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외전] 영원히 내 곁에 있어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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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외전] 영원히 내 곁에 있어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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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외전] 영원히 내 곁에 있어요 (1)
2023.01.21.
예준이 깊게 잠든 한가한 저녁.
국순은 딸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노래를 하여 고기를 구웠다. 그러나 딸이 먹을 고기는 전부 동그란 쌈이 되어 손녀딸의 입으로 들어갔다.
“쌈 싫어어!”
정오가 거듭 제 입에 쌈을 넣으려 하자 예나가 투정을 부렸다.
“쌈을 먹어야 응가가 잘 나오지! 얼른 먹어!”
“싫어! 나 응가 잘 나온단 말이야.”
“여기 똥배 좀 봐라. 너 1학년 되고 3kg이나 쪘어. 키는 1cm 컸는데 몸무게만 늘었다고. 이게 다 골고루 안 먹어서 그런 거야. 알아?”
“흥. 엄마 미워!”
결국 정오의 잔소리를 듣다 못한 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예나가 제 방으로 건너가자 이 틈을 타 정오는 고기를 제 입에 와구와구 넣었다.
누가 쫓아오는 듯이 바쁜 젓가락질에 이번엔 국순이 한마디 했다.
“꼭꼭 좀 씹어 먹어.”
“응. 꼭꼭 씹어먹고 있어.”
“다른 반찬도 좀 먹어. 예나한테는 그렇게 잔소릴 하고선 너는 고기만 먹고 있어. 채소도 좀 먹어.”
“나는 어른이잖아.”
“…….”
“예나 안 볼 때 고기 먼저 실컷 먹어야지. 이따가 채소 먹는 거 보여줘야 하니까.”
제 딸에게 보여주는 모습과 제 엄마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이렇게나 달랐다. 국순은 조근조근 딸을 달랬다.
“그래도 엄마가 한 건데 골고루 좀 먹어.”
“응. 엄마가 한 거니까 이만큼 먹을 수 있는 거지, 딴 채소는 못 먹는다, 엄마.”
“그게 자랑이야? 채소를 팍팍 먹어야 건강해지지.”
“에이, 굳이 건강이라면, 마음의 건강을 위해 먹는 거야. 아, 오늘도 내가 고기와 함께 채소를 먹었구나, 채소를 먹었으니 나는 건강한 사람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은 마음에 위안을 주니까.”
이런 아이가 애엄마가 되었다. 언제나 내 품에서만 있을 것 같은 철부지 아이가.
국순은 정오를 더 말리지 못하고 한숨과 함께 피식 웃어버렸다.
딸이 고등학생이 된 해부터 대학생 시절까지 몇 년을 제외하고는 계속 함께 살아왔고 가까이서 챙겨줘서인지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딸을 상상하기가 힘들다.
남들은 딸 뒷바라지하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며 심각한 표정으로 묻곤 한다. 그때마다 국순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내가 딸을 의지하고 있다고. 이렇게 함께 살아서 너무 든든하다고.
그건 사실이었다. 둘째 손주가 태어나는 바람에 조금 분주해지긴 했지만, 예전에 비할 수도 없이 안정적인 생활이었다.
몸이 편안하니 스스로에 대해 돌아볼 기회가 생겼다. 자신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몸이 바쁜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 계속 누군가를 챙겨주고 싶어 하고 성과가 나는 사회생활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스스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요리학원의 강사가 말을 걸어왔다. 국순이 이론 없이 자유롭게 만든 요리가 수강생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날이었다.
“여사님은 왜 요리를 다시 배우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잘하셔서요.”
강사의 눈빛에는 진심과 존경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책에 나오는 대로 정형화된 걸 배우고 가르치는 건데, 여사님께서는 이미 스스로 맛을 낼 줄 아는 분이시잖아요.”
“젊을 때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못 했어요. 아니, 사는 게 바빠서 공부를 포기했죠. 생각해보니까 바쁘다는 건 핑계였던 것 같네요.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요.”
국순은 오래전 어린 딸을 업고 나와 일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입술을 슬며시 늘였다.
“그때 공부를 했더라면 지금이랑 다른 길을 갔을 수도 있겠네요. 이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겼어요. 정말로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예요. 취직하려고, 살아보려고 공부하는 젊은 사람들한테는 내가 여기서 취미처럼 수업 듣는 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나도 실은 살려고 공부해요.”
