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외전] 영원히 내 곁에 있어요 (2)
(182/183)
182. [외전] 영원히 내 곁에 있어요 (2)
(182/183)
182. [외전] 영원히 내 곁에 있어요 (2)
2023.01.25.
보았을까? 들켰으려나?
긴장한 국순의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한참만에 지헌이 물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으……응. 괜찮아. 잠깐 피곤했는데 또 금방 괜찮아졌어.”
“네. 다행이네요.”
진실을 감춘 국순의 대답에 지헌이 끄덕였다. 들키면 쑥스러울 것 같았는데, 무사히 넘어간 것이다. 국순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에도 사위의 태도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국순은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딸은 몰라도, 눈치 빠른 사위가 자신이 무언가 감추고 있다는 걸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결국 국순이 먼저 입을 열게 되었다.
“……아무것도 안 물어보네.”
은근슬쩍 운을 떼니 마음을 들킨 듯 사위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지헌은 정말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며칠 전 국순이 주방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은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자신이 알아보는 것에 놀란 듯, 감추고 싶은 듯 국순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워했기에 지헌은 모른 척해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국순은 도리어 안심하게 되었다. 자신이 제대로 떠본 것이었다. 사위가 어떻게 생각할까, 알아본 걸까 모른 척해주는 걸까 괜스레 신경 쓰였는데 말을 꺼내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이걸 하고 있었어.”
국순은 동영상 채널을 열어 자신이 만든 콘텐츠를 보여주었다.
국순에게서 휴대폰을 건네받아 화면을 훑어본 지헌의 눈이 더욱 커다래졌다.
“어머님이 이걸 만드셨다고요? 직접 채널을 개설하신 거예요?”
“요리학원 동기들이 개설해줬지. 나 혼자선 못 해.”
국순은 수줍게 모두 털어놓았다.
“그저께는, 계속 요리학원에서만 찍다가 집에 아무도 없을 때 혼자 찍어보려고 한 거야.”
“구독자가 4백 명이 넘네요.”
“신기하게 매일 조금씩 올라가더라고. 세 달쯤 지나면 얘기하려고 했어. 그때쯤이면 그래도 자랑할 만큼은 되지 않을까 싶어서.”
“4백 명도 정말 대단한데요.”
지헌이 계속 콘텐츠들을 살피며 말했다.
지헌이 눈치챈 건, 어머니께서 콘텐츠를 만들어보려고 하신다, 정도였다. 이미 채널을 운영하고 있고 개설한 지 한 달 만에 400여 명의 구독자를 모았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더욱 놀라움이 컸다.
어쩐지 지헌의 엉덩이도 들썩거리는 것 같았다.
“어머님만 괜찮으시다면 어머니 작업실을 만들어드릴게요.”
“아유, 아니야. 일이 아니고 취미로 하는 건데.”
지헌이 꺼낸 제안에 국순이 손사래를 쳤다.
“너무 본격적으로 하려고 들면 부담스러워서 못 해.”
“…….”
“요리학원에서 가끔 촬영도 할 수 있게 해 주고 스무 살짜리 어린 동기들도 다들 도와주고 그래서 그냥 재미 삼아 하고 있는 거야.”
어머님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머님은 충분히 더 유명해지실 수 있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라 확신한다.
지헌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 현실적인 말씀을 드릴게요. 이렇게 온라인에 어머님의 레시피가 오픈된 이상 콘텐츠는 상품이 될 수밖에 없어요. 어머님께서 활동을 계속하면 당연히 더 유명해지실 텐데, 그럼 어머님의 상품을 탐내는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고요.”
“…….”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면 저도 아무 말씀 드리지 않겠지만…… 솔직히 어머님의 재능이 너무 아깝잖아요.”
이성적인 조언 속에 어쩔 수 없이 사심이 섞여들었다. 이제 지헌에게 이국순 여사는 너무나 소중한 가족이었다.
“어차피 유명해질 거, 제대로 하시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해봤어요.”
“…….”
“광고도 그렇거든요. 광고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이미지도 중요해요. 보이는 게 깔끔하고 화질이 좋으면 사람들도 더 홀린 듯이 봐요.”
