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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외전]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란다 (4) (180/183)


180. [외전]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란다 (4)
2023.01.18.


이틀 전, 지헌은 재광에게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잘 지내지?]

“그럼요.”

[아기 키우느라 힘들진 않고?]

“힘들다고 말씀드리면 육아휴직이라도 시켜주시나요?”

[계약직이 휴직은 무슨.]

지헌의 작은 바람을 농담으로 넘긴 재광이 은근슬쩍 운을 떼었다.


[저기, 모레 말이다. 저녁에 시간 좀 있냐?]

“그날은 휴가예요. 예나 생일이잖아요.”

[그래, 그렇지. 그래, 그래, 그래.]

“아버지 예나 생일을 잊으셨어요?”

[잊긴! 내가 왜 잊어. 혹시나 네가 잊었을까 봐 떠본 거 아니냐.]

“제가 왜 잊어요. 말이 되는 말씀을 하세요.”

한 번씩 톡 쏘아붙인 부자는 동시에 조용해졌다.

서먹서먹한 침묵 뒤에 지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 때문에 전화하신 거예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요?”

“아니야. 일은 무슨…… 예나 생일날 저녁에 놀러 가마.”

재광의 대답은 어딘가 수상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끊은 지헌은 그날 저녁, 정오에게 낮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보고했다. 정오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낮에 예나도 은근슬쩍 제 생일 날짜를 짚어주었지.

예나의 생일이 다가온다는 건 한시도 잊은 적이 없지만 정오가 먼저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예나가 먼저 얘기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언제 이야기를 꺼내려나 지켜보았는데 이토록 잠잠할 줄은 몰랐다. 돌이켜 보니 예나가 일부러 말을 꺼내지 않은 것 같았다.

고 작은 아이가 생일을 얘기하는 걸 꾹 참고 있는 걸까.


“혹시 아버님이랑 예나랑 무슨 얘기를 나눈 거 아닐까?”

정오가 의문을 제기했다. 지헌은 곧장 재광에게 다시 연락하여 낮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추궁했다. 그리고 재광은 마지 못해 진실을 알려주었다.

*

그리하여 5월 27일.

정오와 지헌 그리고 국순은 아침 일찍 일어나 생일상을 차리고 집 안을 꾸민 후 때마침 잠에서 깬 예준을 데리고 예나의 방으로 갔다. 처음에는 일부러 게으름을 피우는 듯 눈을 뜨지 않았던 예나가 ‘생일’이라는 말에 벌떡 일어났다.


“아빠, 그럼 나 오늘 학교 안 가도 돼?”

지헌의 품에 안긴 예나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예나 마음대로 해. 어떻게 하고 싶어?”

“안 갈래! 아니아니, 갈래! 받아쓰기한댔어.”

“그럼 학교 다녀와서 뭐 할까?”

“플라잉요가!”

한참 고민을 할 줄 알았는데, 예나의 대답은 몹시 빨랐다.


“엄마랑 아빠랑 같이 플라잉요가 배우고 싶어!”

플라잉요가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지헌은 곧장 휴대폰으로 플라잉요가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천장에 매달린 해먹으로 발레리나처럼 멋진 자세를 해 보이는 여자들의 이미지가 화면 가득 나타났다. 군데군데 가뭄에 콩 나듯 남자의 사진도 보이긴 했다.

풉. 고개를 기울여 지헌의 검색화면을 본 정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예나가 엄마랑 아빠랑 이걸 하고 싶다는 거지?”

“응!”

“아빠도 이 쫄쫄이 옷을 입고?”

“응!”

정오의 물음에 크게 대답한 예나가 지헌을 부추겼다.


“아빠, 같이할 거지?”

대답해. 뭐든 하기로 했잖아.

정오는 입술을 길게 늘이며 지헌을 바라보았다. 지헌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보니 재미있었다.


“그래. 하자.”

대답에 한숨소리가 섞인 것 같기도 했지만 지헌은 흔쾌히 수락했다.

와아아아! 예나가 떠들썩하게 환호했다.

예나는 국순과 지헌이 열심히 준비한 생일상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엄마가 꾸며놓은 거실에서 사진을 여러 장 찍고 학교에 갔다. 달라진 점은 이제 생일기념 공주옷을 입지 않는다는 것. 공주옷과 티아라를 졸업한 예나의 차림은 간편했다.

