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외전]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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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외전]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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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외전]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란다 (1)
2023.01.07.
1학년 1반의 종례시간.
“다들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오늘 만든 편지랑 카네이션 부모님께 드리는 거야. 알겠지?”
“네!”
“그리고 엄마 아빠 말씀도 잘 들어야 한다.”
“네에!”
선생님의 당부에 아이들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예나도 수업시간에 만든 편지와 카네이션을 교과서에 끼워 가방에 고이 넣었다. 카네이션을 받은 엄마 아빠가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하니 몹시 설렜다.
“다녀왔습니다!”
“왔어? 우리 강아지.”
밝은 얼굴로 집에 돌아온 예나는 집 안의 조용한 분위기에 멈칫했다. 예나의 인사를 받아준 사람은 할머니뿐이었다. 엄마가 없었다.
“할머니, 엄마는?”
“예나 동생 낳으러 병원 갔지.”
“왜 벌써 갔어? 다음 주에 나온다고 했잖아.”
“아기가 언제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우리 예나도 한 달이나 일찍 나왔는걸.”
“왜?”
“글쎄. 빨리 엄마 얼굴이 보고 싶었나 보지?”
할머니가 빙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예나는 할머니처럼 웃을 수 없었다.
“그럼 애기 나왔어?”
“아직 안 나왔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럼 저녁때 나온대?”
“아직 모르지. 그것보다 빨리 나올 수도 있고, 훨씬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고.”
할머니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예나는 초조해졌다.
학원을 다녀와 저녁식사를 하고, 뒹굴거리며 놀다가 TV를 보면서도 예나는 이따금 시무룩해졌다.
“할머니, 엄마랑 아빠 왜 안 와?”
“아직 애기도 안 나왔다는데.”
“심쿵이 왜 그렇게 안 나와?”
“그러게 말이다.”
“그럼 오늘 엄마 아빠 안 와?”
“며칠은 병원에 있을 거야. 아기를 낳으려면 엄마가 힘드니까 병원에서 며칠 치료를 받아야 해.”
지난 4월, 정오가 당분간 회사를 쉰다고 하여 예나는 너무나 기뻤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간 도빈이네, 새별이네를 부러워했던 예나였다. 엄마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반겨주고, 자신과 온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것이 신기하고 꿈만 같았다.
그동안 너무 행복했기에 언젠가 동생이 태어날 거란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동생의 방을 꾸미고, 동생이 태어나길 내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사실 그 어떤 것도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예나는 침울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럼 아빠는?”
“아빠는 엄마를 돌봐줘야지.”
“그럼 예나는?”
“우리 강아지는 할머니가 돌봐주면 되지.”
나도 할머니가 돌봐주는 것보다 아빠가 돌봐주는 게 좋은데.
예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돌아섰다.
한 시간 후, 기다리다 지친 예나가 혼자 잠옷을 갈아입고 와서 울먹이며 물었다.
“나 이제 자야 하는데, 왜 엄마는 전화도 안 해?”
“애기가 아직 안 나왔잖아.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전화할 기운이 없을 거야.”
“그럼 아빠는? 아빠는 안 힘들잖아.”
“아빠도 힘든 엄마를 돌봐주느라 바쁘지.”
예나의 두 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아빠마저 자신을 잊을 줄은 몰랐다는 듯이 상처받은 표정에 국순은 애틋해졌다.
“오늘은 할머니랑 같이 자자. 할머니가 안아줄게.”
예나의 손을 잡고 방으로 간 국순은 바닥에 이부자리를 폈다.
할머니의 품에 안겨 자리에 누운 예나가 한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할머니, 나는 심쿵이 나오면 혼내줄 거야.”
“동생을 왜 혼내려고.”
“엄마를 너무 힘들게 하잖아. 내일이 어버이날인데.”
“…….”
“선생님이 내일 아침에 엄마, 아빠한테 카네이션 달아주라고 했단 말이야. 근데 심쿵이 때문에 내일 아침에 엄마 아빠를 볼 수가 없잖아.”
내일은 예나에게도 중요한 날이구나.
7년 동안 아빠가 없었던 예나가 부모님과 함께 맞는 첫 어버이날.
사랑받는 아이는 받는 것만큼이나 주는 것도 특별하게 생각한다. 자신이 만든 꽃을 보고 기뻐하는 엄마 아빠의 얼굴을 계속 떠올려보았을 텐데, 기대를 버려야 하는 마음이 얼마나 속상할까 싶어 국순은 예나를 더 꼭 안아주었다.