지헌의 의견에 국순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국순도 망설이게 된 것이다.
“아무튼 제 의견이에요.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마시고, 어머님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헌은 집요하게 설득하지 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국순이 선택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국순의 채널을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구독 버튼을 꾹 누른 지헌은 국순이 만든 동영상들을 처음부터 집중하여 시청했다.
기대만큼, 아니,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이국순만의 특별한 요리법 때문만은 아니었다. 온기가 있는 콘텐츠였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엄마의 목소리로 위로받는 느낌. 실상 지헌이 결혼 전 영미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그 감정을 담아낸 국순의 목소리에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지헌 또한 추진력을 발휘해보기로 했다. 일단 작업실을 마련하여 시설을 갖추고 보여드리면 국순도 어쩔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일을 하기 위해선 아내의 결재가 필요했다.
지헌은 결국 정오에게 사실을 털어놓게 되었다.
국순의 채널을 확인한 정오는 지헌보다 더욱 깜짝 놀랐다.
“……이걸 엄마가 만들었다고?”
“정말 잘하셨지? 이미 프로 크리에이터야.”
“그러니까, 엄마가 그동안 이것 때문에 그렇게 표정이 좋았단 거지?”
엄마가 날 떠나려던 게 아니었어!
정오는 다른 쪽으로 안도하게 되었다. 정오가 채널의 동영상들을 하나하나 눌러보는 동안 지헌이 말했다.
“어머님의 작업실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
“그럼! 그래야지! 적극 지원해드리자!”
그리하여 부부는 특별한 작당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지헌이 꾸민 일로 하기로 했다. 아직 국순이 정오에게 털어놓지 않았으니 정오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일단 나는 아는 척하지 않을게. 엄마가 직접 말해줄 때까지 기다릴게.”
*
얼마 후.
동영상 편집을 배우느라 요리학원을 찾은 국순은 한 시간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헌이 급하게 전화를 했다. 정오에게 줄 선물을 사야 하는데 국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연락이었다.
딸의 일이라면 언제나 두 팔 걷고 나서는 국순에게 사위의 요청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국순님, 오늘은 일찍 가시네요.”
“아니 사위가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고 해서. 어딜 좀 가야겠다고 그러네.”
사위가 누구인지는 얘기하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자랑을 하는 것은 즐기는 편이다. 국순의 자랑에 동기들이 사위님이랑 데이트를 하시는 거냐고 바람을 넣으며 국순을 따라나섰다.
사위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된다는 생각에 동기들의 배웅을 겨우겨우 떨쳐 내느라 국순은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었다.
학원 밖에는 지헌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순이 지헌의 차에 오르며 인사했다.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아닙니다. 지금 왔습니다.”
지헌은 짧게 대답하고는 바로 차를 몰았다.
지헌이 안내한 곳은 집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옷가게가 있는 상가 건물이라 당연히 옷을 사러 가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헌은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갔다.
성큼성큼 먼저 걸어간 지헌은 도어록이 설치된 문 앞에 섰다.
문이 열리자, 작은 식당과 같은 멋진 공간이 나왔다. 국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다 뭐야?”
“어머님 작업실이에요.”
햇빛이 잘 들어오는 탁 트인 공간엔 장정 서너 명이 함께 있어도 될 만큼 큼지막한 원목 조리대와 널찍한 식탁이 있었다.
조리대엔 주방의 온갖 조리도구들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고 그 위엔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어떠세요? 마음에 안 드는 데가 있으면 손 봐 놓을게요.”
국순이 습해진 눈을 깜빡거렸다.
“이걸 예나 아범이 다 준비했어?”
“……네.”
물론 작업실 세팅은 정오가 거의 했지만, 절대 알리지 말라고 거듭 주의를 주었으니 진실은 숨겨야 했다.
“어머님. 그리고 이건 우리 앞치마예요.”
지헌은 더 묻기 전에 국순에게 앞치마를 건네고서 자신도 앞치마를 둘렀다. 집에서도 그렇듯 커플 앞치마였다.