“…….”
“여기 있으면 정말로 힘이 나거든.”
모든 대답은 진심이었다. 요리학원의 동기들, 강사들은 국순의 사위가 누구인지, 손녀딸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오로지 이국순 하나만을 보고 격려하고 응원해주는 이들에게서 국순도 매번 활력을 얻었다.
어느덧 국순은 원하던 조리사 자격증을 모두 따고 자격증반을 졸업하게 되었다. 그간 친해진 동기들이 국순을 조리대로 데리고 가 카메라를 들었다.
“자신 있는 요리 하나만 보여주시면 안 돼요? 이국순 레시피 만들게요.”
“안 되지! 국순님 요리는 돈 받고 팔아야 하는 거라고!”
“아, 그럼 국순님, 동영상 채널 개설해보시는 건 어때요?”
“와! 그거 좋겠다! 우리 옆집 사는 아주머니도 요리 채널 운영하거든요. 자랑을 하면서 보여주길래 그런가 보다 하다가 한번 기회가 생겨서 그분 요리를 시식하게 됐는데요…… 국순님 음식이 훨씬 맛있어요! 아니, 비교도 안 되지.”
“국순님, 저희가 채널 개설해드릴게요! 여기다가 아무거나 올리시면 돼요!”
시끌시끌하게 떠들던 젊은이들은 기어이 이국순의 동영상 채널을 만들어주겠다고 나섰다. 젊은이들의 혈기 넘치는 추진력이 좋아서 국순도 거부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앞날을 응원해준다는 것이 고마웠다.
또한 젊은이들이 이토록 열정적으로 설명해주니 국순도 흥미가 생겼다.
“이거를 이렇게 누르면 되는 거예요?”
“네. 제가 거치대 선물해드릴게요. 거치대로 요렇게 카메라를 설치하고 하이앵글로 잡아서 녹화하시면 돼요. 꼭 얼굴이 나올 필요 없어요. 요리하는 손 움직임 위주로 하시면 되고요. 친구분이랑 대화 나누듯이 편하게 이것저것 말씀하시면서 차분히 요리하시면 돼요. 참 쉽죠?”
쉽지는 않았지만…… 동기들과 계속 소통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웠다.
“운영하다가 모르는 거 생기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가르쳐드릴게요.”
그렇게 국순은 속성으로 동영상 채널 운영방식을 익히게 되었다.
*
어느 날 밤, 하루 종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정오가 퇴근한 지헌에게 긴하게 물었다.
“우리 엄마 요즘 뭐 달라진 거 못 느껴?”
“뭐가?”
“평소보다 좀 더 생기가 느껴진달까? 자주 웃으시더라고.”
“우리 어머님, 잘 웃어주시지.”
“아니. 그런 게 아니야. 휴대폰을 보고 자꾸 웃어.”
“재미있는 동영상 같은 걸 보신 게 아니고?”
“글쎄. 그런 느낌이 아니었어. 약간 설레는 듯한 미소였다고.”
“…….”
“엄마한테 뭔가 있어. 분명히.”
딸만이 알 수 있는 느낌. 엄마에게 비밀이 생겼다는 것을 정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애인이라도 생긴 거 아닐까? 아니면 썸남이라도.”
정오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조심스럽게 썸남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상상력을 펼치는 정오가 신이 난 듯 보여서 지헌은 의외라 생각했다.
“질투 나지 않아?”
“질투를 왜 해. 나도 남편이 있는데.”
“…….”
“엄마가 만나는 분이 좋은 분이었으면 좋겠단 생각은 해.”
“당연히 좋은 분이겠지. 어머님이 만나는 분이라면.”
몇 마디 나누어본 사람은 국순에 대하여 한없이 인자하고 다정한 사람이라 속단하지만 사실 국순은 전혀 무르지 않은, 그 누구보다도 속이 단단한 사람이었다.
타고난 혜안과 눈썰미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정확히 판단하여 짧은 시간에 최적의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럼 어머님이 좋은 분 만나서 결혼하시게 된다면?”
“응?”
“좋은 분을 만나면 결혼하시게 될 수도 있잖아.”
“…….”
“그럼 어머님이랑 따로 살게 될 수도 있고.”