예나가 학교에 간 사이에 지헌은 요가 레슨을 예약하고 매장을 찾아 요가복을 구입했다. 그리고 예나가 바둑학원과 미술학원 수업을 마친 오후 5시에 정오와 지헌과 예나는 요가학원으로 향했다.

강사는 플라잉요가를 처음 해본다는 세 사람이 첫날부터 복장을 갖추어 온 것에 깜짝 놀랐다. 더군다나 모두 군살 없이 늘씬한 몸매들이라 비주얼로는 가족발레단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 분 모두 요가에 맞는 체격이네요. 재미있게 배우실 수 있겠어요.”

강사가 열의에 눈을 빛내며 수업을 시작했다.


“다들 처음이니까 기본적인 자세들을 배워볼게요. 해먹 전체를 손으로 잡고 허리 밑으로 걸쳐서 해먹에 몸을 맡기면 이렇게 몸이 뒤집어져요. 이 상태에서 해먹에 발을 걸치면 몽키자세가 돼요.”

강사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해먹에 두 다리를 꼬아 거꾸로 매달렸다. 강사의 동작을 유심히 본 지헌이 가장 먼저 자세를 해냈다. 정오와 예나도 강사의 도움을 받아 해먹에 매달렸다.

강사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연결 동작을 선보였다.


“여기서 다시 해먹을 붙잡고 상체를 들어 올려서 팔을 뒤쪽으로 잡아요. 이걸 팅커벨이라고 해요.”

팅커벨! 잘 아는 요정 이름! 예나는 팅커벨 자세에 반해버렸다.

하지만 강사의 가르침대로 동작을 시도해보던 예나는 금방 좌절했다. 강사의 움직임은 가뿐해 보였으나 눈으로 보는 것과 실전은 다른 거였다. 복근과 악력이 부족하면 쉽게 할 수 없는 자세였다.

몸에 무리가 올까 싶어 일찌감치 포기한 정오는 그네를 타고 있었다. 강사와 예나가 자신만 쳐다보니 지헌은 어깨가 무거워졌다. 자세를 해내야 했다.

튼튼하긴 하지만 유연하진 않아서 몸이 뻣뻣하게 움직였다. 그래도 자랑할 만한 체력이라 어렵지 않게 자세를 해냈다. 굵은 줄이 살에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운동이라는 이름의 고문이었지만, 지헌은 사랑의 힘으로 남자 팅커벨이 되었다.


“아버님! 잘하시네요! 정말 소질 있으신데요?”

강사가 신나게 손뼉을 쳤다. 지헌의 성공에 탄력을 받은 예나도 다시 해먹을 잡았다. 강사가 예나를 거들어주었다.


“삐뽀삐뽀. 삐뽀삐뽀.”

“응?”

“다리 아파요. 삐뽀삐뽀. 삐뽀삐뽀.”

 

 
지헌에게 고문이었던 자세는 예나에게도 똑같이 힘들었다. 플라잉요가를 하자고 엄마 아빠를 졸랐던 입장에서 크게 비명을 지를 수는 없고, 그저 입으로 사이렌 소리를 내는 예나의 깜찍한 표현에 지헌은 살이 아픈 와중에도 웃음이 났다.

힘들었지만 저마다의 웃음 속에서 시간은 빨리 흘러갔다.


“예나가 아빠를 닮아서 정말 잘하네요.”

강사도 뿌듯하게 소감을 말했다.

레슨이 끝난 것이 아쉬운 듯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예나에게 지헌이 물었다.


“예나야, 또 오고 싶어?”

“응!”

“그럼 아빠랑 매주 올까?”

“그래도 돼?”

아빠가 바쁘다는 걸 잘 알아 보채지는 못하면서도 설레는 표정으로 되묻는 아이를 보며 지헌은 가슴이 찡했다.


“그럼. 당연하지.”

 

*

집으로 돌아오니 저녁때가 되었다. 예나의 생일을 맞아 재광과 영미를 비롯하여 승규네까지 초대를 받았다. 다시 파티였다.

정오가 먼저 선물을 내밀었다.


“예나 생일 축하해! 이건 엄마가 주는 선물.”

“이게 뭐야?”

“예나가 좋아하는 책이지!”

영미의 선물은 언젠가 예나가 만들어달라고 했던 손뜨개 가방이었다.


“자. 우리 예나가 주문한 캥거루 가방.”

하지만 예나는 정성이 가득 담긴 가방을 들고서도 투덜댔다.


“할머니이. 캥거루 가방이면 여기 주머니에 들어가는 아기 캥거루도 있어야죠오.”