“오늘은 제가 어머님 조수 해드릴게요.”
국순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아무 말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이런 큰 선물을 받은 건 평생의 처음이었다. 그저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라 이런 선물은 너무나 과분한데, 이미 모두 준비해놓은 선물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또한 알고 있었다. 사위 또한 자신이 어떤 선물을 해주든 부담 없이 받을 거란 걸. 그러니 그녀도 부담 없이 받아주길 원할 거란 걸.
기쁘게 받아주면 그걸로 행복해진다는 걸.
“아…… 뭘 만들지…… 뭘 하는 게 좋을까?”
국순은 눈물을 쓰윽 닦고 조리대 앞에 섰다. 그동안 지헌은 카메라 앵글을 맞추었다.
국순은 어떤 음식을 만들까 생각하며 다시 한번 둘러 보았다. 조리도구들이 놓인 것과 인테리어를 다시 유심히 둘러본 후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우리 딸 솜씨구나.
그간 딸이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보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뭔가 마음 쓸 일이 있나 하여 걱정했었는데, 딸은 작업실을 만들고 있던 거였다.
우리 딸도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해준 거구나. 내가 직접 얘기해줄 때까지 기다리며.
진실을 짐작하고 나니 목이 메었다.
“우리 사위, 약밥 좋아하나?”
“그럼요. 엄청 좋아합니다.”
“그럼 그걸 만들어볼까?”
가족들이 좋아하는 약밥을 만들어 집에 가져가고 싶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손을 씻은 국순은 목을 가다듬고서 촬영을 시작했다.
“오늘은 우리 사위가 조수를 해준다고 하네요.”
“안녕하세요. 사위 정 서방입니다.”
“우리 사위 목소리 좋지요? 직접 보면 실물은 더 좋은데. 실물 자랑을 하고 싶지만, 우리 사위의 프라이버시가 있으니까 존중해주자고요.”
아무래도 촬영 체질인지, 녹화가 시작되니 마음이 느긋해지고 신이 났다. 두 사람은 언제나 죽이 잘 맞는 편이라 촬영은 별 고생 없이 마무리되었다.
“편집은 제가 할게요. 저도 배우는 입장이라 부족하겠지만 능숙하게 할 수 있도록 공부할게요.”
“아니야. 내가 할게.”
지헌이 편집까지 자처했으나 국순이 마다했다.
“이런 걸 배우는 것도 재미있어. 모르는 건 물어보면서 내가 해볼게. 고마워.”
두 사람은 함께 만든 약밥을 싸들고 집으로 갔다.
집에 돌아온 국순은 그간의 일들을 정오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지헌과 굳게 약속했던 정오는 정말로 오늘에서야 국순의 비밀을 알게 된 듯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 연기는 조금 어수룩했다.
국순은 딸의 연기력을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주방은 네가 꾸몄던데 뭘.”
“그걸 알아봤어?”
“내가 네 엄만데 어떻게 그걸 몰라봐.”
정오가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모른 척해서 미안해.”
“그동안 숨겨서 내가 더 미안하지.”
“…….”
“고마워. 우리 정오한테도, 우리 지헌이한테도. 너무 고마워.”
그리고 다시 찾아온, 비밀 없는 평화.
“엄마, 유명해져도 나랑 같이 살아야 해. 알지?”
정오는 국순의 팔에 매달리며 어리광을 부렸다.
국순이 곧장 대답하지 않으니 조바심이 난다는 듯 정오가 항의했다.
“빨리 대답해. 나랑 같이 살 거야, 말 거야.”
“엄마가 어딜 가겠어.”
히히.
영원히 내 곁에 있어요.
언제나 이국순 여사의 어린 아기인 정오는 마치 예나가 된 것처럼 오랫동안 엄마의 팔을 붙들고 얼굴을 비볐다.
그사이에 국순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요리학원 동기가 보낸 문자메시지였다.
- 국순님! 동영상 올리신 거 봤어요! 근데 사위님이 도와주신 거예요? 사위님 목소리 왜 이렇게 좋아요? 완전 대박이에요!!