지헌이 지적해주자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정오의 미소가 쏙 들어갔다.
정오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결혼해도 같이 살 수 있잖아.”
“그건 어머님의 선택이지.”
엄마와 따로 살게 된다니.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정오는 국순의 방으로 달려갔다. 국순은 정오가 오니 보고 있던 휴대폰 화면을 뚝 끄고서 휴대폰을 무릎 아래로 감추었다.
“왜. 무슨 일 있어?”
국순의 물음에 대답은 않고서, 정오는 국순의 무릎을 베고 대뜸 누워버렸다.
“엄마, 엄마는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지?”
“왜 또 이래.”
“나는 엄마의 사랑이 필요한 아기잖아. 엄마의 영원한 아기.”
“뭔 아기 타령이야. 네 아기들이 듣겠다.”
“엄마아아.”
뜬금없는 아양에 국순의 코평수가 넓어졌다. 정오는 그렇게 국순의 무릎에 머리를 연거푸 비비다가 예준이 우는 소리에 냅다 일어나 달려갔다. 국순은 참 별일도 다 있다 생각했다.
*
날이 많이 더워진 어느 날.
재광이 지헌의 가족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지헌과 정오, 예나와 예준은 집을 나서게 되었다. 정오는 국순이 집에 남아 있겠다고 하여 서운한 얼굴로 푸념했다.
“엄마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너희들끼리 잘 다녀와. 나는 오늘은 좀 피곤하네.”
“응. 다녀올게.”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예준을 안아 든 지헌도 인사했다.
“그래. 재미있게 놀다 와.”
가족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낸 후, 한숨을 돌린 국순의 비밀 작업이 시작되었다. 국순은 휴대폰을 들어 동영상 채널 계정을 눌렀다.
채널을 개설한 지 한 달 만에 구독자가 400여 명이 되었다. 요리학원 동기들 외에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몇 편의 동영상을 올렸을 뿐인데 서서히 늘어가는 구독자수가 신기했다.
매번 요리학원에서 동기들의 도움을 받아 동영상을 올리다가 집에서 혼자 작업해보려니 힘들긴 했다. 거치대로 하이앵글을 만드는 것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국순은 혼자서 해냈다.
촬영버튼을 꾹 누른 국순이 목소리를 냈다.
“오늘은 시원한 걸 만들어 보려고 해요. 오이냉국 그리고 식혜.”
이제 촬영도 몇 번 해봤다고, 처음처럼 긴장되진 않았다.
“식혜는 추운 날 먹는 전통 음식인데 이제는 다들 냉장고가 있으니 그럴 필요가 없지요. 솔직히 더운 날 먹어야 더 맛있어요. 몸이 더우면 시원한 걸 먹어야지요. 또 몸이 추워지면 뜨끈한 걸 먹어야 하고. 이열치열, 이한치한이라고 하는데, 사실 너무 이겨내려고 할 필요는 없어요.”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잣말을 늘어놓는 것은 여전히 어색했지만.
“한겨울에 따뜻한 물로 샤워하면 욕실 밖으로 나가기 싫지요. 아직 몸이 너무 추우니까. 그럴 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따뜻한 물 틀고 있지 않나요? 몸이 뜨끈해졌다, 이제 좀 더워졌다 싶을 때가 되어야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재료들을 손질해가며, 간간이 동영상 화면을 살펴가며 국순은 촬영에 열중했다.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충분히 따뜻하지 않을 때는 누군가한테 내 걸 나눠주지 않아도 돼요. 가만히 있어도 돼요. 주위 사람들한테 베풀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책하지 않아도 돼요.”
그렇게 주절주절 아무 말이나 하며 한참을 몰입해 있을 때.
달칵.
“엄마.”
“어머니.”
현관문이 열리고 딸과 사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것이다.
화들짝 놀란 국순은 급하게 녹화 정지 버튼을 눌렀다.
국순이 거치대를 아래로 치우기가 무섭게 지헌이 주방 쪽으로 다가왔다.
“다녀왔습니다.”
“어어, 왔어? 일찍 왔네?”
“네. 두 분이 같이 상갓집에 가실 일이 생겨서요. 그런데…….”
국순이 급하게 숨긴 휴대폰 거치대를 발견한 지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국순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