“그건 나중에 해줄게. 할머니가 이거 뜨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예나 생일에 맞추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다크서클이 광대뼈까지 내려온 영미가 한탄하듯 대꾸했다. 사실 예나는 매번 제 말에 할머니가 쩔쩔매는 것이 재미있어 장난을 친 것이었다.

이번에는 지헌의 선물. 지헌이 준비한 선물은 가장 커다랬다.


“이건 우리 예나가 좋아하는 구체관절인형.”

“와아아!”

평소에 갖고 싶었던 선물이라 예나도 환호했다.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듯이 재광이 끼어들었다.


“예나야! 할아버지는 금메달 과자다!”

할아버지의 선물 상자는 규모가 남달랐다. 재광은 작년에 예나가 바둑대회 우승을 차지했을 때 받은 영감으로 과자를 만들었다.

금메달 모양의 포장이 번쩍거리는 과자였다. 과자 이름도 ‘공주님의 선물’. 이제 다가오는 여름쯤이면 전국의 마트에서 판매가 될 상품이었다.

예나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할아버지가 예나를 위해 만든 과자야.”

“와아. 할아버지, 최고!”

봐. 내가 최고래.

재광이 지헌의 옆에서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앞다투어 선물을 꺼내놓은 가족들의 시끌시끌한 선물 경연대회의 말미에 도빈도 자그마한 상자를 내밀었다.


“예나야! 나도 여기 선물!”

“이게 뭐야?”

“슬라임.”

“와아아아아! 슬라임이다아아!”

예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간 엄마가 슬라임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하여 아쉬웠던 예나에게는 도빈의 소박한 선물이 1등이었다. 요란스럽게 휘황찬란한 선물을 들이밀었던 가족들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고개를 돌린 지헌의 옆에 웬 카드가 떨어져 있었다. 지헌은 카드를 주워들었다. 도빈이 쓴 카드였다.

- 예나야, 생일 축하해! 어른 되면 우리 결혼하자!

이 녀석이, 감히 누구한테 벌써 청혼을.

지헌은 아무도 몰래 카드를 주머니에 넣었다. 도빈이 카드가 빠진 것을 알아채고는 지헌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저씨, 여기 떨어진 카드 못 봤어요?”

“아니. 못 봤는데.”

지헌은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떼었다.

*

신나는 생일파티를 마친 후, 밤 10시가 넘어서야 예나는 잠자리에 누웠다.

내내 행복에 겨워 여태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예나가 탄성을 터트렸다.


“아아! 내일도 생일이었으면 좋겠다!”

그 옆에 나란히 누운 지헌이 예나의 머리카락을 쓸며 마음으로 말했다.

아빠가 그렇게 해줄게.

내일도 내일모레도, 매일이 생일인 것처럼 너를 아끼고 사랑할게.


“아빠, 오늘은 내 인생에서 제일 멋진 생일이었어.”

여덟 살 아이의 인생에서 가장 멋진 생일.

아빠도 영광이야.

예나의 인생에서 제일 멋진 생일을 함께하게 되어서 영광이야.

작년 이맘때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세상 최고의 날.

참 신기하지. 나를 아빠라고 불러준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였는데, 그 하나 때문에 달라지는 내 인생이 너무나 행복하니 말이야. 정오야, 너도 그랬을까.

지헌의 목 안쪽에 물기가 고인 사이에 예나의 눈꺼풀이 잠잠히 내려앉았다. 노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는지 예나는 금방 잠이 들었다.

잠시 후 정오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같은 시간에 칭얼대기 시작한 예준을 재우고 바로 뛰어온 것이었다. 생일을 맞은 딸에게 잘 자란 인사를 하고 싶어서.


“예나 자?”

“응.”

“잠들면서 뭐래?”

“멋진 생일이었대.”

정오는 자리에서 일어난 지헌의 옆에 나란히 앉아 잠든 예나를 바라보았다. 잠든 표정이 행복하고도 편안해 보였다.

언제나처럼 엄마를 찾으며 칭얼거릴 줄 알았는데 오늘 예나는 투정도 안 부리고 잠이 들었다. 그새 성장을 한 것처럼 의젓하게.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란다. 하루하루 자라는 건 보이지 않는데, 어느 날 문득 보면 훌쩍 자라 있는 것이 느껴진다.

오늘도 아이는 성큼 자란 것 같았다.

그것이 고맙고 미안한 정오였다.

정오는 시간이 좀 더 천천히 흘러갔으면,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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