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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외전]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란다 (2) (178/183)


178. [외전]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란다 (2)
2023.01.11.


예나의 반응에 다들 멈칫했다.

그제야 정오는 문제를 파악했다.

동생이 생긴 첫째의 심정은 남편이 다른 여자를 데려왔을 때의 심정이라더라.

둘째를 낳기 전에 진서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게다가 오늘 아침에 국순에게 들은 말도 있었다. 엄마가 전화도 하지 않아 예나가 많이 속상해하더라고.

아기를 병실로 데려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예나에게 상처를 주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었는데, 아기가 빽빽 우는 순간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어. 그렇지. 그래. 내려놓을게.”

당황했던 정오는 재빨리 아기를 바구니에 다시 내려놓았다. 여전히 아기의 울음소리가 커서 조마조마했다. 지금 안아주어야 하는데, 그래야 울음을 그칠 것 같은데.

다행스럽게도 딸의 초조한 마음을 엄마가 읽어냈다. 국순이 대신 아기를 안아 들어 달래었다. 할머니의 품에 안겨 아기의 울음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굳어 있던 예나의 표정도 금세 풀렸다.


“예나 공주!”

잠시 당황했었던 정오가 두 팔 벌려 예나를 불렀다. 예나가 달려가 엄마에게 안겼다.


“어제 엄마가 연락 못 해서 미안해.”

엄마가 곧장 사과하자 예나도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괜찮아. 그리고 엄마, 이거 예나가 썼어.”

“이게 뭐야?”

“편지. 오늘이 어버이날이잖아.”

어버이날. 그 가슴 뛰는 말에 정오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정오는 편지를 펼쳐 보았다. 야무지게 눌러쓴 반듯한 글씨가 그녀를 눈물짓게 했다.

- 엄마, 사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빠, 예나의 아빠가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둘 다 사랑해요.


“엄마 그리고 이거 꽃!”

정오가 편지를 몇 번 더 읽어볼 새도 없이 예나가 종이꽃을 들이밀었다.


“예나가 만든 거야?”

“응! 어제 학교에서 만들었어. 빨리 여기다 달아.”

관심을 가져주니 예나의 눈이 생기를 되찾아 반짝거렸다.

다만, 종이꽃을 가슴에 다는 일은 망설여져서 정오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슴에 종이꽃을 달고서 아기를 안으면 종이꽃의 거친 선이 아기에게 생채기를 만들 것 같았다.

아무 생각 없는 지헌은 벌써 제 몫의 종이꽃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예나가 만들어준 것이니 마냥 좋다 하며.

그래. 예나를 실망시킬 수는 없지.

정오도 종이꽃을 가슴에 달았다.

엄마 아빠의 가슴에 달린 카네이션을 보며 예나는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동생에게도 사랑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 나도 애기 안아보고 싶어.”

“우리 강아지도 동생 안아볼래?”

반가운 반응에 국순이 예나를 자리에 앉혔다. 예나는 할머니가 안고 있던 아기를 건네받았다.


“애기는 아직 혼자서 목을 가누지 못하니까 이렇게 목을 받쳐야 해. 할 수 있지?”

국순의 주의 깊은 말과 행동에 예나 또한 조심스러워졌다. 혹시라도 놓칠까 봐 예나는 할머니가 만들어준 자세 그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


 


“동생 안아보니까 어때?”

지헌이 물었다.

대답은 한참 뒤에 돌아왔다.


“……따뜻해.”

“그리고?”

“재미있어.”

“뭐가 재미있어?”

“입술을 바보처럼 움직이는 게.”

옆으로 자꾸 고개를 돌리려 하며 입술을 실룩거리는 아기가 우스웠다.


“동생이 배가 고파서 먹을 걸 찾는 거야.”

지헌이 그 이유를 알려 주었다. 예나가 이해했다는 듯이 끄덕였다. 지헌은 그 기회를 틈타 예나에게 허락을 구했다.


“이제 애기가 엄마한테 가도 될까? 예나가 엄마한테 안겨줄 수 있어?”

“응.”

예나는 지헌의 도움을 받아 아기를 안고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제 품에 안겨 있던 동생이 엄마에게로 건너갔다. 엄마가 아기를 꼭 안아주는 모습에 또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느낌이었지만 처음의 충격보다는 마음이 괜찮아졌다.