*
다음 날 아침.
새벽 내내 울어대던 셋째 도희를 아침이 다 되어서야 겨우겨우 재우고 주방으로 나온 진서는 조리대 앞의 끈적한 기운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미처 버리지 못한 물티슈 뭉치. 쓰레기통에는 요구르트 빈 병 한 개.
범인은 너무나 뻔했다. 어설프게 완전범죄를 꿈꾸다가 더욱 골치 아프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박도빈! 이리와!”
진서는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도빈을 향해 외쳤다. 도희가 깰까 싶어 소리를 크게 지를 수는 없었다.
엄마한테 혼날 것이 걱정되지도 않는지, 도빈이 해맑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왜 아침도 안 먹고 요구르트를 먹어. 그러고 여기 왜 쏟아, 왜.”
“엄마가 요구르트를 사 놨으니까.”
엄마가 요구르트를 사 놓지 않았으면 내가 거기 요구르트를 쏟지도 않지.
“어후. 내가 널 어떻게 이기겠니.”
포기해버린 진서가 끈적해진 바닥을 닦으려 걸레를 집어 들었을 때 도빈이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진서가 뚱하니 눈썹을 씰룩거리며 물었다.
“이게 뭐야.”
“편지! 내가 썼어!”
“편지를 썼다고? 박도빈이?”
“응!”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진서는 시큰둥하게 편지를 펼쳐 보았다.
- 어머니, 저를 나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다음번엔 남자 동생을 나아주세요. 그럼 고맙습니다. 아버지, 돈을 벌어 주시고 나랑 놀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버이날 축하드려
어버이날 축하드려. 편지는 여기서 어정쩡하게 끝이 났다.
‘요’ 자 하나 더 쓰는 게 그렇게 힘들었단 말이냐, 아들.
제대로 마무리도 짓지 못한 편지를 자랑스럽게 내민 아이가 우스워서 진서는 웃음이 픽 나왔다. 사실 감격스럽기도 했다.
이제 나도 어버이날이라고 축하를 다 받는구나.
학교에 가서 적응은 잘하려나, 맨날 사고만 치지 않으려나, 엄마를 노심초사하게 만들었던 아들은 놀랍게도 조금씩 성장해가고 있었다.
여전히 요구르트를 몰래 먹다가 주방에 쏟고 뒤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말썽쟁이지만, 그래도 보통의 여덟 살답게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라주고 있었다.
“박도빈, 너 또 무슨 사고 쳤어.”
감정이 드러나는 진서의 표정을 알아본 승규가 다가오며 물었다.
그 말에 대답은 않고 방에 후다닥 다녀온 도빈이 이번에는 종이꽃을 내밀었다.
“아빠, 이거!”
대통령 훈장같이 생긴 새빨간 종이꽃. 승규는 보는 순간 흠칫했다.
“카네이션. 내가 만들었어. 빨리 여기다 달아.”
도빈이 승규의 왼쪽 가슴을 가리키며 재촉했다.
“……그래. 고맙다, 우리 아들.”
“빨리 달아.”
“자. 됐지?”
승규가 종이꽃 뒤쪽에 붙은 옷핀으로 셔츠 왼쪽 가슴에 꽃을 달고서 도빈에게 보여주었다.
“아, 아니야, 아니야.”
도빈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승규가 거실 소파위에 올려둔 슈트 재킷을 가져왔다.
“여기다 달아야 해.”
승규는 군소리 없이 종이꽃을 재킷에 달았다.
“아빠, 회사에서도 계속 달고 있어야 해. 내가 이따가 영상통화 할 거야. 알았지?”
“……그래.”
선물이라는 이름의 벌칙.
승규는 오랜만에 아버지 생각이 났다. 승규도 어렸을 때 이렇게 카네이션 종이꽃을 만들었었다. 그리고 어버이날 아침에 아버지의 가슴에 꽃을 달아드렸다.
아버지는 기뻐하며 꽃을 달고 출근을 하셨다. 하지만 퇴근길에는 꽃이 없었다. 그게 내심 서운했었는데…… 이제 아버지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은 경험해본 만큼만 알 수 있다.
*
“예나야!”
학교에 일찍 도착한 도빈은 예나가 오자마자 곧장 달려갔다.
“엄마 아빠한테 꽃 달아줬어?”
예나는 어쩐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니. 어제 엄마랑 아빠 집에 안 들어왔어.”
“왜?”
“동생 낳으러 가서.”
“아, 그럼 오늘도 집에 못 오겠네?”
