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외전]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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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외전]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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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외전]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란다 (3)
2023.01.14.
맥스기획 본부장 집무실.
거래처 미팅을 갔다가 점심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온 지헌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찾아온 승규가 이를 발견하곤 나지막한 목소리로 깨웠지만 지헌은 일어나지 않았다. 승규는 친구의 이런 모습이 처음이었다.
마치 꿈속에서도 아기를 어르고 있는 듯이 지헌의 한쪽 손이 느릿하게 꼼지락거리는 것을 보며 승규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짠하기도 해서 친구를 깨우는 것을 포기하고 소파에 앉았다.
낮잠은 길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턱을 괴고서 잠을 청했다가 팔에 힘이 풀린 지헌이 번쩍 눈을 떴다.
“깼어?”
승규의 물음에 지헌은 심각한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꿈이 현실의 연장이었다. 꿈속에서도 지헌은 예준을 안아 달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빠 말고 엄마가 좋단 말이야!’라고 칭얼거리는 예나…….
예준이 태어나기 전에 사람들에게 많은 조언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이론과 현실 육아는 차원이 달랐다. 무엇보다 도무지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아기는 밤낮없이 울어댔고 온종일을 안아주어야 했다.
지헌은 잠이 덜 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박승규.”
“어.”
“너 진짜 대단하다.”
“왜 갑자기?”
“그냥. 대단해 보이네. 널 정말 존경해.”
지헌의 체념 어린 목소리에 승규는 또 웃어버렸다.
이제 두 사람은 푸념을 늘어놓지 않아도, 고충을 털어놓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동지가 되었다.
*
1학년 1반 교실.
집에 가려던 새별이 예나가 우는 것을 보고 다가왔다. 도빈이 꽉 긴장했다.
“예나야, 울었어? 왜 울었어?”
도빈이 위로해주어 마음이 가라앉은 예나가 대답했다.
“엄마랑 동생 때문에.”
“엄마랑 동생이 왜?”
“엄마가 동생만 좋아해서.”
“…….”
“둘째는 좋겠다. 엄마가 맨날 옆에 있어 주잖아.”
예나의 의견에 또 다른 첫째, 도빈이 동조했다.
“그러게 말이야. 둘째는 참 좋겠어.”
“얘들아, 있잖아. 둘째도 힘들어.”
두 사람의 푸념에 새별이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누나한테 따지면 안 돼. 내가 누나 거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나는 누나한테 바둑알로 맞아.”
“그래? 새봄이 언니는 안 그럴 것 같은데. 천사 같잖아.”
“천사라니! 말도 안 돼! 누나는 괴물이야!”
“왜 누나가 괴물이야! 어떻게 그렇게 말해.”
새별이 제 누나가 괴물이라며 언성을 높이자 예나 또한 버럭 했다. 예준의 누나로서, 그리고 새봄을 좋아하는 동생으로서 발끈한 것이었다.
“맞아, 누나를 괴물이라고 하면 안 되지!”
이때다 싶은 도빈도 예나를 거들었다.
“어후, 진짜 괴물이라는 게 아니고 가끔 괴물이라는 거야. 너네는 몰라.”
누나와 함께 살아온 경력 8년 차인 새별이 첫째들은 둘째의 마음을 모른다는 듯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온 도빈이 진서에게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받아쓰기 잘했어?”
“응! 잘했어!”
도빈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50점짜리 받아쓰기 공책을 진서에게 보여주었다.
“공부도 안 했는데 반이나 맞았으니까 잘한 거지, 엄마?”
아들이 이미 잘했다는 결론을 내리고서 엄마에게 대답을 구하니 진서는 해줄 말이 없었다.
“그래……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잘했어, 아들.”
“응, 고마워. 그리고 엄마! 나 오늘 착한 일 했어.”
“무슨 일?”
받아쓰기 점수에 시무룩해졌던 진서가 도빈의 말에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들이 선행을 해서 선생님께 칭찬이라도 받은 건가 하여.
“예나가 동생 때문에 슬퍼하는 것 같아서 위로해줬어.”
