.

모든 여덟 살 아이에게 찾아오는 보통의 날. 또한 너무나 특별한 날.

하지만 마냥 이 기분을 누릴 여유가 없는 엄마가 한 명 있었다.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오늘도 모호한 진통에 진서는 시름만 깊어졌다. 이제 출산은 세 번째인데도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지금은 어떻게든 견뎌야 했다. 1학년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입학식에 소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강당에서 입학식을 마치고 교실로 갔다. 아이들을 교실로 보낸 엄마 아빠는 학부모회 관련 자료를 받고 학교를 떠났다. 탈 없이 입학식을 지켜본 진서도 승규를 회사에 보내고 집으로 갔다.

문제는 아이들의 귀가시간 즈음 일어났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학교를 찾은 진서는 갑작스러운 산통을 느꼈다.


“언니, 괜찮으세요?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요.”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마중 나온 정오가 진서의 안색을 살피고는 물었다. 진서는 그 물음에 대답도 하기 힘들 만큼 몸이 버거웠다.


“도빈이 엄마! 괜찮아요?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며칠 전에 사귄 새별의 엄마도 쫓아와 진서를 부축했다. 진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지헌도 승규도 회사에 있어서 진서를 병원으로 데려다줄 수가 없었다. 정오 또한 몸이 무거워 진서를 책임지기에는 힘들 터였다. 지금 승규에게 연락을 해도 회사에서 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니 새별모가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예나 엄마, 도빈이랑 새별이 좀 챙겨줄 수 있어요? 내가 도빈이 엄마 데리고 병원에 갈게요.”

새별모의 빠른 판단에 우왕좌왕하던 상황은 바로 정리가 되었다. 정오는 승규에게 연락했고, 진서와 새별모는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

10여 분 후, 수업을 마친 1학년 아이들이 뛰어나왔다.


“예나야, 도빈아, 새별아! 여기야!”

정오가 아이들을 향해 손짓했다.


“엄마아!”

예나가 정오를 발견하고서 달려왔다. 도빈과 새별은 예상했던 대로 기다려주는 엄마가 없어 울상이 되었다. 도빈이 먼저 물었다.


“아줌마, 우리 엄마는요?”

“병원 가셨어. 새별이네 엄마는 도빈이 엄마 데리고 같이 가신 거고.”

“왜요? 엄마 아파요?”

“아기가 태어날 때가 됐나 봐. 시골에서 할머니도 오신다니까 할머니 오시면 집으로 가면 돼.”

“…….”

“새별이 엄마는 도빈이네 엄마 병원에 바래다주고 바로 오실 거야.”

새별이 엄마도 돌아오는데 우리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에 겁을 먹은 도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괜찮아, 도빈아. 엄마 괜찮아. 걱정하지 마.”

정오가 그런 도빈을 꼭 안아 위로해 주었다.

정오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예나의 집에 처음 와보는 새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나 이렇게 넓은 집에 처음 와봐!”

“응! 그리고 2층도 있어.”

예나가 신이 나는 얼굴로 새별에게 집구경을 시켜주었다. 새별과 예나가 신나게 집 안을 뛰어다니는 동안에도 도빈은 시무룩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두 사람을 쫓아갔는데, 이번에는 대뜸 예나가 바둑판을 꺼냈다.


“우리 바둑 둘까?”

“그래!”

새별도 환호했지만 도빈은 그럴 수 없었다.


“싫어. 알까기 해.”

“그럼 바둑도 두고 알까기도 하자.”

예나가 도빈을 회유하려 했지만 도빈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나는 바둑 못 하잖아. 알까기 해.”

“그래. 알까기 하자.”

새별이 먼저 나섰다. 결국 아이들은 알까기를 하게 되었다.

예나와 도빈의 시합은 무승부.

예나와 새별의 시합은 새별의 승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빈과 새별의 시합. 새별이 도빈의 바둑알 다섯 개를 모두 밀어내고 가뿐히 승리하니 예나가 놀란 눈으로 우러러 새별을 보았다.


“와! 너 알까기 되게 잘한다!”

“다시 해.”

패배를 인정할 수 없는 도빈이 새별에게 다시 결투를 신청했지만, 알까기가 재미없어진 예나는 다른 놀이를 하자고 말했다.


“알까기는 한 번씩 했으니까 이제 소꿉놀이하자. 나 엄마!”

“나 아빠!”

새별이 예나의 요청에 응하며 재빨리 ‘아빠’를 외쳤다.

도빈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었다. 강새별 저 녀석이 나의 아빠 자리까지 위협하다니!


“네가 왜 아빠야. 내가 아빠 할 거야. 넌 애기 해.”

“싫어. 내가 먼저 아빠 한다고 했잖아.”

도빈이 따지니 새별이 질 수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예나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다른 놀이를 제안했다.


“우리 소꿉놀이하지 말고 그림 그리자!”

“그래! 그림 그리자!”

이번에도 새별은 예나의 제안을 바로 수긍했다. 그리하여 세 아이들은 함께 모여앉아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도빈이 욕심을 부렸다. 새별이 쓰려고 하는 색깔의 크레파스를 계속 날름날름 가져갔다. 어느새 도빈의 옆에만 크레파스가 그득 쌓였다.

다시 예나가 저지에 나섰다.


“박도빈, 크레파스 다 가져가지 마.”

“이건 내가 먼저 쓸 거야.”

“이건 내 거잖아. 다 같이 사이좋게 써야지.”

하지만 도빈은 색깔 몇 개만 돌려주었다. 새별에게 당장 필요한 하늘색 크레파스는 손에 꼭 쥐고서 절대 주지 않았다.

도빈이 자신의 크레파스에 욕심을 부리자 예나도 성이 났다.


“사이좋게 쓰기 싫으면 너도 집에 가서 네 크레파스 가져와.”

그 말에 도빈은 울컥 서러워졌다.

정예나. 나는 너밖에 없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도빈의 콧구멍에서 성난 기운이 쒸익쒸익 빠져나갔다.


“넌 예쁘면 다냐?”

도빈이 처음으로 예나에게 화를 낸 순간이었다.

예나 또한 도빈의 반응에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예나가 울멍울멍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예쁘고 싶어서 예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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