지난 3월에 동생 맞이를 겪어본 도빈은 곧장 이해했다.
“애기 태어났어?”
“응. 어제.”
“그럼 병원 갔다왔어?”
“아니. 이따가 학교 끝나고 오래.”
“왜? 나는 내 동생 태어난 날 보러 갔는데.”
“학교는 꼭 가야 한대.”
예나의 두 눈에 물기가 돋아났다. 많이 슬퍼하는 것 같아서 도빈은 화제의 방향을 슬쩍 틀었다.
“동생 생긴 거 축하해. 동생 예쁘겠다.”
“아니. 하나도 안 예뻐. 너도 볼래?”
눈가의 물기를 닦은 예나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었다. 초록색 강보에 번데기처럼 싸인 아기의 모습. 아침에 아빠에게서 받은 사진이었다.
도빈이 사진을 눈여겨보는 동안 예나가 물었다.
“뭐 생각나는 거 없어?”
“뭐가 생각나는데?”
“작년에 너네 할머니네 집 마당에서 본 배추 같잖아.”
동생을 절대 곱게 볼 수 없는 예나가 심술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가?”
“그래. 그래서 할머니보고 이름은 배추라고 지으라고 했어.”
“배추? 그럼 정배추?”
“응.”
“웃기다 정배추.”
도빈이 킥킥 웃었다. 도빈이 호응해주니 예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면 사람들이 네 동생 막 놀리겠다. 김치 먹을 때마다 계속 놀리겠다. 정배추 너는 김치 먹지 마! 하면서.”
하지만 더 나아가 도빈이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예측해주니 웃음이 쏙 들어갔다. 내가 동생을 놀리는 건 괜찮은데 다른 사람이 동생을 놀리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도빈이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내가 보기에는 배추보다 예쁜 거 같아.”
“…….”
“다시 한번 봐봐. 배추보단 예쁘지?”
“……쪼끔.”
“응. 그리고 나도 동생을 두 명 낳아보니까 알겠는데 몇 밤 자고 나면 더 예뻐져. 얘도 그럴 거야.”
낳아보니까?
도빈의 말은 조금은 이상했지만 어쩐지 예나는 도빈이 어느 때보다도 의젓하게 느껴졌다. 예나는 잠시 동생의 흉을 본 것을 반성했다. 더 이상은 심술부리지 않고 곧 더 예뻐질 동생을 환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예나는 국순과 함께 바로 병원을 찾았다.
예나는 여러모로 설렜다. 동생을 볼 생각에. 그리고 엄마와 아빠에게 꽃과 편지를 줄 생각에.
“예나 공주!”
병원 로비에 지헌이 나와 있었다.
“아빠아!”
예나는 지헌에게 달려가 안겼다. 예나를 번쩍 들어올린 지헌이 예나에게 물었다.
“예나 어제 아빠가 안 와서 서운했어?”
어젯밤, 예나가 잠든 후에 아기가 태어났다. 밤중에 국순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리니 국순이 예나가 많이 서운해하더라고 전해주었다.
“응. 아빠가 전화도 안 했잖아.”
“미안해. 엄마가 아파서 지켜보느라고 연락을 못 했어. 예나 이해해줄 수 있지?”
“응.”
예나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미안하다고 한다면, 당연히 이해해줄 수 있었다.
“애기는?”
“지금 방에 있어. 간호사 선생님이 방으로 데려다줬어.”
아빠의 대답에 예나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예나도 동생 안아볼 수 있을 거야.”
“정말? 내가 안아도 돼?”
“그럼. 조심조심해서 안으면 돼.”
동생이 엄마의 배 속에 있을 때 예나 또한 동생에게 말을 많이 걸었다. 심쿵아, 빨리 나와서 누나랑 놀자, 하며 많이 부추겼었는데, 드디어 동생을 직접 안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예나의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예나는 국순과 지헌의 팔을 잡아당겨 빠른 걸음으로 입원실에 닿았다. 엄마의 이름이 적힌 입원실 문 앞으로 다가가니 아기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예나는 함박웃음을 머금고 힘껏 문을 열었다.
“엄마아!”
“예나 공주 왔어?”
정오가 둘째를 달래는 와중에 고개를 들어 예나를 반겼다.
그러나 예나의 얼굴에 퍼져 있던 밝은 웃음은 쏙 들어갔다.
더 이상 심술부리지 않기로 다짐했건만, 엄마가 울고 있는 배추를 안고서 달래는 모습을 보니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엄마 빨리 애기 내려놔.”
예나의 음성에도 울음이 그렁그렁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