*

정오는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기로 했다. 초등학생인 예나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곁에 꼭 붙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신생아 육아가 금방 시작되었다. 다만 의지는 좋았으나 현실은 이상과 너무나 달랐다.

으아아앙!

밤낮없이 깨어 있는 시간이면 빽빽 울어대는 둘째의 울음소리에 예나도 잠에서 깨어나 울먹거렸다.


“엄마아……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잖아아…….”

“우리 예나 깼어? 미안미안.”

정오가 아기를 안아 달래며 예나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예나는 더욱 서글프게 칭얼거렸다. 지헌이 예나의 손을 잡았다.


“아빠가 재워줄게, 가자.”

“싫어어.”

엄마가 재워달라는 뜻이었다.

둘째가 태어난 후 예나는 다시 어리광쟁이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정오는 우는 아기를 내려놓고 예나의 손을 잡았다.


“방으로 가자. 엄마가 재워줄게.”

두 아이 육아는 고되었다. 아이를 하나만 키울 때와 완전히 달랐다. 더군다나 첫째가 초등학생이라 이 모든 것을 제대로 기억할 터였다.

첫째를 서운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정오는 완벽해지려다 거듭 절망하게 되었다. 두 아이 모두에게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

진서네 집은 이보다 더 시끌벅적한 전쟁터였다.

다만 진서는 정오와 같은 고민을 오래전에 끝냈고 많은 부분을 포기했기에 정오보다는 마음이 느슨했다. 너무 느슨하게 풀어지다 보니 아이의 학교생활도 제때 체크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도빈의 온라인 알림장을 아침에야 살피게 된 진서가 재빨리 도빈을 불렀다.


“박도빈! 오늘 받아쓰기 시험 본다며. 왜 엄마한테 얘기 안 했어.”

온라인 알림장에는 지난주에 담임선생님이 미리 알려준 20개의 문장에서 10개를 뽑아 오늘 시험을 보겠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박도빈 인생의 첫 시험이었다.


“응? 그거?”

도빈은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이 설렁설렁 대답했다.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안 해도 돼.”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다 해봐야지!”

말이나 못 하면 몰라.

아침부터 아들 녀석 때문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목소리를 높인 후에는 금방 기운이 쑥 빠졌다.

나는 정말 성실했는데. 남편도 착실했다던데. 이 녀석은 대체 누굴 닮은 걸까. 이 녀석이 정말 내 아들이 맞나? 그간 접어두었던 생각이 다시 슬금슬금 머릿속을 기어 나왔다.


“박도빈, 머리카락 좀 뽑을까?”

“머리카락은 왜?”

정말로 친자 검사를 해볼까 하며 도빈의 머리에 손을 갖다댄 순간 가슴이 욱신거렸다.

만약에, 정말로 이 녀석이 내 아들이 아니라고 하면 어쩌지? 내 아들이 아니라 원래 집으로 보내야 한다면,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이 아이는 내가 키웠는데? 내 품에서 이만큼 자랐는데?

심각해진 진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도빈아. 도빈이가 아주 큰 병원에서 태어난 거 알지?”

“응.”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도빈이가 갓난아기였을 때, 그 병원에서 도빈이랑 다른 친구랑 바뀐 거라면 말이야.”

“…….”

“그러니까 지금 엄마 아빠는 도빈이의 진짜 엄마, 아빠가 아니고, 바뀐 거고 진짜 엄마 아빠가 따로 있는 거라면.”

“그럼 어디 있는데?”

“응?”

“내 진짜 엄마 아빠. 어디 살아?”

“아니. 진짜라는 게 아니고, 그냥 만약에 말이야.”

“그런 얘길 왜 해?”

“그러니까, 만약이라는 거지. 만약에 그렇다면, 도빈이는 진짜 엄마 아빠한테 갈 거야?”

“왔다 갔다 하면 안 돼?”

“……왜?”

“거기서 혼나면 이쪽으로 오고 여기서 혼나면 그쪽으로 가고.”

“…….”

“하나는 못 고르겠는데.”

엄마아, 나는 엄마 아들로 있고 싶어, 앞으로는 말 잘 들을게, 하며 매달릴 줄 알았건만 아들은 생각보다 현실적이고 이성적이었다. 도리어 진서가 충격을 받았다.

도빈은 약간 신이 난 듯했다.


“엄마, 나 이거 예나한테 말해도 돼?”

“뭘 말해?”

“나도 진짜 엄마 아빠가 있다고.”

“아니! 만약이라니까!”