그러나 역시나 이번에도 핵심은 예나였다. 진서는 김빠진 표정으로 영혼 없는 미소를 지었다.
“예나는 동생이 미운가 봐. 신기하지? 나는 안 그런데.”
아들아. 너는 네 동생을 밟고 다녔다.
누워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도윤의 팔을 꾹 밟고 지나가는 아들 녀석을 보고 아찔했던 적이 있었다. 가벼운 아이라 그나마 다행이었지,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아무튼 동생이랑 사이좋게 지내라고 예나 위로해줬어. 잘했지?”
그저 진서는 올챙이 적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개구리가 귀여웠다. 그때에 비하면 아들은 꽤 사람이 되긴 했다.
그래. 받아쓰기고 뭐고, 의젓하게 자라주니 엄마는 고맙구나.
“잘했어.”
“응. 엄마. 나 착한 일 했으니까 아이스크림 먹어도 되지?”
의젓한 아들은 참 당당하기도 했다.
*
예나는 씩씩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예나 왔어?”
예준을 재우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아 있던 정오가 부스스 일어났다. 예나의 기운찬 인사에도 정오의 표정은 어쩐지 활기가 없었다.
도빈에게 위로를 받아 마음이 많이 가뿐해졌는데, 집으로 돌아오니 다시 서러워졌다.
엄마가 예나공주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자신이 매일 공주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의식하고 나니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나는 공주에서 멀어지고, 새로운 왕자님이 내 자리를 차지하겠구나. 그 생각을 하니 울고 싶었다. 문득 다가올 시간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5월은 예나의 달. 예나의 생일이 있는 5월.
하지만 이제 예나는 이 축복받은 5월에도 시름을 안고 지내게 되었다. 예나의 생일보다 더 일찍 동생이 태어나 버려서 걱정스러워진 것이다.
엄마도 아빠도 동생을 돌보느라 이렇게 힘들고 바쁜데 내 생일을 축하해줄 시간이 있을까?
예나의 복잡한 속마음을 알지 못하는 정오가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우리 예나 수박 잘라줄까? 수박 먹을래?”
“응.”
힘없이 대답하고선 방으로 들어간 예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나와 몰래 엄마의 침실로 갔다.
예준이 아기침대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뺨을 톡톡 건드려 보아도 동생은 깨어나지 않았다. 더 괴롭히고도 싶었지만 새별이 했던 말이 생각나서 심하게 건드리지는 못했다. 동생에게 괴물로 불리면 싫을 것 같았다.
“예준아, 너는 왜 이렇게 엄마랑 누나를 힘들게 하니?”
엄마가 없는 틈을 타 예나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너는 왜 5월에 태어나서 누나의 생일을 방해하니?”
그래도 작년에는 생일 일주일 전부터 생일이라고 떠들고 다녔는데. 한 살을 더 먹어서인지 엄마 아빠에게 외면당할까 봐 불안해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일을 포기할 수도 없고…….
곰곰이 생각해보던 예나는 침실에서 나와 받아쓰기 공책을 들고서 정오에게로 갔다.
“엄마, 예나 오늘 받아쓰기 100점 맞았어. 이것 봐. 5월 25일!”
예나는 ‘100’이라고 동그라미 쳐진 숫자 위의 오늘 날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점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날짜가 중요하다는 우회적 표현이었다. 오늘이 며칠인지를 일깨워주면 엄마는 내일모레가 무슨 날인지도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 정말이네! 우리 예나는 받아쓰기도 잘하고 글씨도 잘 쓰는구나!”
하지만 정오는 받아쓰기 성적과 함께 예나의 글씨만 칭찬했다. 예나에게는 뜻밖의 난관이었다.
난감해진 예나가 더 쉬운 힌트를 던졌다.
“엄마, 받아쓰기 내일모레 또 한대. 5월 27일에.”
“그렇구나. 엄마가 도와줄까?”
“……아니. 됐어. 내가 할게.”
날짜 각인에 실패한 예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시 머리를 굴린 예나는 몰래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통화대기음을 들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행히도 할아버지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우리 예나 공주님이신가!]
역시나 재광은 예나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요란스러운 목소리였다. 할아버지의 반응에 예나의 기운이 돌아왔다.
예나는 곧장 용건을 말했다.
“할아버지! 5월 27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5월 27일? 당연히 알지! 우리 예나 생일인데. 할아버지는 그날만 기다리고 있어.]
“정말요?”
[그러엄!]
“그런데요, 할아버지. 우리 엄마랑 아빠는 잊어버렸을지도 몰라요.”
[왜. 어떻게 그걸 잊어버려.]
“엄마랑 아빠는 예준이 보느라 바빠서요.”
예나의 목소리가 자그마해졌다.
“그래서 그러는데요. 할아버지가 엄마 아빠한테 5월 27일이 예나 생일이라고 얘기해주면 안 돼요?”
[예나는 얘기 못 하겠어?]
“네.”
옆구리 찔러서 절을 받기는 싫은 마음. 하지만 챙겨 받고는 싶은 마음.
이런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할아버지가 있어서 그래도 다행스러웠다.
[그래. 그럼 얘기해줄게, 그런데 예나야.]
“네.”
[엄마 아빠는 다 기억하고 있을 거야. 할아버지가 얘기해줄 필요도 없이 다 기억하고 있어. 할아버지가 다 알아.]
자상하게 예나를 설득한 재광의 목소리가 더욱 긴밀해졌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예나야.]
“…….”
[할아버지는 우리 예나가 최고다.]
재광은 손녀딸의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 깨알 어필을 잊지 않았다.
[예나 동생이 태어나고, 동생이 또 태어나도, 예나 사촌동생들까지 수두룩이 태어나도, 할아버지한테는 우리 예나가 첫 번째야.]
뜻밖의 고백에 예나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그럼 할아버지는 예나가 예준이 안아주지 말라고 하면 안 안아줄 거예요?”
[그래야지. 우리 예나가 하는 말은 다 들어야지.]
망설임 없는 할아버지의 대답에 예나는 웃음이 났다.
머릿속으로는 예준을 안아주지 않는 할아버지의 모습, 할아버지에게 안아달라고 떼를 쓰는 동생의 모습을 그려보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된 동생이 불쌍하단 생각이 스쳤다.
그제야 예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할아버지, 예준이 안아줘도 돼요. 할아버지는 예나가 첫 번째니까 괜찮아요.”
사랑을 확인받은 것만으로도 괜찮아졌다.
할아버지 덕분에 예나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더 흘러 생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자 다시 자신이 없어졌다. 엄마 아빠는 계속 바빴고 예나의 말을 들어줄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리하여 5월 27일 아침.
“예나공주. 정예나.”
8시가 넘은 것을 어렴풋이 알아챘지만 예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정오가 다가와 고운 목소리로 예나를 깨웠으나 더욱 눈을 꼭 감았다.
“안 일어날 거야? 학교 가야지.”
“싫어. 안 갈래애.”
예나는 고집을 피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생일 파티도 안 할 거야?”
생일 파티?
엄마의 목소리에 예나는 눈을 번쩍 떴다.
“우리 예나 생일 축하해!”
예나의 눈앞에는 생일 파티 고깔모자를 쓴 정오와 지헌, 국순 그리고 영미가 떠준 파티 모자를 쓴 예준이 있었다. 예나의 눈에 눈물이 그득그득 차올랐다.
“안 잊어버렸어?”
“그걸 왜 잊어버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날인데.”
예나의 물음에 정오가 대답했다.
정말? 정말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날이야? 엄마랑 아빠한테도?
예나는 감격하며 엄마의 목에 와락 매달려 안겼다.
그 옆에서 지헌이 예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예나 생일 축하해!”
“아빠아!”
예나는 곧장 아빠 품으로 옮겨갔다.
“오늘은 엄마랑 아빠랑 같이 놀자. 우리 예나 하고 싶은 거 다 하자.”
“아빠 회사 안 가?”
“오늘은 안 가도 돼.”
와아아아! 벅찬 환호성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