가까이 다가온 승규가 두 사람의 대화에 웃음을 삼켰다.

괜히 심각해진 도빈은 골똘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승규에게 물었다.


“아빠, 나 엄마 배 속에서 나오는 거 아빠가 봤어?”

승규가 농담스럽게 대답했다.


“봤나, 못 봤나…… 기억이 안 나네…….”

“그럼 나 아빠 아들 아니야?”

“그러게. 마트에서 사 왔던가? 잘 기억이 안 나네.”

“얼마 주고?”

“한…… 십만 원이었던가?”

아이를 달래줄 생각은 하지 않고 한술 더 떠 부추기는 남편의 장난에 진서는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마저도 진지하게 받아들인 아들 녀석의 반응이 더 기가 막혔다.


“와! 그럼 나 백만 원에 팔면 되겠다! 그럼 좋겠지, 엄마.”

“널 왜 팔아!”

부자의 말장난에 진서는 아침부터 열이 불쑥 올라왔다.


“당신 아들이 맞아. 박승규 아들이 맞네.”

진서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

수업이 끝난 후, 언제나 그랬듯이 도빈은 예나에게 달려왔다.


“예나야. 집에 가자.”

그런데 예나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예나는 가방도 챙기지 않고 가만히 앉아 시무룩하게 말했다.


“집에 가기 싫어.”

“왜? 너도 받아쓰기 50점 맞았어?”

“아니. 엄마가 안 놀아줘서.”

“…….”

“우리 엄마는 예준이만 예뻐해.”

“아닐걸. 내가 동생 있어서 아는데, 너네 엄마가 예준이만 예뻐하는 게 아니고 예준이가 아직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니까 더 돌봐주는 거야.”

“아빠가 돌봐줘도 되고, 할머니가 돌봐줘도 되잖아.”

도빈이 위로해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아빠가 없었는데 예준이는 아빠가 있잖아. 그러니까 엄마는 계속 내 엄마만 해도 되잖아.”

아빠한테 내가 받지 못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데, 그럼 엄마는 조금 덜 사랑해줘도 되잖아.

눈물을 가득 품은 예나의 진심 어린 호소에 도빈도 먹먹해졌다.

아침에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가 자신에게 진짜 엄마 아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을 때, 사실은 조금 긴장했다.

당장 진짜 엄마 아빠한테 데려다주겠다고 할까 봐. 진짜 엄마 아빠에게 가는 것이 도리라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분들을 지금의 엄마 아빠만큼 사랑할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이거 비밀인데, 내가 너한테만 얘기해줄게.”

도빈이 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우리 엄마 아빠가 진짜 엄마 아빠가 아닐 수도 있다?”

“정말? 그거 어떻게 알았어?”

“엄마가 얘기해줬어.”

도빈의 고백에 예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너 어떻게 해? 너 진짜 엄마 아빠한테 가는 거야?”

“응. 그럴지도 몰라.”

울먹거리던 예나는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도빈이 떠날 수도 있단 사실에 슬퍼서 터트린 울음이었다.

도빈은 머쓱했다. 여자친구가 자신의 부재에 대하여 이토록 슬퍼해 주니 사연 있는 남자인 것이 조금은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예나를 계속 울릴 수는 없기에 금방 상황을 정리했다.


“아니 이건 너 울리려고 한 말이 아니야.”

“…….”

“너네 엄마는 정말로 널 사랑한다는 거야.”

도빈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예나는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닦았다.


“우리 엄마는 진짜도 아니면서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는데 너네 엄마는 진짜니까 널 얼마나 사랑하겠어. 안 그래?”

도빈의 논리는 너무 엉성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럴듯했다. 어쩌면 도빈의 처지가 더 측은하게 여겨져서 자신의 처지를 다행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너네 엄마가 지금 예준이한테 잘하는 건 나중에 예준이가 말을 잘 듣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도빈은 나아가 인생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예나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러니까 너도 꾹 참고 예준이한테 그냥 잘해줘. 잘해줘야 나중에 네 말을 들어.”

동생을 둘이나 둔 자의 여유였다.


“4년만 참으면 돼. 그럼 심부름 다 시킬 수 있어.”

“…….”

“네가 쓰다가 버리고 싶은 장난감 생기면 물려줄 수도 있어. 예준이 머리가지고 미용실 놀이도 할 수 있어.”

도빈은 정성스럽게 첫째의 베네핏을 읊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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